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반성할 것인가?

특집: IMF와 한국경제의 위기

무엇을 반성할 것인가?

IMF시대, 한국경제의 위기를 보는 눈들

김현우 <카피레프트>회원


작년 11월의 구제금융 결정의 여파는 무엇보다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피고용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지만, 이 땅의 이른바 진보학계에도 날벼락이었음에 분명하다. 일이 지나고 난 뒤에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그 엄청난 충격의 몇 주 동안, 8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줄기차게 주창했던 논자들 대부분은 경제신문 중견기자만큼의 예측도 설명도 해낼 수 없었다. 대중문화의 찬양자들, 탈주와 욕망이론의 전파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비교적 성실했던 몇몇 연구자들은 차라리 고해성사에 가까운 탄식을 발했다.

이렇듯 왕년의 '주류'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실천진영 측에서 내놓은 몇 가지 견해들이 논의를 이끌고 있는 셈인데, 대표적인 것은 민노연(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 연구소)의 '제국주의 음모론', 채만수 선생(한노정연)의 '세계자본주의 대공황의 전조' 전망, 그리고 김성구, 김상조 교수로부터 민주노총, 경실련에 이르는 '천민자본주의/재벌경제 책임론' 정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들 견해들을 그 동안의 진보적 연구자들과 운동가들의 축적된 성과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논의의 정교성, 풍부성, 정치적 대안 등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은 것도 기실은 그 탓이다. 80년대 말의 휘황한, 그러나 유쾌하지 않은 사회성격논쟁의 기억은 교훈으로 남을 수 없는 잔영일 뿐일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대표되었던 당시의 논의들은, 그 내부의 적지 않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공통지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일반적(전반적) 위기'와 '종속'이라는 관념이었다. 돌이켜 보면 일반적 위기라는 것은 스탈린주의의 '진영테제' 승인을 전제한 것이었고, 종속은 대중의 궁핍화와 (신)식민지파시즘 정치체제가 역으로 규정하는 개념이었지만, 이들 개념은 설명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원칙 혹은 출발점이었다. 남한 자본주의는 항상적 위기의 '경향'을 띠게 되며, 남은 것은 파시즘이냐 혁명이냐 하는 정치적 결론이었다. 그것이 한국사회 설명의 핵심이라고 믿어졌고, 그 핵심이 개량과 혁명을 가르는 준거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위기'라고 규정되었던 한국 자본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논쟁이 풍미했던 87년부터 90년까지 사상 초유의 호황을 경험했고, 그리고는 일반적 위기를 불러왔던 진영의 한 축(현실 사회주의 체제)이 무너졌다. 중진자본주의의 전망과 소비문화의 물결 속에 '위기'의 과거는 잊혀져 갔다. 그런데 갑작스레 위기는 현재가 되었고, 위기의 이론들은 현재의 위기를 설명할 수 없게된 것이다.

이론이 실천보다 앞서기 어렵고, 현실운동의 퇴조가 학문적 진전 역시 어렵게 했다는 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사회성격논쟁은 한국사회의 구조와 동학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라는 문제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의식을 남겼다. 최소한 사회성격'논쟁의 성격', 그리고 남은 과제만이라도 제대로 정리되어 공유되고, 각론으로 심화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예컨대 시야를 세계체제 수준으로 확대시키는 문제(이수훈), 국가를 중심으로한 국내 축적구조의 특성을 규명하는 문제(박도영,안현효), 금융적 기술적 종속의 형태들을 밝히는 문제(이병천)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일부 그러한 작업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80년대에 가장 단호했던 논자들 대부분에게는 이는 청산 또는 변명의 대상일뿐이었다. 몇년 전 ≪사회평론≫이나 ≪이론≫에서 주최했던 사회성격논쟁 재출발 등의 기획은 그러한 씁쓸한 희극들이었다. 지난해 학단협과 민교협이 주최한 6월항쟁 10주년 기념 대토론회까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사회적 축적구조론과 만델의 장기파동론을 빌어 남한 자본주의의 축적구조를 밝히고자 했던 정성진 교수의 시도가 그나마 눈에 띄는 성실한 답변이었달까. 그러나 한국 경제의 축적구조가 붕괴했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었다. 부르조아 일간지가 호들갑을 떨기 전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는 이미 드물었던 것이다.

IMF 앞에서 남한 전체가 송두리째 무너지던 지난 연말에도, 먼저 응답을 제출하기 시작한 것은 실천진영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가 통신공간에 일주일 남짓한 간격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정세분석 문건이 이목을 끌었고, 그것이 해가 바뀔 무렵 『경제대공황과 IMF 신탁통치』라는 이름으로 한울에서 묶여 나왔다(민노연은 전노운협과 관계를 맺고있는 연구소이다). 11월 17일부터 여러 노동운동단체의 게시판들에 올려지기 시작한 이 시리즈는 "공황이 임박하고 있다"는 첫 글부터 시작되어 책이 나온 이후 최근까지도 수정, 보충과 보론이 이어졌으며, 그 방식 자체가 통신공간의 특성이 제공하는 유례없는 기동성과 실천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IMF 구제금융 결정을 전후로 아무도 자신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11월 중순경, 이들은 주가는 3백선까지 환율은 1700선까지 내리고 오를 것이라고 속시원하게 전망했으며, 얼마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들은 공황은 이제 시작일 뿐이며 실물공황으로, 나아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경제 신탁통치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준비해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노연의 분석이 가장 '튀는' 것이었고 책임의식부터가 높이 살만한 것이었지만, 그 분석의 정합성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선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공황의 특수성을 전제하지만 그 이론적 지반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고전적인 (그리고 추상적인) 일반론이다. 물론 세계화의 진전을 통한 특히 금융부문의 팽창과 불안정성의 증대, 동아시아의 군사적 정치적 특수성, 한국 재벌의 천민적 구조 등이 배경으로 언급되지만, 이들이 작년 말의 위기로 터져나오게된 과정의 분석에서는 매개를 통해 일관되게 엮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왜 그때 그런 방식으로 외환위기-신용공황이 도래하게 되었을까? 민노연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답은 그것이 '초국적 자본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종래의 천민적 축적방식 위에다 신자유주의를 수입, 접목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모순이 심화된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초국적 자본의 전략이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민노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는 전형적인 '음모론'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각은 연재가 진행되면서 점점 심화되어, 나중에는 아예 'IMF-미국-초국적 자본'으로 묶어서, 심지어는 그들의 첨병인 신용평가기관과 하위파트너쯤되는 남한 정권과 재벌들까지 전부 짜고 치는 고스톱(이후 연재된 보론에서 나온 표현)으로 서술된다.

물론 이들은 이미 종속이론이 3각동맹으로 분석했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이 세계체제에서 부르조아 각 수준과 부문의 이해주체인만큼--'모든 부르조아는 국가 부르조아'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부르조아이기도 하니까--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음모'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모두 일관된 한 전략의 배역들로서 일정한 시간의 플랜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깡드쉬, 소로스, 클린턴, 립튼(미 재무차관), 그린스펀(미 연방준비은행 의장), 심지어 코언(미 국방장관)이 하나같이 한국에 불리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들의 의도가 모두 일관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며칠치 신문만 훑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깡드쉬의 발언이 갈팡질팡하듯 느껴지는 것은 IMF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구성된 제도이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사고'들을 사후처리하는 기관이며, IMF 역시 돈을 떼먹히거나 자신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실패할까봐 노심초사한다는 사정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미국 행정부는 떡 본김에 제사지내려는 입장이지만, 과도한 내핍이나 초국적 금융자본들(글로벌 플레이어)의 광속(光速) 투기는 전 자본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자본이 스스로 축적의 장애물이 되고, 개별 자본의 합리성이 전체의 파국을 제어할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기본 동학은 민노연이 본 '음모'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이들이 얼마전 보론에서 "IMF-미국-초국적 자본이 밀리고 있다!"면서 이전의 논의와 상충되는 주장을 하는것 역시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노연의 대안이 일견 명확하면서도, 때로는 경제신탁통치 무효화로, 때로는 재협상, 재벌 완전해체, 김영삼정권 즉각퇴진 및 거국정부 수립 등으로 집중성을 잃고 있는 것도 많은 부분 이러한 음모론적 해석에 기인하고 있다. 당장 고스톱 판 전체를 둘러엎자는게 아니자면 반제투쟁도 맥락이 있어야 하며, 현재 그 맥락은 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잘못을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에 반대하는--그런 의미에서 반IMF, 반DJ, 반재벌--저항투쟁이자, 형편없이 어려워진 생활의 보전을 위해서라도 (노동기본권을 포함하는)시민적 권리와 복지장치 확대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혁명적 정세를 예견하는 강령적 요구의 제출일 터인데, 민노연은 실제로 "현시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낡은 천민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해서 외세의 경제침략에 맞서는 참다운 '국수(國粹)'를 보존,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된 자주적 민족경제론의 울림으로 들린다. 심대한 경제적 위기 국면일수록 근본대안의 담론이 필요하며 또한 유효하더라도, 그것은 적절한 시기, 적절한 준비와 방향을 함께 요구할 것이다. 민노연의 방법론을 '식민지 자본주의론'으로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학적 인식과 주체적 대응"에 대한 의도가 그들의 방법론으로 계속 침식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한편, IMF체제에 관한 최근의 토론회들은 하나같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몇몇 다른 분석들도 제출되었다. 예컨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채만수 부소장은 지금의 위기를 한국경제에서 찾는 것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의 위기로부터 도출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이나 '재벌해체'의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일부 산업부문(자동차,반도체)이 아닌 세계체제 차원(특히 유럽)의 특별한 과잉생산 경향이 근래에 존재했는가, 따라서 세계공황의 전조로 쉽게 전망할 수 있겠는가--그것은 아직 열린 가능성 정도로 보인다--는 의문이며, 작년 11월 위기는 결국 당시 한국 금융시장의 구체적인 사정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한편 '최후의 PD' 김성구 교수는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주최의 토론회에서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는 여전히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틀 안에서, 즉 신식민지종속적-독점적 축적구조라는 견지에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것이 위기 발생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 여타의 논자들과 다른 설명을 가져오는 것 같지는 않으며, '종속'과 '편입'(혹은 대외의존도)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80년대의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에서 주장되었던 위기와 현재의 위기가 과연 같은 성격의 것인지도 답변되지 않는다. 또한 "내수지향적이고 자립적인 분업연관을 갖는 축적구조로 전환"하자는 그의 대안은 민노연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의 논의에까지도 사회성격논쟁의 잔영, 또는 진보 이론진영의 '통념'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성격논쟁이 가졌던 보다 근본적인 문제역시 이른바 진보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자주적 발전모델의 망령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일국사회주의의 그림자이기도 했는데, '민족적 발전의 길'이라는 관념은 역설적이게도 신식국독자론자와 주체주의자, 심지어 박정희주의자까지도 공유했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양우진). 최근 『창작과 비평』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 역시 이러한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생산력과 인간의 해방이자 동시에 질곡이라는, 맑스가 일찍이 지적했던 자본주의 발전의 복합적 성격을 간과한채, 토지조사사업이 착취와 근대화 중 어느 것을 가져다 주었느냐 하는 민족정신 경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제와서 보다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것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남한 자본주의에 본격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더이상 일국적 발전모델이나 안정적 축적구조의 수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의 아무도 남한경제가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세계화'될 줄은 몰랐지만, 이를 계기로 외국자본에 대한 제도적 장벽이 모두 허물어졌고 세계 자본주의 요동의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사실상 몇배로 증폭하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모든 재벌이 당장 '민중적'으로 해체된다 하더라도, 앞으로 몇 년간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는 구제금융의 본격적 여파를 세계자본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대안을 막연한 세계체제이론이나 국제주의의 주장으로 대체하는 것은 공허하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초국적 자본의 전횡을 제어하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방어의 무기는 여전히 국민국가이다. 치아파스 반군의 마르코스가 말하듯, 국가가 실제로 유의미한 일을 처리하기에는 적절치 않고 억압의 껍데기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 사실이며, 한 개의 국가정부를 장악하는 것이 완결된 전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70여년 전부터 수도없이 증명된 바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국가가 '유연화', '경쟁력', 그리고 '지구화'의 정책을 택할 때 자본의 권력은 더욱 국가에 의지하게 되고, 자본과 국가의 공모는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예컨대 엘렌 우드는 이렇게 국가가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더욱 명징한 타겟이 되었고, 그러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통적 논리에 대한 국내의 투쟁이 새로운 국제주의의 강력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러한 투쟁들이 강력하게 조직되고 내용을 채워나간다면 우리는 유럽 좌파와 같은 지역적 대안을 의제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드는 새로운 국제주의의 모토를 이렇게 집약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그러나 단결은 집에서부터 시작된다(Unity begins at home)".

하지만 여전히, 진보적 학계에서조차도 발언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살 길을 제안하는데 집착한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는 이야기다. 관치금융을 청산해야하고 사회의 거품을 빼야하며, 심지어는 노동 유연성의 증가를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DJ정부의 정책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사회개혁 방향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기하는 것은 마땅히 요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안정적인 일국적 발전모델이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미국의 경제학자와 행정가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이 되고 있는 IMF라는 제도의 성격과 구제 프로그램의 적절성에 관한 의견이 부진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본에게 그리고 국민에게 "봐 이것이 너희들이 찬양하던 시장경제 자본주의잖아, 봐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 아냐? 자 이런 방향으로 나가선 안돼"라고 이야기하는 이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 무척이나 기본적인 결핍이 있다. 80년대말의 논자들이 한국 사회가 '종심독강'의 정언명령에 속박되어 있다고 역설하는 동안, 오히려 자본주의의 동학과 한국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수행하지 않았듯이, 90년대의 논자들이 우리가 대중문화에 잠겨있고 '근대성'에 갖혀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자본주의와 한국 사회라는 주인공은 부재했던 것이다. 문화논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시민사회 논쟁, 근대성 논쟁, 급기야 '프랑스철학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궤적은 계급과 자본주의의 실종이었고 심지어 한국사회의 실종이었다. 니코스 플란차스가 고국 그리이스의 군정 붕괴를 예상못했다고 해서 그의 이론틀이나 태도 자체가 비난받지는 않았다. 연구자들이 고해성사를 해야할 것은 위기를 예측못했거나, 한국경제의 회생책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가하는, 아주 초보적인 질문이 다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어느 학자보다 먼저 성실하고 세밀하게 한국전쟁을 연구했던 브루스 커밍스에게, 고마움과 부끄러움의 양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이후 우리 눈에 띄는 글은 한국의 어떤 연구자가 아니라 미셸 초수도프스키, 웰든 벨로우, 또는 크리스 하먼 같은 이들의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남한 사정에 정통해 있고, '종이 호랑이' NICs 발전모델의 '예상했던' 몰락을 얄밉도록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보다 거시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대안을 제안할 때, 우리는 이 시련만 넘기면 더 큰 '기적'이라도 있는 양 허우적거리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외국 저널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한국의 지식인이 한국의 위기와 운동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글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땅덩어리 안에서조차 그러한데, 아무려나. 정작 반성할 문제는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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