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라는 명령
학부개인 1등
자유로워지라는 명령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사회평론, 2000년)
배문형
1. 들어가며 — 문제제기 :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가?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지’에 대해 친구들끼리 논쟁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었던 논쟁의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이런 식입니다.
A : 야ㅡ 너는 인간이 자유롭다고 생각해?
B : 무슨 소리야? 당연히 자유롭지.
A : 어떻게 자유롭다는 거야?
B : 지금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고, 자유롭게 말하고 있잖아.
A : 그런데,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게 정말일까? 사실은 자유롭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B : ······?
A : 이를테면 말이야, 내가 어떤 물건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 물건을 살 때, 그게 진짜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는 걸까? 그 물건을 사려는 욕망이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B : ······.
B는 A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B가 ‘인간은 자유롭다’는 자신의 생각을 버린 것 또한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지요.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에서 ‘인간이 자유로운지, 자유롭지 않은지’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잠깐, 아마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들 중에서 “인간이 자유로운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증명할 수도 없는데다가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인간이 자유로운지, 자유롭지 않은지’에 대한 문제는 무척이나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책임>과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을 때, 아무리 사슴이 불쌍하더라도 사자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일이고, 따라서 사자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책임도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간은 사자와는 달리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스피노자의 대답은 인간들도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종속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동물의 행위는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원인을 파악해내기 어렵고, 이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어쨌거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든 사자든 인과관계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스피노자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칩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이러저러한 가정환경 · 교우관계 · 교육제도 · 천성 등의 원인이 있어서라고 말합니다. 아마 히틀러 평전에는 히틀러가 어째서 희대의 악인이 되었는지 잘 분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을 따른다면 ‘인간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이러저러한 원인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범죄자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범죄는 이러저러한 원인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범죄자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릴 수 없다는 주장은 아마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화를 낼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째서 피고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지 밝힐 수 있어야합니다.
『윤리21』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정확히 말해서 가라타니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칸트의 주장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가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구해냈는지 설명하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고로 『윤리21』은 「책임이란 무엇인가」(1995년)라는 강연과 「책임과 주체」(1997년)라는 강연의 초고를 바탕으로 한 책이라고 합니다. 가라타니가 두 강연제목 중 하나를 따서 책이름을 정했다면, 책의 문제의식과 중심내용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자면 책이름 『윤리21』은 21세기가 윤리의 세기가 되어야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2. 자연과 자유 — 인간 존재의 이원성
제가 앞서 소개했던 논쟁의 내용을 칸트는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의 형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칸트는 아래의 이율배반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정명제 —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반대명제 —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반대명제가 앞서 소개했던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입니다. 그렇다면 칸트는 스피노자적 결정론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구해낼 수 있었을까요? 칸트의 답은 인간은 ‘자연법칙에 종속된 존재인 동시에 자연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촘촘한 인과관계의 그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모든 일은 앞서 일어났던 원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의 행위가 자연적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인간의 행위에 ‘다른 원인’이 있음을 보여야주어할 것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연적 원인 외의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이성>(정확히 말하면 순수 실천 이성)입니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이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이성은 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들도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를 떠올린다면 짐승이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인간과 짐승이 ‘질적’으로 구별되는 이유는 오직 도덕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실천이성은 인간에게 도덕법칙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인간이 이 명령을 따를 때,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명령, 즉 도덕법칙을 지키라는 명령은 가라타니의 표현대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입니다.
앞서 인간이 자연법칙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에게 도덕법칙에 따르는 행위를 하도록 명령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칸트가 의미하는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한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칸트가 의미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팔을 들어올리거나, 내 마음대로 식당에 가서 참치찌개가 아니라 부대찌개를 먹는 식의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도덕법칙을 따르려고 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도덕법칙은 법률이나 십계명과 같은 식의 법칙이 아닙니다. 공동체로부터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규범도 아닙니다. 도덕법칙에 따른다는 것은 자기정당화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입니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이원적 존재>입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자연의 존재(현상체)>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자연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을 받아들입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짐승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의 존재(예지체)>입니다. 인간은 도덕법칙을 따름으로써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 식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을 따름으로써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과 칸트는 도덕법칙이 어째서 인간에게 강제될 수 있는지, 인간이 어째서 도덕법칙을 따라야만 하는지, 인간이 어째서 짐승과는 달리 자유로워져야하는지에 대해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에 대해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칸트는 인간이 ‘자연법칙에 종속된 존재’인 동시에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는 명제가 모순 없이 양립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3. 괄호 넣기와 괄호 벗기기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인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악의에 찬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로 인해 사회에 어떤 혼란을 야기했다고 하자. 우선 이런 거짓말을 한 동기를 찾고, 다음으로 이 거짓말과 그 결과의 책임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 귀착되는지 판정해 보자. 첫 번째 점에 관해서는 그의 경험적 성격을 그 근원까지 밝혀내고, 그 근원을 그가 받은 나쁜 교육과 불량한 친구, 그의 염치없고 악독한 천성, 경솔함과 무분별함 등에서 찾아본다. 이 경우 우리는 그가 이러한 행위를 한 계기가 된 원인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항에 관한 절차는 주어진 자연적 결과에 대한 일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경우와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행위가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행위자를 비난한다. 더욱이 우리가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불행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에게 영향을 준 제반 사정이라든가, 또는 그의 이전 상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이 행위자의 이전의 품행이 어떠했든 그것은 무시해도 된다— 과거의 조건 계열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요컨대 우리는 행위자가 이러한 행위의 결과 계열을 스스로가 완전히 새롭게, 스스로 시작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자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이성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고, 이 경우 우리는 이성을 행위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이 행위의 원인은 위에서 말한 일체의 경험적 조건과 관련시키지 않고 그의 소행을 실제와는 달리 규정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인식적 판단, 윤리적 판단, 미적 판단 등을 동시에 합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범죄사건에 대해서 범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할 수도 있고, 범죄자가 한 행동이 옳은지 아닌지 고민해 볼 수도 있고, 범죄의 전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판단(이를테면 미적 판단)을 할 때에는 다른 관점에서의 판단(인식적 판단, 윤리적 판단)을 배제해야합니다. 만약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과 같은 범죄영화를 볼 때 윤리적 판단을 내리면서 영화를 본다면, 영화가 무척 재미없을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판단을 내릴 때 다른 관점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괄호 넣기>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범죄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미적 판단만 할 뿐, 인식적 판단 · 윤리적 판단을 괄호 안에 넣습니다.
윤리적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이 한 행위에는 모두 필연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윤리적 판단을 내릴 때, 원인 인식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괄호 넣기 뿐만 아니라 <괄호 벗기기> 또한 할 줄 알아야합니다.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저는 1학년일 때 스스로가 무척이나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도덕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덕적 비난을 할 때 그 친구들이 어떠한 환경에 쳐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이유는 당시에 제가 여러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기 때문인데, 제가 이런저런 집회를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라는 학벌지위를 이미 획득한 상태이며, 경제적으로 빈곤하지 않고, 부모님으로부터의 압력이 적다는 등의 환경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쉽게 비난을 했었던 그 친구들은 집회에 나갈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에 집회를 못 나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집회에 나가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라는 것이 전제되어있는데, 이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오만해졌습니다. 한 번은 저의 어떤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나만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응수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네요.
4. 책임의 구별
가라타니 고진은 야스퍼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책임을 형사적 책임 · 정치적 책임 · 윤리적 책임으로 구별합니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구별이 없다면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같은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전 후 일본의 수상은 ‘일억총참회’를 주창했는데, 이런 식이라면 천황이나 수상이나 일개 평범한 국민이나 전쟁에 대해 똑같은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윤리21』에서 다른 방식의 구별을 읽어냈습니다. 인식적 책임과 실천적 책임의 구별입니다. 가라타니가 쓴 것보다 진부한 구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해서 천황과 평범한 국민의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은폐하는 구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앞서서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문제가 ‘인간은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동시에 자연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인식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임을 생각해볼 때, 인식적 책임과 실천적 책임으로 구별하는 것이 책의 앞선 내용과 일관될 것 같습니다.
1) 인식적 책임
<인식적 책임>은 비전향 공산당원이 어떤 책임이 있는지 논하는 부분에서 주로 드러납니다. 제2차대전이 치러지는 동안 일본 공산당 지도부들은 끝까지 전쟁에 반대했었으며, 이로써 종전 후 도덕적 권위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가라타니는 인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을 분리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식적 판단을 해야 할 때는 윤리적 판단을 괄호 안에 넣어야합니다. 그럼 이제 공산당의 도덕적 권위는 괄호 안에 넣어버립시다. 그렇게 하면 공산당이 당시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실패했고, 어떻게 해야 파시즘을 막을 수 있을지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공산당 지도부들은 분명 파시즘이 도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파시즘을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파시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지했던 공산당 지도부들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가라타니는 자신이 ‘무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책임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할까요?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2) 실천적 책임
인간에게 <실천적 책임>이 있는 이유는 인간이 짐승과는 달리 자연의 인과성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다시 말해 도덕법칙을 따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도덕법칙은 인간,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뿐만 아니라 이성을 가진 존재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강제되는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전 세계인들이 모여서 어떤 도덕적 원칙들을 합의 했다고 가정합시다. 칸트는 도덕법칙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적용되어야한다고 말했는데, 인간 외의 이성적 존재자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칸트의 도덕법칙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하는 법칙입니다. 그러면 전 세계인이 합의한 원칙이 바로 도덕법칙이 아닐까요? 가라타니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결코 ‘합의’를 할 수 없는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은 자’와 ‘미래의 타자’입니다.
결국 도덕법칙에 따르는 것은 <자기정당화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원칙(준칙)에 따라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준칙이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따를 때 우리는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인 도덕법칙에 맞을지 아닐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봄으로써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정언명령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그리고 이 때 나의 준칙이 보편적 도덕법칙에 맞는지 아닌지를 보증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직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덕은 ‘자기정당화의 문제’입니다. 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 또한 나에게 도덕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덕은 오직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부여된 실천적 책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나에게 책임을 묻는다
가라타니 고진의『윤리21』을 읽는 내내 불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먼저 제가 대학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말씀드려야합니다.
저는 2학년 정도까지 이른바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맑스주의 책들을 선배들과 함께 읽었고, KTX 노조 집회라든지 학습지 노조 집회 등에 나름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수업을 빼먹는 한이 있더라도 중요한 집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했었지요. 이러저런 집회에 다닐 때에는 철저한 고립감이 밀려왔습니다. 집회에 같이 가는 학생들이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고립감을 느껴도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요. 주위 동기들이 토익이나 고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봐도 딱히 위기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정의’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식으로 다짐할 뿐이었죠. 어떤 선배가 저에게 “몸에 신나 붓고 나서 라이터 댕길 때 망설이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물었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 있다”고 답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멋쩍을 뿐이네요.
그런데 2학년 때 과반 학생회장이 되면서 점점 지쳐갔습니다. 이전까지는 선배들이 준비한 행사에 참가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학생회장이 되니까 제가 행사를 준비하고 사람을 모으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행사를 준비하고 아무리 열심히 사람을 모아도,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턱없이 적었습니다. 사회대에서는 08학번 신입생부터 제2전공의무화가 실시됩니다. 저는 제2전공의무화가 이루어지면 대학이 시장논리에 지금보다 더 심하게 종속될 것이며, 따라서 인문학과 같은 기초학문이 붕괴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회장에 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지 제2전공의무화만큼은 막아야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제2전공의무화에 대한 세미나 혹은 제2전공의무화에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모았을 때, 세미나와 집회에 참석한 사람의 수가 너무나도 적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일까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사람들을 불러 모아도, 결과는 항상 저의 노력을 배신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껏 제가 해왔던 이런저런 실천들에 대해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제2전공의무화에 대한 세미나, 집회 등을 준비하고 참가하는 것들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정치적으로 무관심해 진 것에 대한 책임을 “시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신자유주의가 심화되었다느니, 예전 대학생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대학생은 ‘88만원 세대’라는 식으로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예전에 해왔었던 실천적 활동들에서 점점 발을 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윤리21』은 이러한 저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묻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요. 제가 ‘그 놈의 시대 탓’을 대며 변명하려 해도 가차 없습니다. “네가 속한 20대가 88만원 세대라는 것도 알겠고, 지금이 신자유주의가 심화된 시기라는 것도 알겠다. 그걸 간과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나 88만원세대와 같은 구조적 원인들은 전부 괄호에 넣어봐라, 그러면 너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시대 탓만 할 게 아니라, 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해야 한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책으로부터 꾸짖음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6. 나가며
『윤리21』서평을 준비할 때, “『윤리21』은 나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묻는다. 나는 나에게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조금씩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낼까하다가 그러지 말기로 결심했습니다. 너무나도 진부한 결론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위적인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어서도 아닙니다. 저에게 주어진 책임을 지켜나갈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과거에 비해 자연적 경향성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배가 고플 때는 밥을 먹고, 피곤할 때는 쉬고, 졸릴 때는 잠을 자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무척 편안합니다.
반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존재인 동시에 자유의 존재라고 말했었습니다. 만약 자연의 존재로서의 차원과 자유의 존재로서의 차원이 충돌하게 되는 경우, 다시 말해 행복과 도덕적 의무가 충돌하게 되는 경우,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택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르는 삶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하고,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내릴 경우 그 행동을 실제로 해야 하는, 즉 어마어마하게 피곤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 받는 ‘자유’라는 형벌 때문에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참고문헌>
- 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윤리21』, 사회평론, 2000.
- ____________, __________,『트랜스크리틱』, 한길사, 2005.
- 강영안,『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 칸트의 도덕철학』, 소나무, 2000.
- 김상봉,『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1999.
- 랄프 루드비히, 박중목 옮김,『(쉽게 읽는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학사, 1999.
- ____________, 이충진 옮김,『(쉽게 읽는 칸트) 정언명령』, 이학사, 1999.
- 임마누엘 칸트, 이원봉 옮김,『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 2002.
- 최인숙,『칸트』, 살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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