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학부개인 장려상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

이승현


서술에 앞서 아래와 같은 점들을 미리 밝혀두고 싶습니다. 논점을 산만하게 하지 않기 위해 책에서 부분적으로 다뤄진 저자의 '성생활론'과 '사랑론'은 생략하거나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서평이므로 본인의 감상을 중심으로 하겠으나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글을 자연스레 전개하기 위해 본인의 평(評)에 그치지 않고 집약된 책의 내용도 요약·전달하겠습니다.

남성-페미니트스 권혁범 씨가 쓴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는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짧은 칼럼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건데, 페이지도 200 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데다 저자의 넘치는 재치 덕분에 부담 없이 쭉쭉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여성 편향적으로 서술되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책 제목만 보고도 저자가 극단적 ‘페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여성’이라 표기하고 남자는 ‘남자’라고 표기한 것을 보라. 저자는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온건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여성 쪽으로 심하게 편향되어 있는 골수(骨髓) 페미니스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은 여성이 여전히 불합리한 억압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기 때문이다.

책은 내용적 측면을 미리 언급해 두자면, 이 책, 새로울 게 별로 없다.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의 여성주의 이론을 가벼운 내용으로 탈구축한 것이므로 책에 새로울 게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론이라 이론적 토대가 탄탄하고 저자의 필력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저자의 필력은 서문에서부터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며 독자를 여성주의 속으로 이끈다.

책의 서문(序文)은 '내가 여자라면' 하는 가정으로 시작 된다. 여자가 겪는 역경을 지나치게 과장한 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여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런 가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수 있었다. 치한이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에서부터 공적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의 은밀한 눈길이나 '손'길에 시달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내가 여자라면, 나 또는 내 성기(性器)를 소재로 성적인 농담을 나 몰래 하거나 내 성을 희롱하는 듯한 눈길을 하루에도 몇 번 씩 참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얼핏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불쾌감을 넘어 모욕감, 수치감까지 줄 수 있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여성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일별(一瞥)할 수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과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이 차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도 권력을 남성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은 괄목(刮目) 할 만 한 수준의 사회·학문·경제적 약진을 이루어내기는 했으나 아직 미진하고 또 미진하다. 호주에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부여하던 호주제는 철폐되었고,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이나 박근혜 의원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여성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아직도 가사 노동에 얽매여 있다.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공부를 잘 하며, 명문대에 입학하는 여학생들의 수도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회사의 고위직이나 정부의 고급관료는 모두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여성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것이다. 법적인 차별 장치는 거의 제거된 것 같지만, 문화·의식적 장치들이 여성들을 여전히 옥죄고 있다. 전통적 사회 특유의 남근(男根)주의는 우리의 문화유전자를 통해 우리 정신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법적 장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은밀한 구조까지도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먼저, 언어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언어는 여성억압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언어는 우리의 의식과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컨대 의사와 교수 등 전문직은 남성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의사와 여자 교수는 생소하다. 그래서 여자가 의사이거나 교수인 경우에는 '여'의사 '여'교수 이런 식으로 부른다. 일반적 경우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언어가 이처럼 현실을 반영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사회를 재창조함에 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남성 중심적 언어뿐만(여교수, 여의사와 같은) 아니라 남녀공학 남녀칠세부동석처럼 '남녀'(여남이 아니라)라는 말은 남성 중심 사회를 구축하는 데 적지 않게 이바지 하고 있다. 남아사상·대한남아·대한건아 라는 남자를 우위에 두는 말들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허무맹랑한 말들이 아직도 살아서 현대인의 의식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매체의 힘도 어마어마하다. 일반적으로 매체는 권력과 암묵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결탁하게 되어 있다. 매체는 프롤레타리아보다는 부르주아의, 약자보다는 강자의, 여자보다는 남자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매체 권력을 지배한 자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므로 이는 당연한 귀결(歸結)일 것이다. 매체도 언어처럼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변형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드라마는 남자에게는 남성성을, 여자에게는 여성성을 불어 넣음으로써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을 조장한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는 '젠더'에 의해 생물학적 본능보다 더 와일드하고 여자는 더 다소곳한데, 매체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의 성에만 몰아넣음으로써 이를 더 공고히 한다. 드라마 속 남성은 일반적으로 사려 깊고 관용적이며 근엄한 반면, 왜 여성은 질투하고 시기하는 모습만 보이는가! 과거 서양이 갖고 있던 동양에 대한 관점, 즉 '오리엔탈리즘'을 연상케 하는 낡고 케케묵은 수법이다. (우수개 소리지만, 마초들이 이런 케케묽은 수법 말고 좀 더 세련된 ‘여성 억압의 도구’를 들고 나올 날을 기다려 본다.)

언어와 미디어 말고 다른 관습적 측면도 있다. 여자는 사적인 일을 해야 하며 남자가 공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습이 아직까지 전해오고 있다. 가사와 양육은 여자가 전담해야 하는 것이며 여자는 공적인 것보다는 가정 일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식이 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공과 사가 남자와 여자의 이분법적 분업의 의식과 제도로 강제되고 있다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깨뜨릴 필요가 있다. 즉 남자는 조금 더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

여성학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거시적 틀에서뿐만 아니라 미시적 틀에서도 억압의 냄새를 맡는다. 내가 아는 한 여성학자는 지하철 선반이 높은 것과 보도블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계단의 높이 등 사소한 것에서도 여성 억압을 본다. 저자도 골수 페미니스트답게 사소한 것에서도 여성을 억압하려는 흔적을 찾아낸다. 혼인빙자간음죄는(이하 혼빙) 여성의 순결을 겁탈한 한량을 처벌하는 법이므로 여성을 보호하는 법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인데, 저자는 혼빙이 여성 억압의 도구 또는 결과물로 간주한다. 혼빙은 여성의 ‘순결’이 지켜져야 하는 대상임을 가정한 법이므로 여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신들은 음탕하게 생활하면서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는 이중규범을 들이대는 포악한 남자들의 욕망이 듬뿍 반영된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조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화낭년’ 소리를 듣고 ‘더러운 년’ 취급을 받는다. 가수 백지영 씨나 황수정 씨가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은 그들이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이 속박의 굴레로부터 나갔기 때문이다. 백지영 씨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과 찍었던 섹스비디오가 그 남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세상에 공개되었으므로 엄연히 피해자인데 죄인 취급을 받았으며, 황수정 씨는 마약을 최음제로 알고 먹었는데도 -위법이 아님에도- 여론과 언론에 몰매를 맞고 사회에서 (거의) 매장되었다. 이는 여성은 성적으로 밝히면 안 되고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남성 중심주의를 벗어난 자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던 셈이다.

남자는 이런 방법으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여자들을 타도했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는 ‘더러운 년’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림으로써. 똑똑한 여자도 남자의 적이다. 근대가 도래함에 따라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 중에서는 공부로 성공한 여성들도 많다. 보통 드라마에서 안경 낀 여자로 표상되는 여성들 말이다. 이런 여자들은 똑똑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다루기 골치 아프다. 그래서 편하게 처치해 버린다. 드라마에서 (그리고 현실에서도) 똑똑한 여자는 뭔가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따지는 거 좋아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성으로. 이런 편견은 사회를 지배하고, 앞서 언급한 '화랑년' 코드와 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무릎 꿇린다.

(여담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뒤 짚어 씌우기’는 욕할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여성들도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남성들을 딱지 붙이니 말이다. 돈 못 버는 남자는 무능력한 남자(정작 자기들도 못 벌면서), 데이트 할 때 돈 안 쓰는 남자는 쫀쫀한 남자(자기들은 더 안 쓰면서)로 딱지붙임으로써 자신들 나름의 방식으로 - 남성들과 비슷한 방식 - 연대하고 있다.

이런 방법보다는 지금보다 더 급진적이고 공격적으로 공적 영역에 나아가 남성주의에 ‘제대로’ 도전해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얌전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한 번 거칠게 공적인 장으로 나가 권력을 틀어 쥐어보는 게 어떨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모두의 단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남성 우월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가 좀 더 힘내기를 바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단지 고추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성의 희생에 기생하여 온갖 부당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부끄러운‘ 수혜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보이는 것이다. 여성운동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마초근성·남근주의를 드러내지 말고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책의 내용대로 여성주의가 남성도 살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여성이 여성성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남성도 남성성의 굴레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부여한 남성성을 감당하지 못 하여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대다수의 남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통적인 관점에서 남성은 강해야 하는 데 실제 남성은 정치·경제·육체적으로 강하지 않으니 알게 모르게 괴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괴리를 해체시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 페미니트스들의 주장대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허물어야 한다. 결국에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으로 귀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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