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신화, 자연의 신화
본선작-일반개인
소비의 신화, 자연의 신화
장 보드리야르 저, 이상률 역,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생태조경학과 석사과정 박근현
들어가며..
이 책은 그 제목 ‘소비의 사회’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대중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영역의 사물에 한정시킨 사물-기호론을, 사회의 전 영역에 확장시키면서, 그 대상을 상품, 여가, 대중매체, 섹스 등 광범위하게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현대사회학의 명저로 손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소비의 신화’를 파헤치면서도,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의 거리두기에 치중하다보니 논의를 다소 억지스럽게 일반화시키는 면이 있다. 또한 마르크스 유물론에 대한 그의 ‘기호론’도 허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자연의 신화’를 소비의 신화의 일부로 본 점은 오늘날 도시계획, 조경 분야에 매우 의미있는 지적이라고 여겨진다. 본 서평에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부분에서는 ‘소비의 신화’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고, 뒷부분에서는 ‘자연의 신화’에 대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책은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 ‘사물의 형식적 의례’와 2부 ‘소비의 이론’에서는 소비의 신화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하며, 3부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에서는 1960년대 이후 프랑스의 일상생활을 경험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이론적 틀에 있어서 그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의 이론들을 선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소비를 ‘사회적 차이화의 논리’를 이루는 일종의 사회적 활동이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율적인 활동이 아니라 욕구의 체계를 발생시키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질서의 지배를 받는다. 대중매체, 특히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象), 자신이 만든 세계의 지배를 받는다. 악마와 계약한 ‘프라하의 학생’이 오히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象)에 쫓기고 결국 자살에 이르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은 소비의 신화에 자신을 팔아 넘겼고 결국 그것이 극복이 불가능한 소외(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를 낳는다는 것이다.
소비의 신화
오늘날을 사는 사람은 모두 ‘프라하의 학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상(象)의 지배를 받는 주객전도된 삶을 살아야만 하며, 우리의 끝은 죽음뿐일까. 보드리야르의 입장은 다소 수동적이어 보인다. 소비의 신화에 대한 그의 설명은 매우 탁월하지만, 그 불가항력적인 측면만 고찰하여, 우리를 ‘뛰어 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결국 결론에서 그는, 이 악마와의 계약의 끝으로 프랑스 68혁명과 같이 ‘난폭한 폭발과 갑작스런 붕괴의 가능성’만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서 다소 억지스러운 일반화로 나아간다. 소비자의 개인주의적 성향, 그리고 몰연대성과 몰역사성에 대한 서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이 자동차등록세에 반대하여 동맹을 결성’한다든지,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사태를 상상하지 못하였다. 이 책이 쓰인 1970년대 초의 상황에서는 특히 상상하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오늘날, 소비자들은 ‘소비자협회’등을 조직하여 매우 활발하게 연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들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가 차원에서의 제어를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의 국내 광우병 사태에서 이러한 요구의 한 양상을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시장의 대변자로서 국민들을 ‘소비자’로 보고, ‘안 사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 소비자들은 ‘서로 무관심한 군중’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우리들은) 연대하였고 ‘미국산 쇠고기 고시 철회, 협상 무효’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물론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여전히 팽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점점 커져가는 촛불 시위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자 앙리 르페브르의 제자이다.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보드리야르의 접근방식은 상당히 달랐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적 방법을 응용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사물을 ‘물리적 실체’로 보지 않고 ‘기호’로 파악하고, 또 이 기호의 체계로 현대사회를 설명한 것이다. 이후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이 책에서도 결별을 위한 의도적인 노력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의도적인 비판이 앞서 살펴 본 수동적인 태도와 억지스러운 일반화를 낳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보드리야르는 생리학자들이 말하는 ‘자기보존의 본능’이 아닌, ‘힘을 위한 투쟁’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자기보존의 본능은 다시 말하면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오늘날 생존을 위한 투쟁보다 더 많이, 더 빨리 갖기 위한 투쟁이 많아 진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생존을 위한 투쟁보다 더 ‘본능적’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생존을 위한 투쟁, 즉 인간 삶의 가장 기본인 의식주를 위한 투쟁이 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고 말한다. 1789년, 프랑스 민중들의 “빵을 달라”는 생존권 요구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 것을 보라. 보드리야르가 말한 프랑스 68혁명도 마찬가지이다. 취업의 위협, 극도로 열악한 교육여건 등을 들고 일어난 학생들이 도화선이 되고,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해있는 1천2백여만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한 사건이 아니던가. 이것을 단지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보드리야르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욕구는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한 욕구가 한계가 없다는 말로, ‘힘을 위한 투쟁’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물론, 인간이 타자에 대해 상대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세를 위한 욕구가 무한하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자유주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이용될 위험이 있다. 종종 인간의 ‘무한한 욕망’ 혹은 ‘이기적인 본성’은 자본주의와 시장주의 논리를 뒷받침하며, 다른 체제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용가치’로서 인간의 욕구는 분명이 유한하다. 그것이 ‘화폐’라는 상징적인 교환가치로 바뀌었을 때 그 욕구가 무한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욕구가 한계가 없다”고 말한 보드리야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이론에 대한 비판이다. 보드리야르는 사물이 단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로서의 ‘상징가치’를 지닌다고 말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후 ‘시뮬라시옹’으로 발전된 그의 이론은 점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고 급기야 냉소주의에 빠지게 되며, ‘형이상학적 상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책뿐만 아니라 많은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밝혔듯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의 오류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자연의 신화, 환경의 ‘자연화(naturalisation)’
앞에서는 보드리야르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였다면, 여기서부터는 그가 말하는 ‘자연화’와 ‘르시클라주’, 그리고 ‘팝 아트’를 살펴보고 ‘공간계획 ․ 설계’ 그리고 ‘조경’의 역할과 의미를 비추어 보고자 한다. 환경의 ‘자연화’. 이 말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보드리야르는 자연화를 ‘자연을 해체한 후에 기호로서 현실 속에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은 일종의 ‘메이크업’이다. 자연을 파괴해놓고는 적절히 통제된 자연(공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연을 ‘대신한다’고 하는 것이다. ‘황야(wilderness)’로서의 자연은 사라지고, 식생의 천이과정도, 먹이사슬도, 생태계도 사라졌다. 오로지 ‘자연’이라는 ‘기호’만이 남아 있을 분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문화와 상징적 대립관계에 있는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자연은 유통과정에서 재투입된 자연의 기호가 소비된 모습, 즉 르시클라주(recyclage, 재교육)된 자연이다. 택지조성이건 경관의 보전이건, 환경정비건 핵심은 본래의 모습이 포기된 자연을 ‘재개발’(르시클라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르시클라주의 체계 속에서 자연 역시 유행과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분위기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은 상품이자 예술이다. 오늘날 자연은 하나의 대중문화, 하나의 유행이 된다.
보드리야르는 팝 아트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자연’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팝의 이데올로기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단순한 나열인 동시에 주변 세계의 무의식을 재발견하려는 선 및 불교의 몽롱한 신비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는 팝 아트가 사회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는 점이다. 팝 아트는 현재의 사회가 ‘자연’스러운 사회이고, 이상사회라는 도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전 예술이 사회와의 괴리를 통해 가질 수 있었던, 사회 비판적 태도는 팝 아트에서 사라진다. 조경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산업혁명이후 급속도로 피폐해진 도시는 ‘공원’의 등장과 함께 활로를 찾기 시작한다. 오늘날에는, 적절한 공원과 가로수길, 그리고 호수 등이 결합된 신도시가 이상도시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조경의 역할은 팝아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장 대중적인 예술 재료인 자연물을 다루는 조경을 팝아트라고 부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마치며..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왜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로움 속에서도 결핍감을 느끼며, 끊임없는 소비의 쳇바퀴를 돌면서 불행해 하는지를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으로서의 이 사회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파헤쳐 준다는 점, 그 손아귀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춰 보여준다는 점이 이 책의 큰 의미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소비의 신화’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오늘날의 공간 계획(및 설계) 역시 소비의 신화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도시계획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反)소비적 기제로 이해되기 쉽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지적하듯이 소비에 대한 반(反)언설, 즉 소비에 대한 비판적 태도도 실은 소비사회의 신화를 완성하는 것으로 이용된다. 화장술로서의 조경 역시 반(反) 소비인 동시에 소비사회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의 도시계획가․조경가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68혁명’같은 급격한 변화만을 막연히 바라기보다, 악마와의 계약을 끝낼 방법을 각 분야에서 모색한다면, 길이 생기지 않을까. 여전히 막연한 가능성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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