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월평: 하…… 그림자가 없다

깍지: 문화에 대한 좋은 생각들
문학월평

하…… 그림자가 없다

류소영・국어교육 94


하나의 정치・사회적 ‘사건’이 문학의 장에서, 특히 소설 공간에서 육화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한다. 멀게는 6・25나 80년 광주로부터, 가깝게는 90년대의 여러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얼마 간의 고투의 시간을 거쳐 문학의 장으로 떠올랐다. 유순하의 <91학번>은 91년 5월 투쟁 이후 1년여의 시간이 훨 씬 지나서 등장했고, 90년의 골리앗 투쟁을 정면으로 다룬 김정환의 <그 후> 역시 그 얼마 후에야 태어날 수 있 었다. 조금은 격정적으로 '12・3 국치'로 표현하기도 하는 지난 연말 이후의 외환위기와 구제금융 사태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우리는 문학의 장에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야 했다. 그러므로 나는 기다렸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떠올라주기를, 우리 삶의 안팎을 헤집어 놓은 이 가공할 물질적, 정신적 공황 상태가 어떤 식으로든 문 학에서 다루어지기를 아프게 바래왔던 것이.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것은 기다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여기저기서 그것은 차라리 너무도 익숙하게 불거져 나왔다. <창작과비평> 100호 기념호인 지난 여름호는 중견작가로부터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소설가 열 명의 단편들을 싣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 경제 위기와 그로부터 야기된 삶의 스산한 풍경들이 마치 하나의 묵직한 전제처럼 소설 속에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점이 놀랍기도 했고, 또한 한없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다. 먹고사는 일은 눈물나게 팍팍하기만 하고, 희망은 보란 듯이 입을 다물고, 우리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폐허만을 가득 짐 지우고 산지 이미 오랜 것이다. 문학이, 시대와 그 시대를 구성하는 가장 낮은 목소리에 대한 촉수이자 성감대인 문학이 그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누구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이 땅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위기 상황을, 경제적으로는 80년대 후반 이후의 방만한 경제 운용 때문이 아닌 지난 세월 독점재벌 중심의 왜곡된 경제구조가 낳은 예정된 파국으로, 정신적으로는 우리 현대사를 통틀어 기대할 것 없는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가 온몸으로 체득한 냉소와 좌절의 한 극점으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문학이 그것을 잡아내고 덤덤하게 그렸던 것이다. ……나는 문득 이 땅에서의 생존에 대해 치를 떨었었다.

지난달에 나온 작품들을 보면 작가들의 고민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작가들은 크게 말해 두 가지 길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문학의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더 질문을 구체화하면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독자에게’에 방점을 두어 ‘이 절망하는 독자들에게 문학은 무엇일 수 있는가’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단의 중견작가들은 문학이 사람들을 위무하는 한 작은 목소리라고 판단한 듯하고, 그것은 재미있거나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외화되고 있다. 또 하나는, 자기의 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특히 민족이나 국가 개념에 근거한 문학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등장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게, 모든 국민들이 ‘애국심’에 목을 매기 시작한(때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왜곡된 형태로) 이같은 도저한 ‘국가적 국면’은 차라리 낯선 것일 수 있고, 그들은 이 상황을 방법적으로 괄호치기 한 채, 더 큰 상실감, 더 큰 위기, 막연하게 말하면 ‘문명 혹은 후기산업사회’라 할 만한 모호하고 덩치 큰 대상과 맞싸우고 있다. 전자의 흐름으로 내가 관심 있게 읽은 것이 윤영수의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창작과비평사)과 양귀자의 『모순』(살림)이고, 후자의 흐름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이 송경아의 『엘리베이터』(문학동네)와 배수아의 『 심야통신』(해냄)이다.

윤영수의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은 전래민담의 형식을 차용한 작품둘을 묶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효과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윤영수는 민담이라는 낯익은 서사물을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그대로의 환기는 아니다. 표제작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만 하더라도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자린고비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자린고비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 삶을 신선하게 환기시키는 상상력과 철학을 갖고 있음을 살핌으로써, 자린고비를 비웃는 대중적 정서를 뒤집고 있다. <하늘 여자>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패러디이며, <동아줄, 동아줄을!>은 ‘떡장수와 호랑이’ 이야기를 시점의 다양화를 통해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재해석을 위해 다채로운 형식적 장치들을 활용하고 있는데, 가령 가상의 법정 상황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증언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듯이 나열하기도 하며, 의사의 감정서 형식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윤영수가 노리는 것은, 현재의 삶에 대한 일정한 반성인 듯하다. 초기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데뷔작인 <생태관찰>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바, 삶에 대한 냉정하고 치밀한 관찰 울 보여주었던 작가는 <착한 사람 문성현>에 이르러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제 다시 가장 낮은 키로, 가장 작은 목소리로 살아온 우리 ‘할매’, ‘할배’의 삶과 생각이 구술된 형식인 ‘민담’ 에 귀를 열어놓은 셈이다. 다만 덧붙이고 싶은 점은 ‘여러 사람의 눈으로 여러 번 생각하는 것으로만이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작가의 재해석과 뒤집기가 너무 좁아 보인다는 점이고, 우리에겐 지금 민담 형식 밖으로 비어져나올, 외면하고만 싶게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역지사지’로만은 해결되지 않을 국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다채로운 민담 읽기는 고심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고, 재미있고 아름답게 읽혀지는 대목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은 삶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중 화자 ‘안진진’은 스물 다섯의 대학 휴학생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그럭저럭 생긴 얼굴,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는 태도’를 가진 여자다. 그녀는 시장에서 양말을 팔고 있는 어머니와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리고, 자주 집을 나가버리는 아버지, 싸움질을 일삼고 파출소를 들락거리는 남동생을 두고 있다. 양귀자가 이 인물을 통해 힘주어 역설하는 바는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이며,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들 행복하다고 여기는 그 누구도 사실은 그렇듯 행복하지 않고, 모두들 지독스레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실은 그렇듯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을 역설하 기 위해 선명한 대립항을 설정해 놓고 있다. 우선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그들 이 한쪽은 세상의 행복을 다 차지한 듯한 모습의 삶을, 다른 한쪽은 세상의 불행을 다 짊어진 듯한 모습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모부와 아버지의 상반된 모습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술꾼에 떠돌이인 아버지에 비해 이모부는 유능한 건축가로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발차하는’ 기차처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대립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진이 사귀는 두 명의 남자 중 한 명은 들꽃들을 필름에 담기 위해 열흘씩이나 산과 들을 헤매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인 사진작가였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인생 계획에 따라 빈틈없이 하나 하나의 과제를 처리해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그 대립항들 사이에 진진은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으면서, 한 번은 이모부 계열의 삶에, 또 한 번은 남동생 계열의 삶에 손을 들어준다. 가령 그녀는 남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촌을 보며 이렇게 독백하 는 것이다. “그녀는 모른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우리 둘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중요한 진리였고, 아버지는 내 인생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메시지는 평화롭고 행복하게만 보이는 이모가 돌연 자살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데서 보다 선명해진다. 이모는 무덤 속 같은 삶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내 어머니가 나는 부러웠다는 요지의 유서를 주인공 앞으로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것이 양귀자가 말하는 생의 ‘모순’인 셈이다.

양귀자가 말하는 모순을 한 번만 뒤집어보면 조금은 음험한 구석 이 있는 게 사실다. 가령 이런 것이다. 사는 게 힘들어져서, 다들 바쁘고 가난하게, 늘 싸우고 서로 괴롭히고 화내고, 앞날을 걱정하며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그렇게 살면 적어도 지리멸렬하지는 않다는 것, 불행하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렇듯 사는 것 도 꽤 괜찮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족하라’까지 읽어냈다면 조금 지나친 말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나는 개운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양귀자는 작가 후기에서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용기를 잃고 주저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모순>을 쓴 진정한 이유였다”고 썼지만, 그 ‘위로’라는 게 실은 얼마나 오해받기 쉽고, 또 사실 얼마나 위험한가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양귀자의 행보와 관련된 것이다. 『원미동 사람들』은 80년대 소설 가운데 힘든 모색 속에 놓인 작가가 낼 수 있는 건강하고 값진 목소리였고, <숨은 꽃>은 90년대 초반 우리 소설의 변화와 방황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문제작으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얼마 후 양귀자는 『천년의 사랑』을 썼다. 이 작품은, 현실 원리에 근거하지 않은 완전한 허구로서의 소설적 전통이 박약한 우리 소설사에 신선한 발상으로 다가온 작품이긴 했으나, 조금 무식하게 말해 ‘건너가 버린’ 작품이었다. 『모순』은 그런 작가가 아직은 ‘돌아오지’ 않았음을 씁쓸하게 증거하는 작품이다. 다만 그녀의 전언에서 조금 적극적인 의미를 끌어내자면 배불리 잘 먹고사는 것 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80년대 지식인 집단의 준엄한 메시지를 왜곡된 방향에서나마 다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송경아의 『엘리베이터』. 송경아의 이 소설집은 그녀의 이전 작품들을 접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만일 작가가 이로부터 변모된 소설세계를 전개해 나간다면, 『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 중 사례연구 부분인용』, 『책』, 『아기 찾기』와 이 소설집은 하나의 묶음으로 송경아의 초기 작품 경향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송경아는 소설이 개연성 있는 ‘허구’임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으며, 그 허구의 원리를 좀 더 밀어붙여 ‘개연성 있는’이라는 제한 항목을 떼어내고 환상과 만나게 한다. 그 환상은 낯선 맥락에서 현실에 불현듯 개입하며 현실의 질서를 홑트려 놓는다. <투명인간>에서처럼 비를 피해 뛰어가던 남자가 문득 벼락을 맞기도 하고, <우리 세계의 ‘아니’>에서처럼 창조신과 그의 딸을 만나기도 한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에서는 UFO의 보이지 않는 명령에 따라 아이들이 부모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화제가 전개된다. 또 <가까운 곳>에서는 어느 날 길을 걷던 화자가 신음소리 가득한 ‘이상한 집’을 만나기도 한다. 이는 조금 거칠게 파악하면, 많은 작품들에서 하나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게까지 만든다. 즉, 소설의 도입 부분, 물같이 고요하고 지극히 평범하게 느껴지는 일상을 제시한 후 문득 그것을 모조리 증발시키는 환상적 사건을 끌어들인다. 다시 말해 그는 도입에서 방법적으로, 오직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 현실을 일단 제시 하는 것이다. 그때 제시된 일상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익숙하고 생기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송경아가 이를 통해 노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파악된다. 우선은 위반 혹은 경계 넘기의 시도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현실세계의 경계를 타진해보고, 일견 완강해 보이는 현실이, 일상이, 필연성의 논리와 인과관계의 영역이 우연과 환상과 상상 속에 한꺼번에 무너져버릴 수 있고, 또 무너져야 하는 허약한 ‘성수대교'’ 불과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크게 말해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옛 서사무가인 바리대기 이야기의 패러디인 ‘바리 연작’은 멸망해 가는 현대문명을 헤집고 있으며,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 속에 탄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으로 수직 하강하고 있음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문명의 부패와 쇠진을 기성세대의 완강하고 정체된 의식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에서는 ‘부모 죽이기’를 보임으로써 답보 상태의 현대문명을 씻어 없애려는 일종의 ‘정화’를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틀로 그리고 있다.

그녀의 성취는 분명 있을 것이다. 송경아는 등단 이후 줄곧 현실과 환상을, 이미 있는 것과 생각지도 못한 것을, 아니 이미 있는 것의 생각지도 못한 방향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90년대 우리 사회의 삶의 방식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집에서는,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읽히지만 적잖은 변화로 인식되는 부분이 느껴진다 작품 해설에서 장은수도 지적하듯이 송경아는 상상의 출구를 마련하는 데 있어 ‘기억의 형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간 송경아 소설의 환상성이 특징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환상의 근거를 기억이나 경험에서 찾지 않고 순수한 상상력에서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비일상적인 경험과 잊혀지지 않는 의식의 균열 등으로부터 환상을 찾아 나서는 것은 여러 작가들이 그려내 보여준 바로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정황인 셈이다. 송경아의 작업이 ‘기억’을 헤집는 것이 아니라 가속도가 붙은 채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의 생생한 한 가운데에, 그 끔찍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부패의 현실에, 현실과 환상간의 보다 가열한 긴장으로 맞서길 바란다.

배수아의 『심야통신』은 ‘나쁜 꿈’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작품집이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랩소디 인 블루』, 『바람인형』, 『부주의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에 중독된 자의 글쓰기’, ‘세기말적 허무주의의 증좌’ 등으로 평가되면서 90년대 우리 소설의 일면을 분명히 쥐고 있는 작가로 인식되는 배수아의 이번 작품집은 지금까지의 작업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허무주의와 무의미성이 야기하는 낯선 몽환의 세계, 차를 몰고 밤거리를 질주하며 음악을 듣고 캔맥주를 마시는 지친 젊은이들의 이미지, 외국어가 한국어 사이에 불쑥불쑥 개입해 들어오는 이질적인 문장과 숱한 외국상표들(그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 반드시 한 명 이상은 맥주를 마실 때 꼭 ‘하이네켄’을 마신다)은 배수아의 소설을 특징짓는 일면들이다. 해설에서 백지연은 배수아에 대해 “후기산업사회의 일련의 징후를 보여주는 허무주의적 인간형과 기호와 이미지로 점철된 우리 세대의 문제적인 서사 형식을 탐색한다”고 쓰고 있다.

배수아의 이번 소설집을 관류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그 하나는 ‘꿈’이다. 이전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집에는 뚜렷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허무감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이 견고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벗어남’은 현실을 바꿔놓는 것이 아닌 현실과는 철저히 무관한 다소 그로테스크한 꿈과 환상이다. 오히려 그 꿈들은 현실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련’이다. <나의 첫 개>에서는 주인공이 유년시절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구애>에서는 아버지가 강요하는 매춘 생활을 하며 성장기 를 보낸다. <장화 속 다리에 대한 나쁜 꿈>의 여자아이는 허위적이고 형식적인 연애관계에 절망을 느끼고, <여점원 아니디아의 짧고 고독한 생애>에서는 사촌을 사랑하는 ‘아니디아’의 고독하고 비극적인 삶이 그려진다. 이는 가족을 포함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황폐한 내면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집을 읽은 후에 든 불만은 우선 ‘악몽’에 대한 것이었다. 배수아의 소설 속에서 ‘악몽’ 혹은 ‘나쁜 꿈’ 은 차라리 하나의 신선한 사건으로, 자극으로, 우리를 충격해 줄 ‘이벤트’로 기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즉, 밝고 맑은 환상이나 나쁜 꿈이나 견고한 일상을 꾸려 가는 우리들에게 문득 개입하는 하나의 ‘균열’이라는 점에 서 이들은 배수아의 소설에서는 등가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선악의 대립항을 뛰어넘을 만큼 폭력적일 정도로 끔찍한 일상에 대해, 일상과 비일상의 대립항을 설정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납득할 수 있으나, 지금껏 우리 모두를 짓눌러왔던 ‘나쁜 꿈’들(개인적인 국면과 사회적인 국면을 함께 포함한)이 다만 ‘비일상’의 이름으로 포용되는 기이한 형국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수아의 작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더 크고 대책 없는 생각이다. 흔히, 세기말적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평가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혹시 이것이 지금 세기말,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개별적인 얼굴 표정에 대한 치밀한 귀납적 탐색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세기말적 상상력으로 인식되는 어떤 익숙한 세계를 보여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막연하게 말한다면 왜, 무엇 때문에, 어떤, 방황인가, 어떤 환상이며 어떤 악몽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저 종로거리나 대학이나 신촌거리에 넘쳐나는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숨길 수 없는 피로와 불안과 고독과 공포가 서려있지만, 그들은 단순히 ‘견고하고 폭력적인 일상’ 혹은 ‘추악한 기억과 상처’라는 큰 틀로는 묶이기 힘든 너무도 많은 것에 맞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것에 다가서야 하고 그것을 문제삼아야 하겠다. 하지만 거기에 앞서 답답하고, 막막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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