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본선작-일반개인
끝나지 않은 이야기
권태준,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
김윤지
□ 들어가며 □
바야흐로 우리는 책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수없이 밀려드는 ‘읽을거리’ 속에서 옥석을 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권태준 교수의 근작인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는 고희를 맞은 노학자의 깊은 학문세계와 더불어 지난 반세기를 몸소 체험한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는 역작이다. 홍수 속에서 만난 맑은 샘물처럼, 우리에게는 아주 고마운 저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지난 한국현대사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다룬 백과사전과 같은 책으로, 방대한 분량의 한국의‘산업화 - 민주화 - 시민사회’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조금은 딱딱할 수도 있는 주제들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쓴 저자의 능력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간혹 등장하는 중언부언한 서술들과, 가치편향적인 평가들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지난 반세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고 싶어 했던 노학자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신생국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고 역동적인 한국의 발전과정”에 서구 이론을 들이대는 지식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고 있다. 공론의 중심에 서 있는 이른바 “386 세대”가 “세상 변전의 이치를 너무 이론적이고 이념적으로만 따지고 판단하는”행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를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다양한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한다. 한국은 고대-중세 시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산업화, 민주화가 이루어진 서양근대국가의 과정을 생략 한 채 불과 몇 십년 만에 그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한국적 특수성’을 무시한 채 ‘서구이론’에 이 나라의 발전과정이 맞지 않다고 비판하다가, 오늘날 세계화시대의 추세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만이 “세계시간대”에 역행하며 아직도 이념논쟁을 벌이고 있다.
□ 본 론 □
1. 개발독재는 ‘필요악(必要惡)’이었는가?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주체는 바로 ‘국가’라고 이야기한다. 건국 이후 한 세대 동안은 생존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적이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핵심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서양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신생국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바로 ‘개발독재’였고, 국가안보위기 상황과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이 바로 ‘개발독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분명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국가 발전의 ‘기준’이 오직 경제적 부흥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개발독재 과정에서 있었던 정치적 민주화의 퇴보와 그로 인한 폐해들을 조금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이었던 당시의 조치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당했던 노동자들과, 억울하게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과연 ‘경제성장’이라는 말로 달랠 수 있을까?
저자는 서구이론인 ‘발전국가론, 식민지근대화론, 종속이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개발독재는 과연 자본주의적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의제 자본주의적’이었다고 답한다. 저자는 이러한 의제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당시의 개발독재를 옹호하고 있으며, 이를 정당화 하고 있다. 나아가 IMF를 이겨낸 것도 개발독재 과정에서 성장한 ‘대기업’들 덕분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러한 주장들은 가치편향적인 평가로 보인다. 대기업의 성장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문제들과,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정치의 장마저도 위협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모습은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경제성장만이 발전의 기준이 된다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 정책들마저도 정당화 될 것이다. 당시의 ‘숫자’들은 식민지 시대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시기였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대를 그토록 슬퍼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모든 발전의 기준이 ‘경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슬픔의 뿌리에는 일제 치하에서 짓밟혔던 민족적 자존심과,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에 대한 긍정 역시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제론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치와 역사는 결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 수입을 계기로 위기에 봉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정치를 마치 ‘경제 다루듯 한’ 결과이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결과와 산출물이 중요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민의의 수렴과 폭넓은 토론을 통한 합의 도출은 정치의 영역에서 어쩌면 결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 결과 경제적인 발전을 일구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후퇴했던 민주주의와 정치의 가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2. 개발독재의 공공계획은 ‘기적’이었는가?
역사적으로 근대화와 맞물려 일어나게 된 ‘공공계획’의 합리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이 책을 보고자한다. 급진적으로 일어난 수 많은 ‘공공계획’들의 결과가 오늘날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이 책은 앞으로의 ‘공공계획’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개발독재 시대의 공공계획은 어떠했는가?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윤곽이 거의 대부분 그려졌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모습, 지방으로 이어지는 경부 개발축 등은 이 시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양의 공공계획들이 국가의 명령 하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대기업들은 충실한 수행자 역할을 담당하며 거대한 몸집을 불려갔다. 이처럼 단기간에 이루어진 많은 국토 개발 사업들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개발 사업들이 과연 ‘기적’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까? 단기간의 많은 국토개발사업들은 발전에 가속도를 붙여주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지역간의 발전 격차는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그 간극을 줄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일 뿐 아니라 지역감정으로까지 이어져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개발과정에서 등장한 ‘부익부 빈익빈’ 문제는 ‘양극화’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양산했으며, 경제적 논리로 접근한 많은 사업들이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환경오염이나 생태계파괴문제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엔 너무 큰 대가를 후손들이 치르고 있다.
지난 노무현 정권이 끊임없이 제기했던 양극화 해소와 국토 균형 개발 문제는 이러한 과거의 유산이다. 개발독재 시대가 잉태했던 수많은 공공계획의 문제점들이 수십 년이 지난 이제 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행정수도 이전문제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극심한 국론 분열과 에너지 소모로 이어졌다. 정권이 다시 한 번 바뀐 지금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어쩌면 개발에 있어서 얻었던 이익보다 더 큰 비용을 치루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는 지도 모를 문제이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본다면 개발독재 시대의 공공계획을 ‘기적’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맺으면서 □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직후 전국 방방곡곡 길거리에 당선 감사의 말과 함께 내걸었던 ‘경제, 꼭 살리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또한 등장하는 언론매체마다 ‘비지니스 프렌들리(Business-friendly)'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당선 직후 가장 먼저 만난 집단이 재계 총수들이라고 하니 그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지만 ‘경제’와 ‘실용주의’만을 외쳐대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개발독재 시대의 박정희 정권을 떠올리게 했다. 단군이래 최대 토목사업으로 불리는 ‘대운하’와 대기업 중심의 성장위주 경제정책을 ‘쏟아내는’ 모습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70년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친기업적인 정책이나 카리스마적인 대통령은 수십 년 전 개발독재 시대와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다. 정권출범 초기부터 정부가 국민들과의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삐걱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미 민주화를 온 몸으로 겪은 국민들이 과연 예전과 같은 밀어붙이기식 계획에 순응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스림을 당하기엔’ 국민들은 이미 너무나도 ‘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에서 저자는 한국의 민주화가 시민사회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시민사회가 변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 추진될 다양한 공공계획들의 중심은 국가나 대기업과 같은 개별적인 주체들이 아닌, 시민들을 포함한 협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 지으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택하자며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주의, 실용주의가 세상의 전면에 나섰을 때의 결과를 이미 목격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미래의 실용’은 ‘과거의 실용’과 분명히 구분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에는 시민들의 역할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우리는 한 세기를 뛰어넘어 왔지만, 우리는 이제 또 다른 세기를 뛰어넘기 위한 시기에 와있기도 하다. 미국이나 서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눈부시게 발전시켜 온 우리이지만,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지난 세대가 세기를 뛰어넘어 왔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또 한 세기를 넘기 위한 거름이 되어야 한다. 20대를 살고 있는 내 어깨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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