서평: 과학기술과 사회

딱딱한 느낌, 그러나 포괄적이고 알찬 내용

과학기술과 사회에 관심있는 사람을 위한 꼼꼼한 입문서

김병윤(기술정책 협동과정 석사과정)

Andrew Webster,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New Directions
김환석·송성수 옮김, 『과학기술과 사회』, 한울아카데미


1. 테크노피아, 인터넷, <블레이드러너>, <토탈리콜> 없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가상현실과 인간복제라는 자극적 사례없이 과학기술을 이해할 수는 없을까? 이런 얘기들은 이젠 너무나 식상하고 호들갑스럽지 않은가. 우리의 삶 곳곳에 부지불식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술과 과학에 대해서 침묵하면서 너무 극적인 경우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낙관도 동시에 불안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잇는 이론적 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인문학자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의 정체성이나 사이버 스페이스의 문화라는 질문을 던지고 경제학자들은 기초과학과 경제발전, 또는 기술혁신과 경제발전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편,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작업인지에 대해 대중들에게 알리기 바쁘다. 내가 하고있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그러나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왜 변화된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만 관심을 갖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과학과 기술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같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건물의 계단을 따라 걷고,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넌다. 정해진 조작법에 따라 기계를 작동시키고 공장에서는 기계의 '호흡'에 맞춰 노동을 한다. 이미 우리는 과거보다는 훨씬 과학으로 짜여진 리듬 안에서 생활한다. 정부나 기업도 과학이 중요하다며 투자를 늘리고 있고 대학에서도 이공계열은 점점 커져서 공대생이 이미 대학 신입생의 20%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여기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 과학­기술­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2. 한국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80년대 초반 조홍섭(한겨레 생활문화부장)과 이필렬(방송통신대 교양과정부 교수)에 의해 소개되었다.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1984)』, 한길사와 『과학과 사회의 현대사(1982)』, 풀빛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에 이루어졌던 미국과 유럽의 신좌파적 과학기술운동과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일본의 과학기술운동에 대한 귀중한 자료다. 물론 영국의 결정학자이자 맑스주의자였던 J.D.버널의 『과학의 역사 1∼4』, 한울도 80년대 초에 주로 학습되던 책이다. 한편 급진성은 떨어지지만 오진곤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도 『과학과 사회』, 전파과학사, 『과학과 사회를 잇는 교육』, 전파과학사, 『과학사회학』, 정음사 등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내고 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럽 과학기술운동의 대표격이었던 『급진과학잡지 Radical Science Journal』도 폐간되고 서구와 10여년의 차이를 두면서 수입된 국내에서의 논의도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그라든다. 그러던 중 90년을 전후해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이때에 과학기술혁명(STR)론이 같이 수입되었다. STR론에 관련해서 당시에 소개되었던 책들로는 이창수 옮김, 『과학기술혁명론입문』, 동녘, 안치슈킨, 『사회주의의 미래와 과학기술혁명』, 푸른산, G.마린코, 『과학기술혁명이란 무엇인가』, 백산서당, 리흐타 외, 『현대자본주의와 과학기술혁명』, 동녘 등이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청년과학기술자협의회>은 STR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동안 자신의 논의를 정리해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1990)』, 한길사를 펴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STR론은 잊혀졌고 과학기술운동에 포괄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환경운동과 정보운동이 독자적인 힘을 얻으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논의는 잦아들었다. 게다가 STR론의 기술결정론적인 편향이 지적되면서 이제 더이상 STR론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던 중 환경과 정보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서구의 과학사회학, 기술사회학의 논의가 점차 소개되기 시작했다. 몇몇 연구자들은 과학지식사회학이나 기술사회학에 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더글러스 켈러, 『과학과 젠더』, 동문선, 루쓰 허버드, 『생명과학에 대한 여성학적 비판』, 이화여대 출판부나 송성수 편역,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녹두 등이 80년대 중반 이후 단절되었던 유럽의 논의를 잇기 시작했다. 『과학과 젠더』와 『생명과학에 대한 여성학적 비판』은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과학지식과 생명과학의 남성성을 공격했고 최근에 나온 『피타고라스의 바지』, 사이언스북스도 특히 객관적이라고 인식되어온 수학에 대해서 페미니스트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는 곧 출판될 『(가칭) 형성 중인 사회』, 새물결과 더불어 '기술의 사회적 형성/구성론(the social shaping/construction of technology)'을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 대다수의 기술관련 서적들이 주로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논의는 기술이 만들어지는 과정, 기술과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보다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에 대해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의 『20세기 과학의 쟁점들』, 민음사를 통해 현대 과학사의 진행과정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회학의 최근 성과들을 담고있는 책은 그동안 없었다. 오진곤 교수의 책들이 그나마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최신의 학문적인 성과를 담고 있지 못하고 내용의 면에서도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3. 『과학기술과 사회』는 차분하면서도 꼼꼼하게 현대의 과학사회학을 요약해주고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는 비교적 최근인 1991년, 영국사회학회에서 사회학의 분야별 동향을 정리하기 위해 기획한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위한 사회학(Sociology for a Changing World)"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기획의도에 적절하게 많은 내용이 포괄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은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얘기로부터 출발한다. 과학자 사회는 어떤 규범을 갖고 있기에 과학지식이라는 특이한 지식을 만들어내는가에 관심을 가졌던 머튼(R.K. Merton)으로부터 시작한 과학사회학에서 과학지식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 협상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과학지식사회학으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을 소개해주고 있다(2장). 한편, 과학정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사회적 영향이 유의미하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3장에서는 정책학에서 과학과 기술을 다루는 방법과 사회학의 성과를 비교하면서 정책학의 가정들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책학이 가진 기술이전에 대한 낙관적 견해, 전문성에 대한 견해, 규제에 대한 견해가 이론상의 과학지식과 현실 적용과의 관계문제, 전문성의 가치중립성문제, 규제의 동학에 대한 과학사회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4장과 5장은 과학기술의 활용이라는 제목으로 국가와 과학기술, 기업과 과학기술이라는 주제를 각각 다루고 있다. 국가가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을 하는 이유와 그 성격의 변화, 그리고 기업 연구소의 출현부터 기업 연구소의 특이한 조직문화와 기업연구소가 생기면서 생물공학이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6장은 지금까지보다는 흥미진진하다. 기존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을 특정한 쟁점에 대해서만 항의를 표하는 '압력단체'유형과 장기적 전망에서 과학기술의 성격과 방향 자체를 문제시하는 '대안과학'유형으로 나누고 대안과학운동을 다시 세가지로 나눠 살펴보고 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제시되었던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운동은 생태주의운동, 제 3세계의 대안기술운동, 루카스 항공의 자주관리실험을 비롯한 영국의 실험 등의 구체적 형태가 있었다. 급진과학운동은 80년대 초에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과학의 이용/오용(use/abuse)을 문제시하는 30∼40년대의 버널의 입장을 시작으로 해서 60∼70년대의 과학 자체에 대해 비판하는 로즈 부부를 비롯한 『급진과학잡지』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다. 이것이 너무 간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 토론토대 과학기술사철학과의 홍성욱 교수가 91년에 쓴 [급진적 과학 운동과 그들의 과학관], 『과학세대』 창간호를 참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페미니스트의 과학비판을 다루고 있는데, 과학이 남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왜 여성과학자는 이렇게 적은가'나 '과학 내용의 남성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많이 소개되어있다.

4. 『과학기술과 사회』는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약간 실망스러울 지는 모른다.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을 하기보다는 여러 측면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기만 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통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6장이 비교적 흥미롭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차분해서 아쉬울 수도 있다. 이미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 어느정도 제도화된 서구에서 과학기술학이 학계에서 점차 자리를 잡고 있는 것과 비례해서 과학기술학이 처음에 가졌던 사회비판적 성격이 거세되고 있다는 내부로부터의 지적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운동이 90년대 초반에는 이공계열학생의 사회진출운동만으로 이해되면서 학생운동 내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제기와 학습은 '이공계용'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과학기술사회학의 성과를 음미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과학기술자로서뿐 아니라 사회학자로서, 인류학자로서, 철학자로서 과학기술에 대한 나름의 접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공장앞에서 멈출 뿐 아니라, 과학기술 앞에서도 멈춘다. 만약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점점 더 우리의 삶에 침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강제로 느낀다면 이런 논의를 한번쯤 다루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울리히 벡, 『위험사회』, 새물결도 비슷하게 다룰 수 있다.)한편, 이 글에서는 각 장에 있던 참고문헌과 더불어 관련된 국내 문헌을 덧붙여 놓은 것과 국내에서 이론적 소개와 아울러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의 대표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김환석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소개논문을 싣은 것은 이 분야에 관심있는 초심자들을 위한 자상한 배려다. (1998.03.16.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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