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일반개인 장려상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이찬, 『이찬시집』

박혜진


하나의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은 생이 응축돼있다는 소리다. 살아가는 내내 어디로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사람만이 삶에서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일상에 묻지 않고 삶의 한가운데로 가져올 수 있다.

이찬 역시 끝없이 반성하고 괴로워하는 시인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있다. 비, 그리고 할머니. 시집 한 권이 이렇게까지 압축돼있을 수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우연히 등장하는 단어가 없다. 할머니는 시금치(초록)를 팔아 초록(소주)을 먹고 작동중인 “할머니 초록 기계”이고 베네치아에서 물은 “초록의 가면”을 쓰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세탁, 염소, 돌들, 극장……. 이런 끊임없는 시어의 반복은 팽팽한 긴장 위에서의 관찰이 아니면 탄생하지 못한다.

살, 곳곳이 불타면
깨어져버리면 한 조각의 삶
-유리창 中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삶의 긴장과 고뇌 속에서 이찬은 단단히 응축된 시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시인을 괴롭게 했나?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치욕과 반성이다.

밤에만 새가 되는 너의 나라에 가는 너의 나라에서도 늘 벽에 쿵쿵 쥐어박히는 너는 새냐 쥐냐 아무도 모르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이 나라의 속담에도 오르지 못하는 너는 날고파하여 새가 되었지 영혼이 낡아 쥐가 되었지 영혼이 낡으면 낮이 무서운 거야. 그 낡은 영혼을 질질 끌고 다니기 힘들기 때문에 낮이면 잠만 자는 거야 어둠 속에서만 너의 영혼을 헤엄치게 하는 거야 그리고 밤이면 서서히 너의 낡은 영혼을 파티에 데려가는 거야 그리고 미친 듯 춤추는 거야 날개를 휘저으며 벽을 뚫기 위해 동굴 안으로 헤엄치는 거야 너는 날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넌 공중을 헤엄치는 거야 아무도 침범해오지 않는 공중을 너의 영혼이 부르는 대로 헤엄쳐 다니는 거야 그러면 파티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거야 어둠을 갉아 먹으면 너의 영혼은 힘을 얻는 거야 사람들은 너를 소름끼치게 싫어하지 늘 외로움의 병이 질질 끌고 다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무도 너를 새라고 부르지 않아 아무도 너를 밤새라고 황홀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넌 쥐야 밤을 갉아 새벽을 부르는 쥐야 넌 낮을 갉아 밤을 만드는 쥐야 너의 밤은 늘 날개가 있지만 아무도 널 새라고 부르지 않아 넌 쥐일 뿐이야 너 혼자만의 날개를 단 쥐 쥐일 뿐이야
- 박쥐

시인이 자신을 박쥐로 묘사한 이유는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훔치다’라는 서술어와 관련이 있다. “비를 훔쳐보며 젖어드는” 나, 할매 시를 훔쳐 “詩씹 같은 그놈의 시를 쓴다는 이 할망구를 용케 잘도 팔아먹는다는 손주놈”인 나, “달 한놈, 달 한년, 지구를 훔쳐 먹고” 시를 쓰는 나. 그런 나를 시인은 창녀라고까지 비난한다. 자신에게 그는 낮에도, 밤에도 속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그 밑바닥에서 시인은 너무나도 간절히 씻김을 절규한다. 제목이 이렇게 시집 한 권을 통째로 꿰뚫고 있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나를 씻고 싶다. 지나온 길들을 모두 세탁하고 싶다.

비에 젖어 비의 관절마저 적셔 온통 비의 근육으로 비를 만나면 비의 성기는 불뚝 일어선다 비를 비를 만져버려 비를 불끈 솟구치게 하면 비 주르르 흐른다 비의 냄새마저 비의 향기마저 시궁쥐이지만 비는 달린다 비를 남용하는 비를 비에 중독된 비를 어찌할 것인가 비여 소리쳐 부르면 젖어드는 비 흠뻑 젖어버린 살 비는 비에 흠뻑 젖는다 비는 비를 껴안을수록 비 내린다 비의 근육마저 부서져 통통거리며 내린다 비는 비를 어찌할 것인가 비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 비의 뼈마저 영혼마저 비로 내려 비 뚝뚝 흘리며 비로 무너진다 무너지는 비 무너지는 영혼 비가 비를 비의 영혼을 자유ㅎ게 하리라 비 뚜욱뚝 흐른다
- 비에 흠뻑 젖다

비에 젖으면 나를 다 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동굴 속의 박쥐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며 빗속을 뛰어다닌다. 바지까지 흠뻑 젖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반성조차 시인에겐 반성의 대상이다.

…그리하여 반성하건만 반성처럼 가벼운 주사도 없다 반성처럼 치욕스런 망각도 없다 반성을 위해 반성하는 나날들 매일 반성하므로 반성하고 반성의 알약을 먹고 또 반성하고 反省으로 反性을 낳으리라 반성을 쓰라리게 쓰다듬지만 반성할수록 반성은 멀어지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재무장을 서두르지만 나는 얼마나 위태하게 홀로 서 있는가 적당히 흔들리고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파괴되고 적당히 나의 비트를 노출한다면 나는 이 지상에 귀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雨後竹筍처럼 솟는 반성의 말들에 다정스럽게 길들여질 것이다…
- 비오는 날 극장을 나오며 나를 질질 끌고 다녔다 中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이유는, 반성을 반성하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완전한 씻김은 ‘비’가 아닌 ‘비의 눈’에 있다. 극장과 비디오 속의 비는 진짜 비가 아니다. 치열한 자기 반성 속에서 시인은 비 중에서도 진짜 비를, 비의 눈을 맞아야 자신이 완전히 씻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비의 눈’은 기다리기만 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만듦의 과정은 가짜 비를 해체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비를 곱게 찢어 가루로 만들자 비는 비로 내린다 하나의 물방울로 줄지어 비로 내린다 네 몸 안 비를 전부 퍼내어도 비의 흔적들이 비로 흐르고 흐른다 비로 내리던 기억들이 추억으로 스며들지 못해 창밖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누가 비를 난도질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비는 아무리 토막살해 해도 비로 줄지어 내린다 비를 해체하는 유일한 길은 태양을 하루 종일 붙들어 매는 일이다 비를 살균하는 비를 해체하는 태양을 네 몸 안에 심는 일이다 불타는 몸 불타는 비 갈가리 찢어지는 비
- 비를 해체하라

계속해서 스스로를 난도질하고 몸을 던져야 한다, 나를 세탁소에 데려가 세탁기에 돌려야 한다. “너덜너덜 누더기인 살들만을 걸어야 한다”, “영혼들의 뒤죽박죽 옷을 닮은 살들은 물벼락으로 세제구름으로 구타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멍들고 나서야 “가볍게” 걸려 있을 수 있다. 짜내고 짜내야 비의 눈을 만들 수 있다. “갈가리 찢어지는” 고뇌와 집착야말로 치열한 생명력의 절정이다.

이찬의 불타는 태양이 바로 곧 푸른 생명력이다. 할머니에게서 시를 훔쳐온 도둑이라고 시인은 자학하지만, 사실은 그의 시선이 할머니에게 생명력이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시인의 타오르는 그 처절한 열정이 냉장고 문을 열어 “할머니의 아름다운 시신을 벌떡 일어나게” 한다.

할머니를 따라 옛날 텃밭에 갔습니다 삐죽이 솟은 옥수수들이 덜 익은 가슴을 달고 묵묵히 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바람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콩잎들이 제 열매를 키우지 못해 반쯤은 쓰러졌습니다 할머니의 일흔여덟 생애마냥 콩잎들이 주름졌습니다 아니 얼굴이 파래졌습니다 할머니는 텃밭에 콩처럼 쭈그리고 앉아 쓰잘데없는 콩의 뿌리를 홱홱 뽑아버렸습니다 바쁜 손길 피해 무럭무럭 자라난 잡풀들도 제 생애를 마감합니다 한마디로 할머니의 고사 작전에 걸려들어 푸른 제 생애를 말리는 것입니다 들길 따라 오가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가 밭 전부를 독차지한 것입니다 부끄럼도 없나 보니다 햇살을 마주하며 윗저고리를 확 벗어버렸습니다 할머니의 쪼그라진 가슴이 탱탱 말라붙어 있습니다 할머니의 몸에서 아웅다웅거리던 살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 오래입니다 할아버지가 주던 그리움들이 길을 잃은 지 오십 년을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텃밭에 가면 할머니의 옛집에 가면 할아버지를 담아 옵니다 가난한 뼈마디마다 전해져오는 할아버지에 대한 통증을 자랑스럽게 견디어옵니다 우리 살던 옛집 텃밭에 가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옥수수와 깨깨거리며 자라나는 깨들과 막 가을을 담는 배추 잎사귀와 무들과 무슨 사연들을 주고받는지도 모릅니다 한참이나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배추마냥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으니까요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갑니다 해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할머니의 그리움 싣고 저 멀리 할아버지의 묘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할머니도 텃밭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사무침이 이젠 뼈로 앙상한 가난한 몸을 씻습니다 오늘 밤 오랫만에 할아버리를 맞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움으로 마른 젖무덤과 사무침으로 굽은 허리를 살짝 보여주기 위해 찬물을 들이붓습니다 뼈에 부딪히는 물들이 쨍그랑쨍그랑거립니다 오늘 밤 할머니는 완벽한 누드입니다 오늘 밤 할머니의 누드는 밤새도록 할아버지에게 소곤거릴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 할머니의 누드

비의 눈을 만들어내는 것을 “공기의 꿈”이라고 부른 까닭은 가벼움 때문일 것이다. 쨍쨍한 여름 속에 직접 앉아 있으면 햇볕이 놀랄 만큼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길에 아무도 없고 초록색 풀들만 조용히 타오른다. 비의 눈들로 씻기고 난, 한낮의 시간인 것이다. 할머니는 “여든의 몸이 까까머리 소년처럼” 훤해진다.

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할머니를 포착하고 시로 끌어올린 의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끝없이 자기를 추궁하고 절망하는 속에는 오히려 생에 대한 강한 열망과 의지가 숨어있다. 툭하면 이제 죽어야지 하시는 할머니들의 신세 한탄과 비슷하다. 끊임없는 괴로움 속에 생명력의 정수가 있다는 사실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여름 한낮의 더위 속에 세워놓고 발견하는 생명력과 참 닮아있다.

요즘의 나는 무언가에 끊임없이 매달릴 수 있는 치열함이 부족하다. 먹고 자고, 시간 돼서 학교 간다. 올 여름 장마에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아주 그냥 나를 던져버려야겠다. 비의 눈에 흠뻑 젖어, 세로로 내리는 빗속을 가로로 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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