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옥(獄)에서

안동옥(獄)에서

강용주


『그날에서 책읽기』 2호에서 서신으로 만났던 안동옥의 강용주님께서 두번째 서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 이어, 역시 양심수로서의 ‘앙심지키기’에 대한 소박하고도 구체적인 신념들을 잘 녹여내고 있는 말씀들이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그 와중에서도 출판계와 진보진영에 대한 애정이 담긴 우려의 말씀과 『그날에서 책읽기』를 독려하는 말씀을 당부하고 있어, 책읽기 편집팀에게 큰 힘과 보람이 되었습니다. 관악인을 비릇하여, 더운 날씨의 더딘 하루하루와 싸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채찍과 희망이 되어 줄만한 소식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옥 천정에서 거미가 떨어뜨리는 배설물 자욱까지도 그대로 배어있는 소증한 서신을 띄워주신 강용주님께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김동운님께

보내주신 ‘그날에서 책읽기’는 고맙게 잘 보고 있습니다. 김동운님 바램대로 세상으로 열린 하나의 창(窓)노릇은 충분히 해주고 있네요. 신간소개・서평도 도움이 되지만 특집이나 기획의 내용도 때와 형편에 잘 어울리고 관련부문 자료목록이 유용하게 정리되어 있거든요. 돌아가면서 실리는 계간지 총색인을 보면서 제게 관심 있는 부문의 자료도 많이 챙길수 있었구요.

‘그날’이 독서와 학습 그리고 건강한 생활문화의 발신지로서 관악공동체에게만이 아니라 저같이 변방에서 유폐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까지 그 곁불을 쬐도록 해주므로앞으로도 계속 발간될 수 있었음 합니다. IMF상황에서 제법 이름 있고 의욕 넘치게 출발했던 잡지들도 연이어 쓰러지는 현실이라 그 바램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 자신할 순 없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자그마한 정성을 함께한다면 얼맏믄지 가능할테지요. ‘그날’이 지속적으로 발간되어야 안동옥(獄)에서 세상으로 열린 창 하나를 여닫을 수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김동운님께 제안 한가지 하고자 합니다.

제게 통신판매 햊루 순 없겠나요? 시간적들을 대부분 교도소에서 신청하여 사보는 중이니까 이왕 사본다면 ‘그날’에서 구입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MAO가 ‘조사없이 발언없다’고 했듯 ‘그날’에 참여하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책읽기’를 받아보는 것도 좀 떳떳할 듯 합니다. ‘그날’에 얼마간의 돈을 미리 보내놓고 그 범위 안에서 제가 신청하는 책들을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일반우편이나 소포로 말이죠. 송료는 ‘그날’에서 부담하고 책값은 정찰제구요. 책 보내주실 때마다 잔금 얼마라고 알려주시면 책값 부도나기 전에 알아서 돈 보내드리도록 할께요. 어때요. 가능하겠어요?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 생각을 해봐야겠다구요? 그래요. 우린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것이 둑을 넘어 범람하지 않고 강줄기 따라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죠.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입니까. 낱낱의 이기가 서로 부딪히고 조정되어 결과적으로는 이타(利他)와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보고 싶은 책을 편하게 읽으려는 제 이기심이 ‘책읽기’를 살리고 도와주는 방향이 될 수 있는 방법을요. 김동운님도 경영마인드라는 이기심을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 이기심을 결과적으로 모두를 위한 positive한 방향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면 통신판매를 하십시오. 써놓고 나니까 이기적 인간의 합(合)이 선(善)과 발전을 이룬다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류(類)의 얘기를 해버렸네요.

중국의 웨이징성은 〈The courage to stand alone〉이라는 옥중 서한집에서 “너희들은 자기자신을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가 정확히 이해했으면 한다. 단순한 ‘자기희생’보다는 ‘자신을 위해 희생을 치르는’ 편이 좋다 즉, 그것은 인류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우리자신’의 모든 이익・신념・포부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때 ‘자기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위해 희생을 치르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반하는 것이다.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에고이즘(egoism)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기자신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지 않았다면 억압에 저항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고 자기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 썼더만요. 그래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타심보다 차라리 절제되고 솔직한 이기심이 나을지도 몰라요. 제 ‘양심지키기’도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키고 빛낸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권력의 폭력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쓰레기통 속에 처박혀버린 내 영혼을 추슬러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인간으로 되살아나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기적인 ‘양심지키기’였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나 grand이론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원한과 반항에서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지금은 감히 세상의 자유를 넓히고 만인의 자유를 다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사상이론이나 조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버리고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기심 바로 그것이 지금 이곳에 당신을 서 있도록 한 비결(秘訣)인 셈이죠. 이기적인 유전자가 진화의 비밀이라는 사람도 있으니까 姜某의 ‘양심지키기’는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생물의 본성에도 충실한 일이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걸까요?

얘기가 횡설수설 길어졌는데 저는 ‘책읽기’도 보고 읽고싶은 책도 편히 구하겠다는 이기심에서 출발하여 ‘그날’도 도와준다는 이타심도 드러내는 중이니까 김동운님도 이태산 잘따져서 통신판매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경쟁이 결국 이만큼의 생물진화를 가져와고 이기적인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선(善)을 이루고 사회를 결과적으로 발전시켰으니까 우리도 이기적인 존재가 된대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닐 겁니다. 안된다는 연락 안 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통신판매를 추진하렵니다. 아! 이런, 또 노골적인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이기심을 드러내고 말았네요.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적어도 저라는 사람은요.

좀 삐딱한 얘기를 쓸까요? 저더러 ‘우리시대 대표적 양심수’라고 하셨던데 그런 말씀을 들으면 마치 남의 옷을 빌려입은 듯 어색하고 그러더만요. ‘대표(代表)’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전체를 표시할만한 한 가지 사물 또는 한 부분”이라고 나와있지요. 저같이 결점투성이고 덜 떨어진 사람이 양심수들을 드러내는 전형이라니요! 역사적 시대의 모순과 특질 그리고 그 모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을 완전하고 선명하고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양심수만이 감히 대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밖에 있을 때엔 변변한 역할도 못해보고 갇혀있는 지금은 여전히 상처입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신음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저같은 사람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여선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적 양심수’ 姜某라고 불리는 현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요? 나무를 심어두면 미끈하고 잘생기게 쭉쭉 뻗은 나무들은 일찌감치 정원수나 가로수로 팔려나가고 좀 자라면 잘려서 가구가 되고 책상이 된다죠. 볼품없고 나무로서 경제성도 떨어지는 굽은 나무들만 안 팔리고 안뽑혀서 그냥 그 자리에 남아 선산을 지키게 되구요. 왜 미끈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이 선산을 지키면 안되죠? 저는 굽은 나무였기 때문에 선산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저에게 ‘대표적 양심수’라니요. 나무의 전형은 비비 삐뚤어지고 잘 자라지도 않으며 경제성도 없어야만 되나요? 순리적으로 미끈한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게 옳습니다. 선산을 지키고 있는 굽은 나무. 그 수식어가 굽은 나무에게는 자랑이 될지 몰라도 선산과 전체 나무에게는 부끄러움이고 아쉬움일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에게 ‘대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전 스스로를 굽은 나무밖에 못되는 주제인 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김구 선생님은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더만요. “나는 최초에 정부 문지기를 청원했으나 필경은 노동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위원으로,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모두 역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역임한 것은 문지기 자격이 진보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인재난・경제난이 극도에 달해, 명성이 쟁쟁하던 사람들이 몰락되고 고대광실이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도 흡사한 형편이라 하겠다.” 똑같은 얘기를 제 경우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지키기’를 시작했을 때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의 한 명에 불과했고,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였으며 대열의 중간쯤에 서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서 전 다만 제 삶의 오솔길을 걸어왔을 뿐인데 세월이 흔든 뒤에 문득 고개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앞장서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중심을 받쳐주는게 어울릴 사람이 중심에 서 있고, 전위(典衛)가 아니라 중위(中衛)나 후위(後衛)에서 함께 걸어가는 게 온당한 사람이 선두에 서 있게 되어 버렸습니다. ‘문지기’를 하면 적당할 사람에게 그것은 너무나 지나친 요구입니다. 여전히 간장을 담는 ‘종지그릇’만한 능력이나 크기밖에 안되는 사람더러 ‘대접물’을 담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거든요. 백범 선생이 말씀하셨듯 ‘고대광실이 거지의 소굴이 되고’ 호랑이가 없으니까 여우가 왕노릇하는 셈인데 이게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민족민주운동 내지 양심세력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드니까 참담한 위기의식이 안들 수 없네요. 우리 운동이 사람들에게 위력적인 희망이 되려면 저같은 사람이 ‘대표적 양심수’가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대푲거 양심수’라고 불리고 있으니 운동의 생명력은 쇠잔한 모양입니다. 역설적으로 전 ‘잠수함 속의 토끼’인가 봅니다. “인재난・경제난이 극도에 달해, 명성이 쟁쟁하던 사람들이 몰락해버려” 산소부족으로 죽어가는 운동의 상징 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맙시다. 무릇 ‘이성(理性)의 교지(狡智)(List der Vernunft)’라는 것도 있잖아요. 절대정신(이성)이 그 목적을 실현해 갈 때 각 개인들 각자의 주관적인 욕구・격정에서 행동하는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낸다잖습니까.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러도 필연성과 시대정신을 형상화시킨다는 점에서 이성과 해방의 면면함과 위대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거든요. 이성의 교지(狡智)가 저처럼 덜된 인간을 통하여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써서 시대정신을 드러내고 실현하겠다고 한다면 저는 기꺼이 그 도구가 될 작정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저처럼 부족하고 덜 된 사람을 그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왜곡되고 뒤틀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성이 우리나라에서 실현되는 방식이고 또 이성의 교지(狡智)가 작용하는 시대적 한계인 그 왜곡과 뒽르림은, 만약에 제가 아닌 그야말로 전형이 되는 대표적 양심수를 그 도구로 썼다면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안타까움. 그것은 간장 종지 그릇만한 스스로에 대한 안타까움이면서 또한 왜곡과 뒤틀림으로밖에 이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우리시대, 우리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이 왜곡과 뒤틀림을 제 허물로 꾸짖지만 않는다면 다시말해서 대표적 양심수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을 ‘대표적 양심수’로 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를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면 저는 기꺼이 시대정신에 복종하렵니다. 이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그 가시밭길을 기꺼이 꽃길처럼 즈려밟고 나아가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이 조금씩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간다’고 믿으며 ‘양심지키기’를 하렵니다. 이런! 결국은 ‘대표적 양심수’라는 표현을 인정하고 만 셈인가요? 영화 〈Devil's advocate〉에서 알 파치노가 기자로 변신하여 변호사 키아누 리브스에게 속삭이니까 결국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듯 말입니다. 두서없는 글은 이만 줄이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유정희님은 어찌 되셨나요? 5월말에 안동에 찾아와 준 성루대 사진 동아리(이름이 뭐더라?) 사람들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시간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해서 많이 미안했거든요.

1998년 6월 11일 안동에서 勇州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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