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고 싶은 개인과 사회가 부딪힐 때

학부개인 장려상

자유로워지고 싶은 개인과 사회가 부딪힐 때

나쓰메 소세키, 윤상인 역, 『그 후』

정치학과 전미영


부조리한 사회에서 숨 쉬는 지식인에 대한 표현으로 토끼와 잠수함의 비유가 있다. 토끼를 잠수함 속에 넣으면, 잠수함 속의 산소가 바닥나기 두 시간 전에 토끼가 산소 부족을 알려준다고 한다. 산소 측정 장치가 발명되기 전 과거의 일을 상상해보건대, 숨쉬기 고통스러워하는 토끼의 모습을 보고서 잠수함 속의 사람들이 ‘아... 물 위로 올라가야 할 때가 됐구나’ 하고 알아차렸는가 보다. 가장 먼저 잠수함 속의 위기를 감지하는 토끼와 마찬가지로, 참된 예술가는 전위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과 문학이 사회모순을 포착해낸 다음에야 사회과학자가 이론을 만들고 사회적으로 위기가 거론된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그래서 아마 살기가 괴로울지도 모른다. 사회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가장 먼저 괴로워하고 답답해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도 이런 사람이다. 약간은 사회 부적응자이기도 하고, 마음 속 내밀한 구석에 반사회적 심리를 지닌 사람이기도 하고,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탐미주의자인 동시에 세상과 자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고, 근대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함께 나타나는 무기력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의 삶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다이스케가 전하는 이야기는 자유의 날개가 반쯤 접힌 우리 시대 사람들의 슬픈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사회와 자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사회 이슈를 다룬 사회과학서적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문학을 통해서 더 깊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다이스케는 책 읽고 난초 가꾸고 낙엽 쓸고 마당에 물 뿌리고 목욕 하고 미술품을 감상하는 고상한 취미생활을 하며 속 편하게 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다이스케에게 성실성과 열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꾸지람을 한다. 아무 일도 생산적으로 하고 있지 않고 돈도 벌지 않고 장가갈 생각도 안 하는 아들이 답답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계발을 하지도 않고 경제적 독립을 계획하지도 않는 다이스케와 달리, 다이스케의 형인 세이고는 사업을 하여 돈을 벌고 늘 동생에게 생활비를 대준다. 덕분에 다이스케는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를 누린다. 그런데 다이스케가 일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무능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일다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페달을 밟으며 양적 팽창을 하던 일본 사회에서, 생각할 짬 없이 생존을 경쟁하며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지는 삶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

다이스케에겐 속물적인 친구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은 다이스케가 부잣집 아들이라 현장에서 일할 필요도 없이 태평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친구녀석의 생각대로, 다이스케의 순진함은 가족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경제적 생업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여유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다이스케는 지식과 예술을 풍부하게 흡수하고, 보다 여유롭고 균형잡힌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이스케의 눈에 형 세이고는 항상 바쁘다. 세이고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 때문에 바빴다. 불평 한 마디 없이 불규칙하게 술을 마시거나 식사하고 여자를 상대하면서도 피곤한 내색 없는 세이고를 보며, 다이스케는 탄복한다. 세이고의 모습은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버려서 마치 해파리가 바다에 떠다니면서도 소금물이 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가함이 무능함의 지표가 된 요즘, 바쁨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이자 현재에 대한 안심책이자 강박일 것이기 때문에, 소설의 이 대목은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다이스케는 친구의 아내인 미츠요를 사랑한다. 사실, 그 친구와 미츠요를 짝지어준 사람은 다이스케 자신이었다. 왜 다이스케는 3년 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에게 양보했을까?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도의심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지켜야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경제적으로 몰락한 미츠요 부부가 다이스케에게 종종 돈을 부탁해오자, 다이스케는 미츠요의 모습에 동정심이 들어 돈을 준비하려고 애를 쓴다. 그 감정에는 사랑도 들어있었다. 미츠요를 사랑하는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후 사랑의 감정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미츠요가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에 부부간의 정도 식고 사이가 소원해진 터라, 이번 기회에 다이스케는 미츠요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친구의 부인과 결혼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다이스케는 친구와 절교하게 될 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은 이 일로 다이스케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서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끊는다.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을 택함으로써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의 뜻을 억눌러야만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다이스케는 결단을 내렸고 그로 인해 그의 앞에는 사회적 매장과 경제적 궁핍 등의 고난이 놓이게 되었다. 이후 그의 사랑은 어떻게 되어갈지, 그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소설 속 결말은 없다. 다이스케의 혼란한 내면 심리 묘사로 마무리 지어지며 소설은 열린 결말을 향한다.

이 소설은 삼각관계를 중대하게 다루었지만 그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머리로 한 이성적 판단, 도의심, 배려, 양보만으로도 삶을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과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시간적 여유를 가진 적은 얼마나 되는가? 다이스케는 가족의 경제적 지원 덕분에 임금노동에 뛰어들지 않고도 한가하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산책하고 사색하고 글쓰고 차분하게 미적 경험을 향유하며 느리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다이스케에게 허락된 자유는 다이스케가 가족과 사회의 가치 기준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제한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깊고 풍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개인과 그러한 삶을 제약하는 팍팍한 사회적 현실 간의 긴장으로 읽을 수 있다.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언제나 불안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아예 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다음번으로 유예하고 당장 사회로부터 나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에 바쁘지는 않은가? 각박한 현실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이 되기 전에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아야겠다.

다이스케는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고 교양도 풍부한 지식인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파시키지도 않았고 정치적 행동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외곬으로 용기를 내지도 않았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음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다이스케처럼 각성된 개인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상한 시대에는 각성된 존재가 되기도,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기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각성된 개개인들이 모여 개개인의 나약함을 벗어던질 그 날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