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일반개인 3등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마셸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박혜진
‘이거 지어낸 얘기 맞아?’ 처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소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들과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 쉽고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글들에만 익숙하던 나에겐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이 솔직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야기는 대체 언제 진행되냐고 투덜거리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프루스트의 서술방식이 마음에 든다. 하긴 사람 마음이 어디 말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던가? 평소에 습관처럼 넘기던 생각이나 마음 상태까지도 프루스트는 집요하게 파헤쳐 절묘한 솜씨로 그려놓았다. 이런 프루스트식 문체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큰 매력 중 하나인 입체적인 인물들을 탄생시킨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첫 번째로 찾은 재미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책 속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3권-게르망트 쪽>부턴 주인공 ‘나’의 시선이 자기 성찰에서 바깥, 즉 주위 환경으로 옮겨 가는데, 덕분에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스왕, 오리아느 등 개성 있는 인물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내 관심을 가장 끈 인물인 샤를뤼스를 소개하고 싶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남작을 묘사하는 부분들이 인상 깊었다. ‘…눈을 내리감았는데 그런 데서 소설을 읽어내는 남작한테는 그것이 더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내가 이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일상에서 소설을 읽는 눈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리고 <4권-소돔과 고모라>에서 밝혀지는 샤를뤼스의 비밀! 친절하다가도 순식간에 노발대발 화를 내곤 하는 행동들을 나는 그저 괴팍한 성미 탓이겠거니 했는데 성도착자였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뒤를 이어 펼쳐지는 작가의 ‘소돔 족속’에 관한 서술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처음 출판됐을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아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선악의 진부한 대립이나 가치 평가 없이 진술하는 프루스트의 현대적 감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인물들의 성격 만큼이나 다양한 것은 이 소설 속의 주제이다. 프루스트는 그 세세한 관찰력으로 사랑, 기억, 시간 등 다양한 삶의 테마들을 조명한다. 2권에서 습관과 정열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참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나보다. 이런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반영됐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고장의 이름이나 열차 운행표 같은 것들은 별 감흥 없이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깨어’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바쁜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 속에서 정해진 시간표대로 몸을 맡기고 왔다갔다하는 생활이 아닌, 생각하며 사는 내가 되는 법 말이다. 아무 생각 없는 삶은 곧 아무 의미 없는 삶이 아닐까? 평범한 일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느낄 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작가가 마들렌의 향기를 맡고 냄새와 기억의 관계를 포착했듯, ‘나’가 엘스티르의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확신의 연출’을 알게되듯, 항상 깨어있는 사람은 항상 깨달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꼼꼼한 관찰은 그의 탁월한 묘사로 더 빛이 난다. 풍경들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나’의 발베크 체류 중의 바다 경치,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 빛이 들어오는 때의 장면은 마치 인상파 화폭을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알베르티느의 입을 빌려 쓴 아이스크림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다. 아이스크림 모양을 신전, 성당, 오벨리스크, 바위에 비유할 생각을 하다니! 아이스크림을 화강암으로, 축척된 산으로 묘사한 발상이야말로 레몬아이스크림처럼 새롭고 상쾌한 맛을 주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또 하나 놓치면 아까운 재미는 프랑스 구경이다.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프랑스의 살롱문화나 그 무렵 사회를 술렁이게 한 여러 사건들(드레퓌스 사건 등), 유행하던 예술 작품의 이야기들(작곡가로 나오는 뱅퇴이유는 드뷔시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고 한다.)이 곳곳에 녹아있다. 그래서인지 원래 프랑스에 별 관심 없었던 나도, 지금은 불어를 공부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궁금해져서 찾아본 프랑스 문학 작품도 많다. 발자크나 샤토브리앙의 책들은 물론이고, 라신의 비극 ‘페드르’ 역시 책 속의 배우 라 베르마(가상 인물)가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면 손이 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미학서요, 예술 평론서이다. 앞서 말한 발자크와 라신 말고도, 이 책 속에는 수많은 실제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들이 언급되어있다. 세비녜 부인의 서간집이 도처에서 인용되고, 문학 뿐 아니라 드뷔시, 렘브란트, 성당 건축 등 다양한 예술 분야와 예술가, 작품들에 대한 얘기가 담겨있다. 베르고트, 뱅퇴이유, 엘스티르 이 셋은 각각 문학, 음악, 미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취향과 정의가 반영된 인물들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프루스트는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견지도 밝히고 있다. 사실 <5권-갇힌 여인>에서 피아노를 앞에 두고 ‘나’가 생각한 것은 바로 내가 고민하던 것이었다. 회화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과연 예술이 삶에 무슨 값어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 적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먹고 살기 궁한 사람들에게 예술의 의미란 사치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을까. ‘나’의 말마따나 작품 속에서 얻는 것처럼 보이는 개성도 실은 눈호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나’의 고민은 뱅퇴이유의 칠중주곡을 들으며 풀린다. ‘단 하나의 참된 여행, 회춘의 샘으로 목욕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 풍경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눈을 갖는 것, 어느 남의 눈, 백이나 되는 남의 눈으로 우주를 보는 것, 그들 저마다 보는 백 가지의 세계, 그는 자신인 백 가지의 세계를 보는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의 엘스티르, 한 사람의 뱅퇴이유의 덕분에, 그와 같은 예술과들의 덕분으로 그게 가능하고, 정말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다닌다…’ 삶의 허무 속에서 예술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전부 공감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예술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책을 덮고 나서도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모렐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소설을 읽어내는 샤를뤼스나, 그림 속 여인들의 얼굴에서 오데트를 찾아내는 스왕 같은 사람들이 바로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닐까. 주인공 마르셀이 알베르티느의 잠든 모습 속에서 한 편의 시를 발견하듯이…….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소설이나 몇몇 가벼운 판타지 소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양도 많고 읽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느낀 것, 얻은 것도 많은 책이었다. 원래 장편에 약한 나이기 때문이라 그런 지도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읽은 만큼,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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