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의미를 생각하다
일반개인 2등
독서의 의미를 생각하다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법대 헌법학 박사과정 이황희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각성시키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겠는가- F. 카프카
내 머릿속 도서관
내 머릿속 도서관에서 나는 세상의 책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한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책과 도움이 되는 책.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후자의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 후자의 경우에도 다시 두 부류로 나눠 애정의 차이를 두는 편이다. 내 지식을 양적으로 증가시켜 주는 책은 그 중 하수(下手)인데, 기존의 지적 관점을 번복하지 않고도 읽을 수 있어 읽기가 쉽고, 또한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나에게 새로운 사유의 구조나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는 책들이 있다. 기존의 내 것들과 충돌하는 터에 그 독서의 과정이 지난하고, 때론 저자의 논리와 치열하고 힘든 싸움도 펼쳐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지적인 희열과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책들인데, 나는 이 부류의 책들을 읽으며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서 박수를 치기도 하며, 그로부터 얻은 통찰과 혜안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근사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책들이 내 머릿속 도서관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에게는 읽어도 읽어도 항상 갈증의 대상이 되는 책들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책을 저술한 저자에게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왠지 모를 친분감(!)까지 느끼곤 한다.
나에게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소외를 예리하게 비판했던 마르크스의 책이 그랬고, 흄의 혹독한 회의주의로부터 주체를 구원했던 칸트의 책이, 나아가 그 주체는 바로 타자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갈파했던 푸코의 책이 그랬고,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간다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에 이미 공동체의 본질과 통치의 문제에 대한 오늘날의 고민을 똑같이 행했던 희랍 철학자들의 책이 그랬다. 그 외에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만큼 많지만, 이 글을 통해 한 권 더 소개하자면, 바로 『선거는 민주적인가』(원제는 The Principles of Representative Government, 버나드 마넹,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2004, 이하 『선거』로 약칭한다)라는 책도 그랬다.
민주주의에 대한 변명
호이징가는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중세의 가을』)고 지적하였는데, 이에 반하여 기실 우리는 2000년전을 상상하면서도 오늘날의 관점에 입각하여 동일한 맥락하에 바라보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마치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과 같이 여긴다. 그리고 과거에 민주주의를 구가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억압적 군주나 권위주의 정부에 의한 탄압에 의해서라고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쟁취를 핏빛으로 물든 역사적 성과로 규정한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타당하며, 필자 역시 충분한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중시하는 것과 이를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우호적인 태도에 반하여, 과거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의 과잉을 염려했고, 따라서 지식인 그룹 사이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다는 점 역시 동시에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이해를 통해서만이 오늘날 통용되는 통치제도의 사상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책에 드러난 저자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선거는 혼합정체의 성격을 가진다.” 저자는 혼합정체에 대하여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는데, 아마도 독자들이 이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이다. 왜냐하면, 혼합정체라는 것은 서양 정치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개념인 까닭이다. 부연하자면, 여기서 혼합정체라 함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세 가지의 정체 개념, 즉 1인이 통치하는 군주정체(君主政體), 소수가 통치하는 귀족정체(貴族政體), 다수가 통치하는 민주정체(民主政體)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정체를 의미하는데, 앞서 설명한 민주주의의 과잉을 막기 위해서 고안된 제도이자, 동시에 군주정체나 귀족정체의 일방적인 독주 역시 제어하기 위한 체제라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바로 플라톤이다. 이 즈음되면, ‘역시 플라톤!’이라는 탄성이 나와도 좋을 것이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라는 화이트헤드의 언설(『과정과 실재』)은 결코 허언이라 치부할 수 없는데, 그의 결론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후대의 이론가들은 그의 뇌수(腦髓)를 사상적 자양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혼합정체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플라톤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국가』에서 철인(哲人)의 통치를 주장한 전체주의자요, 지독한 반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러한 인식에는 포퍼의 기여가 크다(『열린사회와 그 적들Ⅰ』). 그러나 사실 플라톤은 『국가』이후의 저작 『정치가』를 통하여 이상적 통치와 현실적 통지를 분리하여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아무리 타락한 민주정체라도 과두정체보다는 낫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말년의 노작인 『법률』을 통하여 군주정체 못지않게 민주정체도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통치의 운영원리라고 보며, 따라서 민주주의를 수용한 결과, 군주정체와 민주정체의 혼합정체야 말로 바로 이상적인 통치의 형태라고 제시하였다. 이는 국가학의 고전이라 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다수가 다스리는 통치의 올바른 형태로서 주장된 ‘폴리테이아(politeia)’가 바로 과두정체와 민주정체로 구성된 혼합정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국가』에 비견될 수 있을 『법률』의 사상적 무게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폴리비우스의 『역사』, 키케로의 『공화국』,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로 이어지는 이론적 계보 속에서 혼합정체이론은 근대에까지 전수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권력분립이론의 선구자로 알고 있는 몽테스키외는 이와 같은 혼합정체이론의 기초위에서 삼권분립이론을 전개하였다(『법의 정신』).
이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혼합정체이론의 역사적 전개는 주목할만 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통치의 이상(理想)으로 여겼던 공화정 로마는 바로 혼합정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군주정체를 대표하는 집정관(사실 2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비상시에 그들이 임명할 수 있는 독재관은 1인이다), 귀족정체를 대표하는 원로원(Senatus, 이 명칭은 중요한데, 근대에까지 계승된 혼합정체이론의 사상적 영향을 추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민주정체를 대표하는 민회(또는 호민관)의 균형이 바로 로마의 발전과 번영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이해되었다.
근대 영국의 헌정 역시 혼합정체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주는데, 전통적으로 존재하였던 왕(군주정체)이 있었고,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귀족정체)이 있었고, 민중의 대표로 구성된 하원(민주정체)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는 바로 이러한 영국의 제도를 부러워하였다. 또한 미국 혁명 당시에도 혼합정체이론은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창출하기 위한 기반으로 작동하였는데, 영국처럼 왕과 귀족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왕에 상응하는 대통령을 만들었고(군주정체), 귀족에 상응하는 상원을 고안하였다(귀족정체). 사실 귀족정체의 어원인 aristocracy는 the best를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 aristos로부터 유래한 말인데, 한마디로 귀족정체는 뛰어난 자들의 통치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군주정체와 귀족정체에 대응하는 대통령과 상원은 간접선거로 선출하였고, 민주정체에 대응하는 하원은 직접선거로 선출하였다.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것은, 선출된 사람들이 다시 선출하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에 좀 더 탁월한, 뛰어난 사람이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통령은 선거인단이라는 간접선거 방식으로 선출된다(물론 초기의 취지에서는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원의 경우 1913년에 이르러 수정헌법 제17조에 의해 비로소 직접선거로 변경되었다. 영어로 상원을 의미하는 senate이 로마 원로원(Senatus)으로부터 유래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법부가 제정한 민주적 법률에 대한 사법적 통제는 헌법재판소의 주된 임무인데, 세계헌법재판의 역사에서 독보적이라 할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스스로를 가리켜 원로원이라는 의미의 Senat으로 지칭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의 연장에서 접근한다면 이해하기 쉽다.
선거는 근대의 혼합정체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하나의 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혼합정체이론의 밑바탕이다. 즉,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사람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엘리트(elite)주의로 비난받기 좋은 관점이지만, 이 elite라는 말이 선거를 의미하는 elect라는 말과 동일한 라틴어 어원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시도는, 기실 일정부분 엘리트에 의한 정치를 전제하고 있는 터이다.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일반 민중이 주권을 행사하고, 민의를 실현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그 사회가 발전한다’와 같은 소박한 우리네 인식은 바로 선거의 비민주적인 측면, 즉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거』의 저자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선거가 민주주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귀족주의적인 측면도 가진다고 보며, 따라서 선거는 그 자체로 혼합정체적 성격을 지닌다고 규정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선거를 통한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통용되고 있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뼈아픈 과거를 종식하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선포한 현행 헌법과 이를 창출한 87년 항쟁에 민주적 의미가 가중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절, 선거는 민주주의의 운영방식이 아니라 귀족주의의 운영방식이었으며, 민주주의의 운영방식은 바로 추첨제도였다는 점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선거는 민주주의에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고, 가깝게는 근대의 매디슨(『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이나 칸트(『영구평화론』)도 선거를 통한 대의제를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공화주의적 제도로 파악했다.
『선거』의 저자는 선거제도가 어떻게 반민주적 성격을 벗어나 민주주의의 보루로 전환되었는지에 관하여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현재의 민주주의가 사실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며, 민주주의의 이상으로부터도 상당부분 떨어져 있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거가 끝나면 영국 국민은 다시 노예가 된다’는 파토스로 충만한 루소의 힐난과 달리, 『선거』의 저자는 로고스의 검(劍)을 통해 이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오늘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선거』의 저자 역시 부정할리 없다. 그러나 오늘날 모두가 의심없이 민주주의의 요체로 수용하고 있는 선거방식에 대하여 저자는 정말 이것이 민주적인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의심이 저자의 역사적 추적과 제도적 이해를 통해 타당한 의심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한다. 이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내 사유의 시야는 한층 더 확장되었다고 믿는다. 이에 나는 이 책을 내 머릿속 도서관의 눈에 잘 띄는 좋은 자리에 고이 꽂아 놓았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내 머릿속 도서관의 구성을 조금 공개한바 있다. 그 도서관의 명당자리는 새로운 사유의 구조나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는 책들로 구성된다는 것도 밝혔다. 그와 같은 책들을 통하여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대화하고, 깨닫고, 함께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과 대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는 그들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들의 사유를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를 살 수 있었고, 내가 가보지 못한 사회를 경험할 수 있었으며, 내가 밟아보지 못한 사유의 세계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었다.
몇 해 전, 정년으로 퇴임한 김윤식 교수는 자신의 방을 가득 채운 책들을 가리켜 ‘시체’로 명명하고, 자신은 그저 그 시체들에게 육신을 빌려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에 손사래를 쳤다. 노학자다운 겸양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김 교수가 육신을 빌려준 대상은 비록 시체에 불과하나, 그 시체들이 살았던 생의 시간적 합(合)은 인류역사의 시간과 거의 일치할 것이므로, 결국 그는 20세기의 일부만을 살았지만 인류역사 대부분 시간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를 통해 가능했던, 다양한 인물의 역할을 소화하면서 말이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永遠)속에서 찰나(刹那)와 같은 일순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국 독서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즉, 그 찰나와 같은 일순간을 연장시켜 좀 더 영원과 무한에 다가가려는게 아닐까. 어차피 우주에 견주어 보면 여전히 찰나에 불과할 터이나, 그 찰나의 연장을 통해 우리는 인류 역사의 기나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인물의 역할과 인격의 변주를 통해 수없이 많은 사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커피색깔 닮은 낙엽이 아직 오지 않은 초가을의 어느 문턱에서, 닿을 수 없는 우주의 광대한 역사를 떠올리며 호기롭게 독서의 의미를 강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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