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문명의 전환과 생활스타일의 전환
특집 1: 환경운동의 이론과 실천
문명의 전환과 생활스타일의 전환
김도윤 | 연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인류가 수렵사회와 농업문명사회를 거치며 살아온 기나 긴 시간의 무게를 우리는 상고(詳考)할 필요가 있다. 푸르른 대기의 심연은 무궁하였고, 강이 되어 흐르는 은하수와 함초롬 부서지는 별들은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류의 기나 긴 삶 속에 자연은 외경(畏敬)과 신비의 대상이었고, 그 변화와 이상의 조짐은 인류의 삶을 제약하는 힘으로 자리하기에 충분했었다.
한편, 인류는 오랜 시간 자연의 리듬을 따라 살아왔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비구름과 사시사철의 변화에 삶의 주기는 철저하게 맞추어져 있었고, 시침(時針)의 일정한 박자 속에 자신의 생활리듬을 가두어 놓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문명 ― 차단된 공간 안에서 노동시간을 감시하고 정확히 돈으로 환산해 주는 ― 이전의 농업문명에서도, 발달한 도시와 국가들, 치수와 관개 그리고 벌채와 화전의 여러 행위를 통해 이미 자연에 일련의 변형이 가해지고는 있었다. 부족장을 숭앙하는 거석상(巨石像)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돌들을 운반하려고 산림을 벌채하고, 그것이 곧 산림황폐화로 이어져 문명 자체가 사멸해버린 이스터섬의 예에서 보듯이 환경문제로 인한 재난과 곤란은 근대문명 이전에도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양에너지에서 화석에너지로 대체하기 시작한 지 불과 200여 년 동안 일어난 변화는 기나 긴 문명을 일소(一掃)하기에 충분한 거대한 전환이었고, 자연에 의한 인간의 통제를 역전(逆轉)한 인간에 의한 자연의 통제라는 측면에서 문제의 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계몽을 기치로 추구한 전통과 주술로부터의 해방과정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로 이어지고, 소원(疏遠)해진 자연은 단지 문명을 뒷받침하기 위한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한갓 상품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전락하였다. 땅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중세 농노들의 자유는 자본주의의 굴레로 씌우기 위한 은폐된 구속이었음을 해명하려 했던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보듯이 근대문명은 비단 자연의 착취 뿐만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인간 착취로 확장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자연문제에 관해 인간 자신은 권 력의 증가를 행사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陳外)의 대 가를 치룬다고 분석하고, 근대 계몽인은 자연을 단지 인 간이 '조작할 수 있는' 그리고 ‘만들 수 있는' 대상으로 만 파악하고 있음을 밝히며, 인간의 자연지배는 인간의 인간지배로까지 이어지는 계몽의 신화를 적시(摘示)한다.
이러한 근대의 사회구조는 역사적 체제이며 영원히 지속하는 체제가 아니다.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전근대 농경문화에서 자본주의문명으로 이행해왔듯이 현재의 산업문명은 또 다른 체제로 옮겨갈 수 있다. 그 이행의 촉매제로 생태문제가 작용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왜 냐하면 인류의 기나 긴 역사 가운데 지극히 일순간에 이루어진 인간의 자연파괴는 이미 한도를 넘어 인류 전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구를 수 천 번 터뜨리고도 남을 원자폭탄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체르노빌과 스리마일의 핵발전소 폭발, 그리고 방사성 폐기물매립 등에서 보듯 원자력과 더불어 위험의 요소는 항존한다 ― 을 싣고 우주선 지구호는 항해하고 있으며,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 자원과 식량의 고갈, 오존층파괴, 온난화, 생물종감소, 엘니뇨, 매연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인류에게 처음으로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를 알리고 경제적 성장이 지금과 똑같은 방식 으로 언제까지나나 지속될 수 만은 없을 것임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면서 밝힌 것은 로마클럽이었다. 그들은 점점 첨예해지는, 인류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들과 그 내적인 연관관계를 밝히기 위해 1972년 <성장의 한계(The LiJnits to Growth)> 라는 보고서를 출판함으로써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자원의 유한성과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 전지구적인 식량난의 증가 그리고 관성적인 경제 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세상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였다. 20년 뒤 그들이 <한계를 넘어(Beyond the Liinits)>에서 <성장의 한계>를 재검토하며 내리는 간략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많은 핵심 자원을 사용하고 많은 종류의 오염물질을 생성하는 인간의 행동은 이미 물리적으로 지속가능한 비율을 초과하였다. 물질과 에너지 흐름에 있어서 획기적인 감소 없이는, 인구일인당 식량생산과 에너지 사용, 산업생산에 있어서의 통제할 수 없는 파국이 다가 오는 세대들에서 예측된다.
- 파국은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물질 소비와 인구의 성장을 존속시키온 정책과 실천들에 대한 괄목할 만한 개혁이다. 둘째는 물질과 에너지가 사용되는 효율성에 있어서의 급속하고 극적인 증가이다.
한편 영국의 정치학자인 돕슨은 그의 책 <녹색정치사상>에서, 녹색정치 출현에 필수적인 요소 一 즉, (1)성장의 한계의 서술 (2)이런 서술에 대응한 정치사회적 방향의 근본적인 변화에 관한 처방 (3)폭넓은 청중에게 기꺼이 호소할 수 있는 능력 ― 는 1972년에 <성장의 한계>의 간행과 더불어 처음으로 함께 모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도 또한 이들 <한계>이 연구자들이 말하듯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은 한계에 대한 앎이라고 본다.
따라서 환경논의의 쟁점을 주도하고 있는 근본생태론과 사회생태론 혹은 생태사회주의나 생태마르크스주의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지금의 제도들이 지속할 수 없는 성장의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정치와 경제적 관행의 맥락에서 환경에 대한 관리적인 접근방법을 의도하는 환경주의를 거부한다. 이러한 개량적 환경주의자는 성장의 한계라는 논제에는 반드시 찬동하지 않으며 산업주의를 제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주의를 녹색정치학이 관여하는 분야로 오인하고 있으며, 이런 까닭에 녹색정치를 연구하는 사람은 개량주의를 식별하여 그 공적 이미지 ― 환경 오염의 주범들인 대기업들이 환경의 수호자인 양 광고 하고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은 가장 큰 위선이다 ― 에 흠집내기를 게을리할 수 없다.
지구환경문제에 있어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문제이며, 생태계의 일부인 인간은 다른 종들의 입장에서 모 든 자연파괴행위를 중단하고 완전히 생태계와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반(反)인간중심주의이며 생 태중심적 세계관인 근본생태론, 근본생태론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와 조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것이 당면한 지고(至高)의 과제이지만 다른 종들의 입장에서가 아닌, 인간 사회의 모든 위계에서 자연파괴의 근원을 찾고 인간사회를 위계없는 평등한 사회관계로 전환 ― 따라서 무정부지향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 하는 데서 생태계의 복원이 가능하 다고 보는 사회생태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잉여와 노동착취에 생태파괴의 원천이 있음을 밝히려는 좌파생태론자 들의 노력은 강력한 자기주장이 담긴 목소리들이다.
그러나 현실의 변혁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하여 우리가 몸담은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사실적인 판단을 뒤로하 고는 이들 녹색주의자들의 주장은 한낱 적실성 없는 공허한 목소리로 들려질 수 있다.
한편, 근대를 네 가지 제도적 차원 ―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국제적 군사체제 ― 으로 파악하는 기든 스는 현대세계에서 형식적이고 덜 도식적인 정치질서의 영역 모두에서 그가 생활의 정치(life politics)라고 부르는 것의 중요성이 중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의 정치적 핵심은 해방좌파의 정치적 핵심은 해방의 이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고, 해 방의 정치란 전통의 자의적인 신분로부터의 자유,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물질적 수탈의 압제로부터의 자 유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의 정치는 삶의 기회의 정치(politics of life-chances)이며, 따라서 행위의 자율 성을 강조하기 위하여서는 필수적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여전히 그것이 급진정치의 프로그램에 중심으로 남아있 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지구화하고 세계적이 되어가는 질서의 맥락에서, 전통과 자연의 변형 에 의해 결합되고 있다.
생활의 정치는 삶의 기회의 정치가 아니라 삶의 스타일의 정치(politics of life-style)이며, 정체성과 자아실현(self-actualization)의 정치이다. 그것은 우리(개인들과 집합적인 인간들인)가 자연 혹은 전통에 의해 고정되었던 것이 이제 인간의 결정에 종속되고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논쟁과 투쟁에 관심하는 것이 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나라들에서 고속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여러 배로 늘리려고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수억의 사람들이 부적절한 주거환경에 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머물곳이 전혀 없기도 하다. 선진국에 보낼 고기를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베어지고 있으며, 아프리카 등지의 제 3세계에서 그들이 먹을 식량대신 생산한 설탕과 향료는 초국적 자본을 경유하여 제 1세계로 흘러들고 있다. 아직도 희미한 전등 아래 낡은 냉장고 와 텔레비젼 셋트를 응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혹은 그것들 조차 가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매일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은 3만 5천명,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인구와는 철저히 스스로를 분리해오며 누려온 서구의 풍요와 생활 스타일은 결코 세계 표준의 것이 아니었다. 개도국의 모든 나라가 미국인과 같은 삶을 누리려면 지금 사용하는 에너지의 천 배 정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근대 자본주의의 혜택과 한계를 다같이 직면한 서구인들의 성찰과 생활 스타일의 전환에 지구촌 위기구제의 가장 큰 희망을 걸어야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우리는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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