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본선작-학부개인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Edward W. Said,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조성일


모든 저술가는 각자 나름의 해석상의 난점을 가지고 있다. 사이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이 책의 경우, 그 난점을 한층 더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우선 사이드가 이 책의 주제를 검토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예술가와 예술작품(가수, 배우, 연출가, 음악, 문학, 영화)의 예뜰이 자칫 너무 현학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난해하며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 각각의 예들을 다루어 나갈 때 도입되거나 동시에 거론되는 이론들, 대표적으로 들뢰즈, 가타리, 푸코, 아도르노, 그람시에 대한 이해 자체도 웬만한 독서 경력이 아니고서야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하나의 저작으로서 체계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미완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여러 단편적인 글들을 그의 생전 그를 존경하던 후학들이 유고집의 형태로 묶은 것이어서, 중심 주제를 다루는 어떤 일관적인 방식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의 독서를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사이드가 말하려는 ‘말년성’이 그리 쉽게 갠며화되지 않다는 것이다. 사이드가 저작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난 탓에 이 책은 말년성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논하기보다는 단지 여러 가지 말년성의 양상들이 단순히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그 의미를 새로이 한정하고 개방시키는 절차와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많은 난해한 작품, 작가, 이론, 이론가들의 예를 들 때, 사이드 자신이 그 작품들과 사람들을 접한 경로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상황, 사회적 문제들의 맥락에서 제공함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아울러 표시하기에, 사이드의 이 글은 현학적으로 흐르거나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이해되는 수준을 넘어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년성, 말년양식

사이드가 보기에 말년성의 양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셰익스피어나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들처럼, 매우 시의적이며, 말년에 ‘사고와 기법이 성숙해져 작품에서 연륜과 지혜를 만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한 성숙한 인간의 혜안, 세상의 어려움과 갈등을 극복한 화해와 평온함의 기운이 감돈다.’ 두 번째는 시의적이지 못하고 사회를 져버리는 듯 하는 부조화와 비타협의 양식이다. ‘예술적 말년성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면 어떨까? 바로 이러한 후자의 것이 사이드의 관심이다.’

사이드는 비시의성, 부조화, 비타협으로서의 말년성을 개념의 윤곽을 전달하기 위해 베토벤의 예와 아도르노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베토벤이 후기 소나타, 현악사중주, 교향곡 제9번, 장엄미사와 같은 작품들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못브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 그 이전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끈질기게 활용하는 당시의 시대 관습적 작법을 포기하고 여러 작은 단편들을 제시하는 방식을 사용 - 이는 ‘자신의 매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예술가가 이제까지 해온 기존의 사회 질서와 교감하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사회와 모순적이고 소외된 관계를 새롭게 맺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사이드가 말하는 사회란 음악의 재료와 관습을 형성하는 토대로서, 음악작품은 그 토대에 근거하여 그 의미를 형성해 간다. 즉 그 토대에 의존하여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주관성이 적절히 조정되어 의사소통 가능한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의 양식은 바로 이 토대를 벗어난 것, 혹은 거기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의사소통의 가능성 대신 주관성을, 시의적인 역사인식보다는 공간성을 추구하는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작가가 속한 사회라는 대전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작가가 자신의 주관성을 사회라는 토대의 제한을 던져버리고 드러내는 방식이 한 가지 형태일 수는 없지만, 그 결과들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관된 양식이 있으며 그것을 밝히려했던 것이 사이드의 완성되지 않은 의도였다. 비록 사이드의 죽음으로 인해 말년성의 양식을 객관적이고 일괄적으로 정의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유고에서 말년성의 태도상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 태도상의 공통점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부정성’이다. 즉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토대인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 삶의 토대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드는 이 부정성을 다른 말로 ‘망명의 형식’이라고 부른다. 원래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의 양식의 핵심적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 말년성은 살다보니 말년에 저절로 생기거나, 심지어는 한 평생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말년에 저절로 생기는 특성이 아니라, 사회 혹은 토대와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부정성의 관계로 설정한 예술가에게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렇게 사이드의 말년성을 이해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양상의 예술가의 삶,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말년성이라는 주제어 하에 하나로 묶이는지 알게 된다.

말년성의 예들

음악적 말년성의 예로써 베토벤의 예 이후에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예가 등장한다. 이것은 매우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음악사 일반의 지식에 의하면, 당시는 쇤베르크와 그의 악파의 12음 기법을 필두로 하는 조성 파괴의 시대였으며 슈트라우스가 사용하던 모차르트 풍의 조성음악어법 - 주지핟스이 모차르트는 18세기의 위인이다 - 은 보수적이며 퇴행적이라고까지 믿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기법적인 문제를 떠나 오페라 대본의 문학적 문제에 있어서도, 푸치니의 베리시모 오페라와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등의 초현실주의 오페라가 유행하던 당시에 슈트라우스의 말년 오페라는 마치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퇴보하는 양 주로 18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퇴행성을 사이드는 슈트라우스의 가진 말년성으로 파악한다. 사이드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특히 18세기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18세기란 유럽사회가 역사의 흐름에서 결정적인 총체성을 가지게 된 프랑스 혁명 이전의 시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슈트라우스는 의도적으로 18세기의 사회를 드러내어 당시의 총체적 음악사관에 대해 비판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이드는 일전에 ‘음악은 사회적이다’에서 음악의 가치를 사회와 맺는 한 가지 층위에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다각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사이드에 의하면 슈트라우스는 18세기로의 회귀를 선택함으로써, 사이드 자신과 같은 주장을 논설이 아닌 음악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말년성의 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이다. 음악적으로는, 이 작품의 창작 과정이 오랜 전통의 오페라 작법과는 달리 아리아부터 쓰여지지 않고 중창곡부터 쓰여졌으며, 그것이 단지 과정에 그치지 않고 중창곡 위주의 예외적인 오페라가 탄생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본의 문학적 내용으로는, 자기 배우자의 정절을 두고 친구와 내기를 하여 서로 변장을 하고 상대 배우자를 유혹하는, 당시 계몽주의적 사회윤리에 반하는 부도덕한 내용이라는 것과 결국 두 남녀가 원래의 짝으로 돌아와는지에 대해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두 남녀가 갑자기 계몽주의적 이성(reason)과 환희를 노래하는 해석하기 어려운 엉뚱한 결말을 지적한다. 사이드는 이를 통해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는 상반되는 ‘이중적’ 해석 가능성을 제시하는 말년성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논설하는 과정에서 아도르노가 ‘청취적 퇴행’이라고 불렀던 바의 음악과 드라마, 언어를 분리하여 듣는 습관과 그 결과 오페라를 일반적으로 멍청하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연결된 아리아 또는 곡조의 연속으로 보는 경향에 대해 반성적 청취를 집요하게 권한다.

다음으로 장 쥬네의 소설을 통하여 문학적 말년의 양식을 논한다. 주로 소외계급의 인물, 장례식장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문구를 화려하게 장식한 문체, 외설과 소란에 부여되는 형이상학적 의미, 이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내는 디오니소스풍의 대규묘 형식의 떠들썩한 축제를 말년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통하여 쥬네는 정체성의 해체를 시도하며 한층 더 나아가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세심하고 논리적으로 발가벗겼다고 말한다. 사이드는 이를 헨맄 입센의 ‘페르귄트’, 아르토, 페터 바이스, 에메 세제르의 연극과 비견하고 있으며, 20세기의 식민지적 상황에서 나온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작품이 쥬네의 ‘병풍’에서 나오는 원주민들의 형이상학적 반란을 지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비중 있게 다루는 음악적 말년성의 예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글렌 굴드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의 전성기에 모든 화려한 이력을 던져버리고 스스로의 말년성을 선취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말년성이란 개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글렌 굴드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살고 있던 토대로서의 사회적 통념을 던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렌 굴드는 좁게는 당대에 통용되던 연주곡목의 고나습을 벗어나 확대시켰으며 넓게는 연주자, 작곡가, 청자간의 위계질서, 비루투오소 연주자에 대한 선입견, 현대 콘서트 청중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주와 관련된 미학과 기대 자체에 도전했다. 그는 연주를 끊임없는 해석, 발견, 창안으로 여겼으며, 연주가 일회성의 사건으로 나타나 소비적 음향으로 전략하기 쉬운 콘서트를 거부했다. 콘서트를 거부한 그의 목적은 실은 연주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글렌 굴드는 연주를 통해 작품이 항상 적극적으로 작곡되는 중임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단순히 기능에만 능한 비르투오조가 아니라, 의식적인 작업을 통해 사회의 전체성에 저항하는 말년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그 이외에 제임스 조이스와, T.S. 엘리어트 같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시대를 떠나 신화와 서사시, 고대 종교 의식 같은 옛 형식들로 돌아간 점, 니체의 자기 시대 비판, 에우리피데스의 낡고 죽어가는 신화에 대한 심리적 해석과 그에 수반된 그리스 비극의 전통적 형식에 대한 파격, 잉마르 베리만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이 보여주는 신화와 현실의 교차, 벤쟈민 브리튼이 오페라 ‘베네치아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의 원작이 가지는 서사적 장치들을 고의적으로 파괴함으로써 화해할 수 없는 반대의 인물들을 고의적으로 충돌시켜 총체적 무의미를 만들어 내는 점들을 말년성의 예들로 간략히 제시한다.

말년성, 망명의 형식

사이드에게 있어 말년성이란 토대로서의 사회를 벗어남을 말한다. 자신의 영토에서 떠나 그 곳에서 살아감, 망명의 삶, 그것이 바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성이다. 사이드 자신이 중동의 학자로서 서양의 지적 중심사회에서 평생을 보냄으로써 ‘망명의 삶’을 살아온 말년적 학자이다. 더욱이 그는 유대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서 끊없이 자기 민족과 민족적 종교, 자신과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는 경계선 상에 살았다. 중동의 학자로서 자기 영토에 대한 성찰이 평생 자리 잡고 있었기에 서구인들의 바라보는 동양의 모습이, 사실은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을 투사한 허위의식임을 드러내고, 서구의 가치가 전 세계에 일괄적으로 침투하는 것을 경계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는 자신이 망명의 지식인임을 의식하고 그로써 오히려 더 넓은 역사적, 사회적 인식을 얻어내어 자신의 다른 저서 ‘저항의 인문학’에서 주장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오늘날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본질적으로 사이드가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땅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우리의 정체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또한 사이드의 논의는 단순히 정체성만을 회복하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 정체성의 회복 또한 전제성을 가질 위험이 있다는 쉽지 않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나는 외국음악으로써의 서양음악을 전공하여, 우리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과제를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사이드의 논설을 지적인 만족거리가 아닌 경고적 지침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자 하는 여러 도전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협력하여 하루 빨리 주체적이며 새로운 문화, 예술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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