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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베일린,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중어중문학과 4학년 김진수


I. 허구와 사실 사이의 진실 게임

제논의 역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자신보다 10미터 앞선 지점에서 출발한 거북이가 겨우 1미터를 가는 동안 열 배나 빠른 아킬레스는 10미터를 단숨에 따라잡지만 그 사이에 거북은 0.1미터를 가고, 아킬레스가 다시 0.1미터를 따라가면 거북은 또 다시 0.01미터를 간다. 서사의 세계에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아킬레스보다 더 빠르다.

‘사실’과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아킬레스와 그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북이 사이만큼의 틈이 있다. 이 틈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소통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본질적인 한계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실 그대로를 전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는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에서 더욱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가 결코 사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더욱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 또한 많은 관계들에 얽혀 있다. 그것은 그가 이야기를 통하여 잠정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그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로써 그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새로운 현실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관계들은 이야기에 현실적 지위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그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푸코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담론’이라는 말은 이러한 현실 관계 속에 얽혀 있는 이야기의 본질을 잘 설명해 준다.

버나드 베일린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사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미국 혁명’은 그것을 이끌어낸 이데올로기라는 ‘저자의 사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미국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라는 저자의 사실이 결합된 제 삼의 사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이 관계들 역시 이야기를 매개로 맺어져 있으므로 그 사이에 필연적인 틈을 갖는다. 그 틈을 메우는 이야기의 허구, 그러나 그 허구 속에 있는 진실 — 이 글은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진실게임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II. 키워드들에 숨은 허구 읽기

‘아메리카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들(The Ideological Origin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서 우리는 ‘아메리카’, ‘혁명’, ‘이데올로기’, ‘기원’이라는 네 개의 키워드를 만난다. 이 네 개의 낱말들은 각각 하나의 완전한 낱말로 표상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로, ‘혁명’은 단지 ‘혁명’으로 소통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나 있고, 저자 역시 이 책의 어디에서도 이 단어들의 의미범주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념들, 특히 이 중에서도 ‘아메리카’, ‘혁명’, ‘이데올로기’ 이 세 단어들은 단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아메리카’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또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선뜻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명사들 — 예컨대, 시계, 자동차, 학교 — 과는 달리 ‘해석’을 통해서만 그 의미범주를 가질 수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사용되는 맥락 속에서 단어들이 가지는 역사성, 가치 편향성, 다원적 해석 가능성 등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담론을 이루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들에 대한 비판과 정의 없이 담론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아메리카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들’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 담론의 허구성(지식의 정치)을 직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실게임은 이 책의 제목을 이루는 네 키워드들이 가진 숨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단일한’ 의미로 사용하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 또는 무의식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메리카 혁명’

제목에서 ‘아메리카 혁명(the American Revolution)’이라는 개념은 고유명사로서 사용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저자가 이 사건을 하나의 실체로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고정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공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미국 혁명’으로 부를 것인지 ‘독립 전쟁’으로 부를 것인지에 대한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혁명’이라는 말부터가 이미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혁명은 민중이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는 사건이고, 따라서 이에 대해 ‘혁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부터가 ‘민중의 의지’와 ‘체제의 개혁’이라는 데 강조점을 둔 저자 자신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가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그가 속한 지적 담론의 공간의 주류적 해석을 비판 없이 따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연관시켜 볼 때 ‘전쟁’보다는 ‘혁명’이 저자가 책에서 주로 다루는 정치체제에 대한 담론의 공간을 더 많이 열어주는 것은 분명하다.

‘혁명(the Revolution)’을 수식하는 형용사 ‘American’ 역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이것은 오늘날의 보편적인 용례와 같이 ‘미국의/미국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저술의 배경에 되는 ‘기원들’ 이전의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은 개념으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인’으로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었던 것과 같다. 물론 ‘혁명’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났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단어의 쓰임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읽는 이로 하여금 오늘날의 ‘아메리카 합중국’과 이 시기의 ‘아메리카’를 동일시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유추에 의해 담론이 생산하는 먼 옛날의 ‘아메리카’는 (저자의 정치성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아메리카’를 구성해 가는 힘을 갖는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 담론이 바로 ‘오늘’을 구성하는 힘, 즉 오늘날의 ‘아메리카’와의 관계 속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낱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저자가 책에서 다루는 ‘기원들’의 공간 또는 당대에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의 담론을 주로 당대인들의 논의에 관한 사료들로 엮어가는 것과 또 이를 통해 주로 당대인의 의식 변화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제목에서 ‘American’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한 혁명이 일어난 공간이라기보다는 혁명의 주체로서의 ‘아메리카인’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아메리카인’은 이 책의 담론에서 보다 한정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에 있었던 모든 아메리카인이 아니다. 저자의 담론 속에서 ‘아메리카인’은 ‘기원들’의 시기에 정치 담론으로써 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로 축소된다. 이 책에서 ‘아메리카인’이 표상하고 있는 혁명의 주체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과 같이 인쇄매체로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남길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는 ‘기원들’의 시기에 간행된 인쇄매체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지적 혁명을 설명하고자 했던 저자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혁명의 주체는 글로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남길 수 있었던 소수의 지식인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민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민중들의 정치적 인식 역시 지식인들의 정치 담론 못지않게 중요한 혁명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1764년의 설탕법과 1765년 인지세법에 반발해 시작된 영국 상품 불매운동과 1768년 타우센드 관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영국 상품 수입 반대 운동 등에서도 제국과의 관계와 식민지에 거주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설정해가는 민중들의 정치의식 변화를 볼 수 있다. 당대에 유행했던 선술집 문화 역시 정치적 담론의 주체로서 민중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메사추세츠에서 가장 정교한 선술집 문화가 발달했던 것과 이곳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치 의식이 탄생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당대의 정치 담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유의 딸들(Daughters of Liberty)이 “우리는 자유를 위해 차를 끊겠다”고 한 데서 우리는 이 시기의 여성들 역시 ‘자유’라는 정치적 담론에 참여했으며, 식민지 무역과 상업의 실제적인 주체로서 당대의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남성 못지않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

제목의 ‘이데올로기(Ideology)’ 역시 ‘아메리카’와 ‘혁명’ 못지 않는 넓은 의미 범주를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세계관으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엄격한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성격과 저자가 제시하는 기원들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사이에는 다소간의 거리가 있다. 이 책에서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들로 언급되는 것들은 공화주의, 합리주의적 계몽주의, 영국의 보통법 전통, 청교도주의 등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사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저항담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따라 이들 사상체계들을 범주화한다면 세계관의 층위에서부터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가치로서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치사상 또는 사회사상이 더욱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계몽주의나 청교도주의는 공화주의나 법에 대한 의식보다 심원한 초(超)정치적 사상체계이지만, 이 글에서 기원들의 성격을 한정하는 이들 사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이들 가치들의 정치적 측면뿐이다.

저자가 선택한 ‘이데올로기’라는 의미를 ‘정치사상’으로 좁혀 해석하면, 우리는 저자가 초점을 두고자 했던 기원들의 형이상학적 성격과 그의 방법론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혁명이 발생한 15년 전부터 발간된 소책자들의 정치적 담론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기원들’을 밝히고자 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간된 소책자들은 그 “유연성” 때문에 많은 정치담론들을 재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저자가 주요 사료로 채택한 이 시기 소책자들은 당대인들의 정치의식을 가장 폭넓게 반영하고 있는 한 가지 방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저자는 소책자들의 내용에만 집중하고, 소책자라는 매체가 가진 성격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자가 규명하고 싶었던 ‘이데올로기’와 저자가 규명하는데 그쳤던 ‘정치사상’의 간극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기 소책자를 비롯한 인쇄 매체들은 이전 시기 유럽의 매체 전통과 맞닿아 있다. 17세기 초에 탄생한 신문은 새로운 형태의 공공 영역을 탄생시켰다. 이 새로운 공공영역은 “당시의 지배와 반란의 대립 속에서 점차 전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일견 지배를 안정화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혁명적인 경향을 띠기도” 했다. 출판 시장의 발전과 더불어 신문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다원주의와 전통적인 것의 권위 상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전통이 18세기로 이어지면서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들이 더욱 다양한 인쇄매체들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저자가 규명하고자 했던 폭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매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매체 자체가 가진 이러한 사회적 함의와 함께 생각될 때에 밝혀지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부터 16년 뒤에 출간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인쇄 매체가 갖는 중요성과 이 책에서 모호하게 사용된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탐구함에 있어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앤더슨은 “1760년부터 1830년 사이에 일어난 반(反) 본국(anti-metropolitan) 저항”을 미 대륙 전체에 걸쳐 폭넓게 관찰하면서 당시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같은 이념적 무기만으로는 “혐오의 중심대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의식의 틀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자체로서 구체제의 약탈로부터 방어되어야 할 상상의 공동체의 성격이나 형태를 창조”한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신문으로 대표되는 인쇄매체였다. 인쇄매체가 구성한 ‘상상의 공동체’야말로 베일린이 인쇄매체라는 자신의 사료들에서 희미하게나마 인식했을지도 모르는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다.

‘기원’

그러나 저자가 사용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한 가지 유용한 점이 있다. 이는 제목에서 이데올로기가 ‘기원들’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다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제목과 같이 아메리카 혁명을 기점으로 이것이 실현되었던 역사적 바탕들을 추적해 가는 것이 저자의 주요한 목적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기원들을 추적해 들어간 결과 정치 사상의 변화라는 큰 밑그림을 발견한다.

그런데 저자가 펼치는 이러한 기원의 탐구에는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는데, 바로 ‘선택’이다. 기원의 탐구에서의 ‘선택’은 일반적인 ‘순방향’의 역사서술과는 달리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선택 가능항들이 얼마나 현재와 닮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기원에 대한 탐구는 현재를 기준으로 현재와 과거의 유추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 책의 기본적인 논리구조 역시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과 옛날 같은 땅에 살았던 ‘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정체의 뿌리가 된 혁명 이후의 시기에서부터 이것과 관계되는 이전 시기의 정치적 담론들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도 인식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원에 관한 탐구는 탐구의 대상이 되는 기원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의 새로운 담론으로 역사 서사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전통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전통의 출발점이 되는 기원 역시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저자가 ‘이데올로기’라는 넓은 의미의 개념으로 기원을 수식한 배경에도 이러한 선택으로부터 기원을 조직하기 위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기원에 관한 탐구의 바탕은 유추이고, 가장 합리적인 유추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선택항이 넓어야 한다. 가장 넓고 보편적인 선택항,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정치 사상적 기원’을 넘어선 ‘이데올로기적 기원’에는 이러한 언설의 정치가 놓여 있다.

III. 선택적 서사와 언설의 정치

저자가 구사하고 있는 선택의 정치는 그가 사료들을 인용하는 방식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선택은 현재를 만들어 낸 과거의 사료들을 선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사료들에 심정적으로 편입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아메리카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반(反)권위주의 담론들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저자는 이들 담론들을 제시할 때 3인칭 화법이 아닌 1인칭 화법을 주로 구사한다.

  1. 영국에서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투쟁이 역사적으로 어떤 단계에 있는지는 식민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그것은 그런 의문을 통해 자유가 처한 위협의 특징을 분명하게 알아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에서 맡게 된 특별한 역할을 뚜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111쪽, 강조점은 필자)
  2. 권력은 자유를 보호하는 주요 기관에 직접적으로 또 야비하게 손을 뻗쳤다. 분명 윌크스가 옳았다. 정체는 우연이 아니라 계략에 따라 근원에서부터 훼손되고 있었다. (본문 147쪽)

인용한 글 (a), (b)는 모두 저자의 직접서술이다. 그런데 이 두 인용문에서 저자의 목소리는 그가 서술하는 대상이 되는 혁명 당시의 반(反)권위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섞여 들어가 있다. 서사에서 목소리는 존재 자체이고, 목소리의 일체화는 곧 존재의 일체화와 같다. 인용한 본문 (a), (b)는 모두 이러한 점에서 저자가 반(反)권위주의자들과 어떻게 일체화되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용문 (a)는 저자가 ‘식민지인들이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을 공리로까지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는 식민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담론은 현실을 구성하는 힘을 가진다. 역사에 관한 담론은 그 아래를 흐르는 언설의 정치가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현실을 구성해간다. 베일린의 이 기념비적 저작이 아메리카 혁명에 대해 밝혀주고 있는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진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서사 아래를 흐르는 언설의 정치를 읽어내어야 한다. 특히 모든 공동체의 기원에 관한 탐구들이 공동체의 신성한 시원(始原)을 밝혀 공동체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무의식을 갖고 있고, 이러한 작업이 동시에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소수자들과 공동체 바깥의 타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는 이 담론에서 언설의 정치를 살펴보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텍스트

버나드 베일린,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배영수 역, 새물결, 1999.

참고문헌

  • 패트릭 오닐, 『담화의 허구』, 이호 역, 예림기획, 2004.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오생근 역, 나남출판, 2002.
  • 와카바야시 미키오, 『지도의 상상력』, 정선태 역, 산처럼, 2006.
  •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황혜성 외 역, 휴머니스트, 2007.
  • 베르너 파울슈티히, 『근대 초기 매체의 역사』, 황대현 역, 지식의 풍경, 2007.
  •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윤형숙 역, 나남출판, 2003.
  • 조셉 폰타나,『거울에 비친 유럽』, 김원중 역, 새물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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