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불평등의 사진집에 주거권이라는 책갈피를 꽂다
일반개인 1등
주거불평등의 사진집에 주거권이라는 책갈피를 꽂다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
미 류
몇 년 전 보라매병원 행려응급실에서 한 달간 일을 도울 기회가 있었다. ‘행려’는 집이 없어 거리나 시설에서 살아가는 연고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마침 겨울 초입이라 찾아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고 술에 취해 재워달라고 오는 사람부터 죽기 직전에 찾아오는 사람까지 다양한 삶들이 모여들었다. 한 아저씨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퇴원한 다음날 다시 응급실을 찾아왔다. 잠결에 몸을 녹이려고 붕대에 불을 붙였고 채 풀리지 않은 붕대가 타들어가며 화상을 입은 것이다. 한 아저씨는 고통스럽게 호흡을 하며 들어왔는데 진단 결과 폐암 말기였다. 바로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사나흘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가 되도록 병원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고 그날도 경찰서로 찾아가 겨우 응급실로 왔다. 경찰이 ‘행려’라는 걸 입증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 해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비싸다는 타워팰리스 입주가 시작된 해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선정적인가. 그러면 조금 익숙한 이야기들을 해보자.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수많은 집들이 나온다. 넓이가 얼마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단독주택이나 고층 주상복합 건물에는 대기업 이사쯤 되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있고, 한옥의 구조를 유지하는 정갈한 집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못되지만 가부장적 전통은 고수하는 꼬장꼬장한 아버지가 있다. 간혹 등장하는 가난한 청춘들은 밤하늘에 위태롭게 떠있는 옥탑방에 살고, 혼자 사는 모진 여성들은 오피스텔의 침대 한켠에서 허물어지며 숨겨둔 눈물을 쏟아낸다. 너무 익숙한가. 바로 그것이 문제다. 집과 사람 사이에 철학이 끼어들 틈새라고는 없는 현실. 여기에 ‘부동산 계급’이라는 딱지를 붙여 현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끔 하는 책이 바로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다.
책을 읽기 전에 책갈피를 하나 쥐어보자. 브레히트의 「임시야간숙소」라는 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 임시야간숙소를 마련해주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몇 명의 노숙인에게 내리려던 눈이 길 위로 떨어지겠지만, 브레히트는 “그런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라고 간절히 말한다. 한 인간의 삶이 자선에 내맡겨지는 것은 모욕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권’이라는 출발선이 필요하다.
장은주는 우리가 지금 ‘모욕사회’를 살고 있다는 말로 『생존에서 존엄으로』라는 책을 연다.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자야 하는 노숙인들에 대한 빈번한 불심검문과 행인들의 눈초리(심지어 혐오범죄까지!)만으로도 모욕사회의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는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다. 집이 없어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뻔한 사실’일 뿐, ‘불편한 진실’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서로의 존엄을 지키고 돋우기 위해 집을 고민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안녕을 위한 집만 고민될 뿐이다. 이것은 ‘사람다움’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반(反)-철학이다. 집과 사람 사이에 사람다움의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사람답게 살 권리인 인권, 특히 주거권의 실현을 위한 모색이 필요하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주거권이라는 책갈피와 잘 어울리는 책이다.
주거권, 즉 모든 사람은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다움을 보장하는 어떤 기준을 정해야 하면서도 사람다움을 위해 그 기준을 모호하게 남겨둬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불평등을 드러냄으로써 그 딜레마를 우회하는 듯하면서도 관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쥘 수 있다. 누군가는 집을 수십 채 수백 채 가지고 있고, 집을 가지고 있는 만큼 돈을 벌고 삶이 윤택해지는 반면, 누군가는 가난한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은 기억을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하는 불평등 말이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이런 불평등을 통계로 보여주는 사진집이다. 사실 ‘통계’는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현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왜곡이 있을 수 있으며 현상의 원인을 짚어나가는 데에는 더욱 취약하다. 그러나 어지러운 숫자들 사이로 드러나는 부동산 계급사회의 풍경은 우리의 시선을 충분히 잡아끈다. 통계의 한계를 따지기에 앞서 사진을 보듯 그 풍경들을 좇아가보는 것이 좋다.
부동산 양극화가 소득 양극화보다 심각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부동산 부자들의 삶과 부동산 극빈층의 삶이 선명하게 대조되어 드러난다. 동네마다 집값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주거환경뿐만 아니라 수돗물 마시는 비율, 주거비 지출 비중, 은행 문턱의 높낮이, 대학 합격자 수, 심지어 수명마저도 좌우된다는 사실까지 통계로 확인하고 나면 분석의 엄밀함을 따지기에 앞서 혀가 내둘러질 것이다. 평당 수천만 원을 넘어서는 집들이 지어지는 동안 움막이나 토굴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잔혹한가.
‘넝마주이’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만들어진 포이동은 타워팰리스와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부동산 계급사회』는 이 풍경을 하나의 사진에 담은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풍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적지 않았던 움막이나 토굴이 2000년대의 현실 속에서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을 두고 ‘부동산 계급사회’라는 진단을 단호하게 내리는 용기가 한국 사회를 새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과연 이것이 정당한가, 라는 물음이 풍경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러나 사진집은 사진집일 뿐이기도 하다. 저자 스스로도 ‘부동산 계급’이 엄밀한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윤일성의 『도시개발과 도시불평등』에 따르면, 주택계급(housing class)이라는 개념은 1960년대 영국에서 처음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한 가구의 계급적 지위가 그 가구의 주거수준을 결정하는가”, “주거상황의 변화가 그 사회의 계급구조에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전개되었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전통적인 계급구조 분석의 틀에 따른 앞선 논의와는 다르게 부동산 자체를 계급의 분류 기준으로 제시했다.
부동산이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결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경향은 더욱 견고해졌다. 집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보다 재산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띠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시대부터다. 임대‘업’이 시작되었고 ‘집 장수’들이 등장했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토지가 사유화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개발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는 부동산이 확고한 자산 증식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아파트와 오피스텔, 주상복합건물로 이어지는 건축문화(그것도 문화라고 할 수 있다면)가 집을 대변하게 된 지금까지 다양한 부동산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그에 걸맞는 사회적 대우를 받고 기대되는 이익을 챙겨왔다. 그리고 부동산 계급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급’이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우선, 분류된 부동산 계급들 간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현상을 진단하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사회구조의 역동을 분석하는 틀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계급’보다는 차라리 ‘신분’이 더욱 어울리는 진단일 것이다. 또한 책에서 분류한 여섯 개의 집단을 각각 하나의 계급으로 묶는 것이 부적절한 지점도 있다. 주택계급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려웠던 이유도 비슷하다. 이를테면, 타워팰리스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판잣집을 소유만을 기준으로 ‘집 한 채’라고 분류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이 없는 가구도 마찬가지다. 영민한 부자들은 부동산 금융 상품을 통해 투기에 동참하면서 정작 자신은 전세로 살며 세금까지 아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급이면 어떻고 신분이면 어떤가. “한국 사회의 이러저러한 양상을 설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뭐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부동산이라고 대답하겠다는 저자의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일단은 덮어두고 풍경을 계속 보되 주의만 놓지 말자.
주의해야 할 점을 기억하기 위해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도시 빈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한다. 열띤 어조로 선정적인 통계들을 부각시키고 분석을 종종 건너뛰는 점은 아쉽지만 주거 문제를 볼 때 그 너머의 풍경까지 담은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반면, 『부동산 계급사회』는 부동산 가격이 얼마나 올랐고 얼마나 비싼지 보여주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부동산 문제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동의 맥락에서 짚어보는 시도가 다소 부족하다. 투기와 개발을 조장해온 집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지금의 불평등이 이른바 ‘부동산 5적’의 문제로 환원되어버릴 수 있는 우려도 든다. 물론 ‘그 너머’를 해명하는 것까지 이 책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과욕이다. 오히려 이 지점이 이 책의 미덕이 된다.
주거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는(신념이거나 자조거나) 결론으로 쉽게 빠지기 전에 그 자체에 착목하고 정책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손낙구가 지적하듯이 그간의 운동이 ‘추상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이 바뀌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유포하지만 지금 우리를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은 내어놓지 못하는 운동 말이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적어도 한국의 주거불평등을 보여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실마리들을 적절히 제시하고 있다.
그 실마리들을 잡아보자. 살만한 집에 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계획하고 점검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지표들이 필요하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일반논평을 통해 점유의 안정성, 주거비의 지불가능성, 쾌적한 주거환경, 문화적 특성의 보호, 적절한 위치 등을 주거권의 요소로 풀어 설명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지표로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은 주거와 관련된 통계들이 풍족하지가 않아 어려움이 많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이 지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들을 한다.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가구들이 유형별로 얼마나 되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은 큰 성과 중 하나다. 점유의 안정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이사를 자주 다니는지 밝히고, 주거비 지출이 적당한지를 묻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임대료뿐만 아니라 대출금, 이자를 포함한)을 집에 쏟아 붓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도도 의미 있다. 특히, 공공임대주택과 자가 점유 주택을 묶어 ‘집 안심률’이라는 새로운 통계를 만들어낸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주택보급률과 자가소유율 정도로 평가되는 주거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이런 지표들에 이어 손낙구는 ‘주택계급별 맞춤형 주택 정책’을 제시한다. 부동산 계급의 분류가 엄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책들 역시 더 검토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책의 세세한 내용을 떠나서 ‘누구에게 어떤 집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새롭고’ 소중하다. 주거권의 관점에서 정책을 만들어가는 접근 방식인 것이다. 역대 정권들은 ‘서민 주거 안정’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건설자본과 집 부자들을 위한 주택만을 공급해왔다. 집은 경제논리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소재였을 뿐이고 가난한 이들은 물량 위주의 주택공급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들러리로 소모되어왔다. 집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집이 아무리 많이 지어져도 주거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만들어진 집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만 묻는 접근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누구에게 어떤 집이 필요한가’ 묻고 나서 그 집들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물을 때 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
실마리를 잡았다면 얽힌 실타래를 푸는 일이 남았다. 『부동산 계급사회』는 새삼스러운 현실을 낯설게 보라고 요청하면서 주거불평등을 사회적 의제로 던졌다. 『한국 주거의 사회사』 역시 “그 대조적인 양상이 극단적이고 단계별 연속성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한국의 독특한 주거 양상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부동산 계급사회』는 주거불평등 자체에 천착함으로써 주거권에 대한 인식을 요청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다움’을 갈구하는 절박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평등에 대한 보고는 사람들의 분노와 그에 맞선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불안을 부추기는 데서 끝날 수도 있다. 『부동산 계급사회』가 보여주는 풍경의 끄트머리에서 어떤 이들은 “그러니 어쨌든 내 집을 마련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집 한 채 마련하느라 평생을 바치는 것을 누군가 비웃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에게만큼은’ 집 한 채를 물려주고 싶은 욕망이 발가벗겨져도 부끄럽지 않은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말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주택 정책의 목표가 다시금 ‘자가 소유의 촉진’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우를 살짝 남겨둘 만도 하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공익광고처럼 인식의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내 집’이 어떤 것일지 주거권의 관점에서 조금 더 밀고나가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특히, 자가 소유에 대한 욕망과 ‘상속’이라는 관습이 주거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살만한 집’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가난할수록 ‘내 집 마련의 꿈’이 더욱 절박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는 있다. 다만 ‘내 집’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한 발짝 더 나가야 한다. 불안에 대한 인간의 일차적인 반응은 회피다.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불안을 넘어 분노로, 분노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망, 그리고 그 전망을 끈질기게 밀어갈 주거권의 정치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다시 주거권이다. 주거권 운동을 하면서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없어 힘들었다. 그런데 더욱 괴로운 것은 ‘알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부동산 투자의 비결을 알려주거나 개발을 부추기는 책들이 매일같이 쏟아지는데 ‘집’에 대해 말하는 책, 주거권을 다루는 책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그래서 ‘집’을 통해 ‘사람’을 들여다보게 하는 『부동산 계급사회』는 출간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운 책이었다. 어쩌면 이 글은 서평이기보다 헌사에 가깝다. 방대한 통계자료를 모으고 헤집고 새로 엮은 노고만으로도 내 고마움은 무안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기숙사를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막막했다. 급하게 하숙집을 구했다. 서른 명이 같이 살았다. 화장실 겸 욕실이 달랑 두 개, 아침밥과 온수가 나오는 시간은 일곱시 반부터 여덟시 반까지 겹쳤다. 잠자리에 누워, 또는 숙취로 머리가 아픈 아침에 나는 밥을 먹을지, 씻을지 고민해야 했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몇 차례 항의하다가 “그러니까 내가 여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라는 집주인의 말을 듣고 그날로 짐을 싸서 나왔다. 울면서 이사 갈 집을 구했고 그 집 앞으로는 다시 지나치지도 않았다. 누군가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다독여줬지만 그 순간 나는 집을 나오기만 하고 여전히 어딘가에 정주하지 못하는 떠돌이라는 점이 확인될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세보증금을 대준 엄마는 “자기 살 집은 구해놓은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충고한다.
나는 이제 이것을 ‘모욕’으로 느끼고 싶다. 우리에게는 더욱 많은 ‘모욕’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을 권한다. 부동산 계급사회가 침해하고 있는 우리의 권리는 더욱 많이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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