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이야기 셋: 980707 실험에 관한 명상

깍지: 문화에 대한 좋은 생각들
노래이야기 셋

980707
실험에 관한 명상

김병오・국사89, 밴드 바람(BARAM) 활동


98년에서 96년에 걸쳐있던 겨울이었던 것 같다. 반포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내게 과외를 받던 중학교 3학년짜리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스페셜을 보았던 게 말이다. 그때가 맞는지 정확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 공부는 제껴두고 그걸 본 기억이 있다. 아마 그때 나온 노래가 <COME BACK HOME>, <필승>, <슬픈 아픔>…. 뭐 이런 것들이었던 듯하다.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 <하여가>, <발해를 찾아서>, <교실 이데아>를 거쳐 4집에 이르기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 가요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수많은 감성의 길을 개척해냈다. 한 유명한 평론가는 서태지에 대한 평론으로 스타평론가가 되기도 했으며 그가 만들어낸 서태지에 대한 찬양 카피인 “주류질서의 전복자”라는 표현은 대학가 총학생회 선거에 도용되기도 하였다. 몇해 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용필을 제치고 이미자에 뒤이어 불과 데뷔 몇해만에 가요계에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 모든 세대로부터 평가받고 있었다. (아마 지금 조사하면 이미자 마저 제치고 선두를 탈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그가 98년 07월 07일, 아이들은 똑 떼어놓고 <서태지>라는 이름으로 새 음반을 발표했다. 이는 가요계에 또 한번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스포츠신문에서는 가수마다 연일 100만장, 100만장 떠들어대지만 올해 50만에 도달한 음반은 <쿨> 정도 외엔 전혀 없다고 알려지고 있는 이 IMF상황에서도, 이미 도/소매상의 음반 주문이 100만장을 넘겼다고 하니 이 어찌 사건이 아닐 수 있을까. 어쨌든, 그에게 늘상 붙어 다니는 수식어는 꽤나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꼭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실험’이라는 덕목이다.

‘실험’이라는 가치가 있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세종대왕 같은 도전적인 인물들의 실험 덕분에 인류는 커다란 문명을 앞당겨 실현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새로운 근대문명이 지구를 단 하루라도 빨리 멸망하게 하는데 일등 공신이 되어가고 있지만) 한 사회가 답답한 상황을 해메이고 있을 때 기상천외하고 도발적인 실험정신들이 그 막힌 숨통을 틔어주곤 했다. 우리는 역사책, 윤리책 등을 통해서 그런 사례를 배웠다. 또한, 그런 책들에 등장하려면 아주 나쁜 인물들 아니면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생의 모범 케이스는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다.

진보운동진영이 드러내놓고 위기를 논한지도 벌써 7-8년을 넘어 두 자리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위기가 극복되었다는 느낌은 아무에게도 없다. 그래서 그 오랜 기간동안 혹시 숨통을 틔워줄 지도 모르는 ‘실험’이라는 가치가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으며, 아직도 그런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험적’인 실천을 선호하며 ‘실험적’이면 진보라는 기준에서 더 후한 점수를 부여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정말정말 ‘실험적’이지 못한 경우다. ‘실험’ 그 자체가 어떤 진보적 의미를 지니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구체적인 삶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왜 실험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런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고민 없이 그저 ‘실험적’인 것 혹은 ‘색다른 것’만을 부르짖으면서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서태지는 늘 색다른 음악을 선보였다. 매 음반마다 음악적 색깔이 급변했고, 더구나 나오는 음반마다 한국 가요계에서는 생소한 음악들이 가득했다. 그렇다. 한국 가요계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그 음악들은 대개가 이미 영미 팝계의 주류에서 당당한 팝으로 성장해 있는 음악들이었다. 이미 서구에서 검증된 훌륭한 음악을 나름대로 잘 다듬어서 한국으로 이식시켜낸 이가 바로 서태지이다. 그래서 서태지의 음악은 전혀 ‘실험이 아닌 음악’이기도 하다. 서태지의 음악은 그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국내로 범주를 좁혀서 살펴보면 대단한 실험일 수도 있는 것이고, 범주를 세계적 상황으로 가져가면 전혀 실험이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양면성 말이다. 그러면 범주를 국내로 좁혀서 다시.

서태지는 커다란 실험을 했다. 서태지는 국내에 코드(Code;the accepted manners)화 되어 있지 않은 의사 소통의 매체(manners) - 음악 - 를 코드화 시키는 데에 성공한 이다. 서태지 이전에는 전혀 국내에서 생산 및 향유되지 못하던 음악들이 서태지가 한 번 지나가면 그 자리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수많은 대중들이 그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같은 랩 음악이지만 장두석-이봉원(시꺼먼스), 그리고 홍서범은 실패하고 서태지는 성공했다. 서태지는 그저 색다른 음악을 만들어서 훌륭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사람들 내면에 무질서로 꿈틀거리던 어떤 감정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잘 느낄 수 없었던 미지의 감정의 영역, 감동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준 바로 그 역할이 있었기에 서태지가 훌륭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태지의 실험은 사회로 녹아들어가 대중들의 문화적 영역, 무형의 가치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행동이란 이야기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양지에서의 생활과 음지에서의 생활이 전혀 딴 판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고 거짓 없는 세상을 이루려는 꿈을 가진 진보진영의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진보진영에 10년 가까이 적잖이 흘러다녔던 실험MANIA들의 정체불명의 실험에 대한 칭송들. 남들의 시선 앞에서는 ‘실험실험’ 외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팝중의 팝인 ‘김광석’, ‘안치환’, ‘너바나’, ‘비틀즈’를 들으며 정서를 함양하는 많은 지식인들. 이 역시 빛과 어둠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우리네 인간들의 모습 중 하나이리라.

다분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팝에 대해 보내는 애정을 온몸으로 느낀 뒤에 ‘실험’의 가치를 다시 음미해 볼 수 있다면. ‘솔직함’과 더불어 ‘나눔’의 가치를 몸소 이해하고 실천한 뒤에 그 근본에서 ‘실험’의 가치를 다시 음미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때에야 비로소, 막힌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목적이 아름다운 실험들이 우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전율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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