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본선작-학부개인
절망의 끝에서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과 오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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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이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에서 우리의 입지가 개선될 것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들이 20세기에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데 대한 놀라움은 전혀 철학적인 놀라움이 아니다. 그 놀라움은 그 놀라움이 연원한 역사적 관념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의 출발점에 있다면 모르되, 어떤 다른 인식의 출발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테제 8)
절망은 역사의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자들의 절망을 누락시키고, 오로지 승리하여 진보한 자들의 희망만을 모아 짠 직물에서도 그 음울한 비린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승자가 나타난다는 서술은 끊임없이 패자들이 역사의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그 밑바닥에 야만을 품고 있으며, 재앙은 역사 속에서 보편적이다. 역사라는 영화 스크린 위로 희망의 장관이 펼쳐지고, 그것을 눈과 귀로 음미하고 있을 때, 관객의 감각들과 분리된 지옥은 현실을 야금야금 파먹는다. 문제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희망의 장관을 멈추지 않는 한, 이 비상사태는 지속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간은 역사의 연장이 아니라 구원으로 인한 역사의 종말이다. 구원은 이처럼 역사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사하게 떠오르는 과거들에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역사적 순간에는 전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여 전혀 새로운 해답을 얻을 기회가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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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찾고, 그것을 바꾸어내는 것을 돕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항상 억압받는 자들의 눈높이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억압하는 자들의 역사란 결국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승리를 만들어냈는가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명히 승자들이 연속해서 등장하는 역사 서술에도 불구하고 항상 패자들이 당하는 고통이 치유되지 않은 채 만연해왔다. “수출 천억 불”의 영광은 밀폐된 공간에서 기관지를 혹사당하며 일하던 여공들의 그림자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 말해지지 않은 사실을 밝히는 일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난곡의 골목길 구석에 배어 있는 그림자를 보기 위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쓰레기가 되어가는 비정규직의 삶과 경쟁에 말라가는 학생들의 삶을 온전히 서술하는 역사는 항상 공격당한다. 패배로 점철된 삶들을 끌어 모으는 힘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에 밀려 힘을 잃는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경제적 성공’ 신화가 당시를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쥐어짠 데에 기초해 있다는 설명은, 끊임없이 우파로부터 공격당한다. 낙관주의는 역사에서 패재의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내면서, 파국에 휘말릴 사람들을 희망의 영화관으로 초대한다. 벤야민은 파울 클레(Paul Klee)의 「양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라는 그림을 가지고 이 낙관을 설명한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은 인간을 재앙의 보편사(普遍史)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희망을 걸만한 곳이 아니라고 벤야민은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만연해지면서 거부할 수 없는 합리화의 철창 속 영웅적인 인간의 자유를 소망한 베버와는 달리,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한 결말을 맛본 아도르노의 절망과는 달리, 인류가 충분히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고 희망한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프롤레타리아의 합리성을 통해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래의 시간’을 꿈꾼 마르크스와 다소 다른 곳에 있다. 그의 희망은 바로 과거에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을, 오늘로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현재의 현상 속에서 과거와 유사한 요소를 확인하는 병치 작업에서 희망을 얻어야 한다. 바로 이 현재성, 그때그때의 시간적 제약 속에서 역사적 주체가 자기가 처한 시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벤야민이 말하는 구원의 방법이다. 노예, 흑인, 인디언이 묻혀 있는 언덕이 오늘날 버려지는 사람들의 고향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해방의 자손의 이상에서가 아니라 억압받은 선조의 이미지”에서 오늘날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태도가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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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은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이다.” 역사주의적 역사서술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들을 채워 넣는 데 모든 관심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역사는 그처럼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항상 ‘지금시간’들의 연속이다. 과거는 완결되지 않았고, 언제든 문제의식 위에 서 있는 역사적 주체들에게 불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불려온 과거들이 다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될 때, 그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다.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의 구성(Composition)이다. 흐름을 멈추고 바로 여기에서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포착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자각한 대중들의 힘이다. 예정된 미래를 향해가는 역사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좌표를 찾아 그것을 다시 거꾸로 역사에 도입하는 일, 슬라보예 지젝이 레닌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가 이 ‘역사적 유물론자’의 사명을 가장 확고하게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그 자리에 있지만, 1917년 이전과 이후, 1989년 이전과 이후 그곳에 흐르는 시간은 단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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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컨대 벤야민의 역사 서술은 역사적 유물론과 유대교적 메시아주의라는 수렴할 수 없는 양 극단을 수렴한 지점에 서 있다. 그 자체가 배려되지 않은 좌표인 셈이다. 그는 역사를 끝이 무한히 열려있는 직선으로 파악하는 역사주의적 낙관을 거부하고, 그 강력한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구원과 혁명을 등치시켰다. 동시에 그 구원은 역사의 바깥에서 오지만, 그렇다고 신이 구원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신이 구원의 주체라면, 그것은 칼 슈미트가 바라던 주권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히틀러가 아니라 자각하고 조직된 노동자 대중을 역사를 끝장내는 구원의 주체로 보았다. 마르크스의 새로운 시대는, 벤야민에게는 구원 이후의 시대다.
하지만 그가 비관 속에서 조심스럽게 내비친 구원의 희망은, 아도르노와 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절망으로 다시 바뀌었다. 여전히 재앙의 보편사는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도도한 흐름을 계속하고 있고, 억압받는 자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며 시간의 저편으로 계속해서 던져지고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적 황폐함이 20세기 내내 지속된 대중유토피아의 꿈을 무효한 것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바로 지금은 절망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국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인 시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꿈”(이현우,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을 꾸게 하는 ‘구원’의 모티브는, 여전히 유효하리도 모른다. 절망의 보편은 절망을 겪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분노하게 하는 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의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벤야민이 시도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현실을 해체하여 다시 구성해내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판적 재구성의 과정에서 기존의 집단적 정체성은 해체되고 새로운 역사적 주체의 정체성이 확보될 수밖에 없다. 그 새로운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주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려난 삶들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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