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나의 목소리가 불편할 수 있어요. 아직은.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당신에게는 나의 목소리가 불편할 수 있어요. 아직은.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최종은
창문 없는 고시원에 이사를 간 친구에게 식물을 선물해주었다. 친구는 종종 식물이 잘 커가고 있노라 안부를 전해오곤 했다. 그래도 햇빛 없이 자라는 식물이 내심 신경 쓰여 옥상에 올려놓았는데, 어느 날 보니 실내에서 잘 자라던 식물에는 잎 한 장만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상심한 친구는 식물을 다시 살리겠노라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이 식물은 음지식물이라 옥상에서 햇빛을 받는 환경이 오히려 식물에게 악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연히 식물에게 있어 햇빛은 절대적 존재일 것이라는 사고는 '양지식물' 삶의 방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획일적인 일반화에 의해 옥상에 놓인 음지식물은 한동안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모든 식물은 햇빛 밑에 두어야 잘 자란다고 당연시 여겼던 사고와 그를 기반으로 형성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수많은 음지식물을 배제시킨 셈이다. 음지식물 일화는 새삼 세상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으며 한 개체에 대해 절대적인 조재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렇게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반으로 그 틀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대상들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며 살아간다. 여대생의 애인은 모두 남자친구임을 당연시 여기는 이성애 중심적 사고는 여자를 사귀고 있는 여대생의 경험을 자연스레 배제하고 있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버젓이 그려져 있는 휠체어를 타 장애인 그림은 장애인들 사이의 차이를 자연스레 배제하고 있다. 우리는 지극히 자연스런 사고를 기반으로 형성된 언어를 내뱉는 순간 매우 손쉽게 자신이 겪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주변부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며 무시한다. 다수는 자신들이 자연스레 생각하는 사고와 지금껏 사용하던 언어로 소수를 쉽게 배제하나, 소수는 다수에게 자신들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고 인정받아야하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상처를 규명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갖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사유하지 않음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이는 폭력이 된다.
작가는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주의란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상대화 시켜, 여자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가 형성될 수 없는, 가능성이 없는 사회이다. 여성주의는 남성만을 인식의 주체로 형성된 기존의 언어, 담론의 형성 구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차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와 경계에서 나타나는 인식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한다.
작가는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 당하는 자가 있다.'고 말한다. 언어는 누군가의 가치와 경험을 기반으로 정립되는 것이며, 언어가 정립되는 순간 언어의 기준이 되는 가치와는 다른 다양한 가치들이 배제되어 버린다. 기준을 정립하고 이에 가치를 부여 하는 것은 특정 가치를 추구 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사고이며, 이것이 언어를 통해 정립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경험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부여받은 정당성을 기반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가치와 경험에 순응 할 것을 강요하며, 자신들의 가치와 권력기반을 유지하게 된다. 언어의 정립을 통해 가치관과 경험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형성되는 것이다. 언어를 통한 지배 메커니즘은 구성원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사적인 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그 사회를 지속하기 위해 만든 지배 메커니즘은 언어를 통해 개인에게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
지은이는 우리의 일상 언어, 인식, 그리고 이슈화된 논쟁들의 기반에 얼마나 깊숙이 가부장제사고가 내재되어 있는지를 고발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언어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아버지 사회의 모순점을 찾아낸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젠더, 나이주의, 성매매, 군대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사회의 일상에 만연해있는 가부장제 사고가 어떤 식으로 논쟁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언어와 시각을 펼쳐 보인다. 가부장제 내에서 젠더와 나이는 자연스럽고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만 같은 생물학적인 차이를 기반으로 차별에 대한 위계화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젠더와 나이가 해석되는 논리를 살펴보다보면 모순이 발견된다. 젠더와 나이주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별이 생물학적이라는 차이로 둔갑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실상은 그렇게 믿어지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이고 사소하다고 인식되었던 사고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 맥락을 짚어보게 된다. 가부장제사회는 여성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모성애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개념과, 인간의 범주에서 여성을 제외하려는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냈다. 모성애의 발명은 가부장제의 놀라운 발견물이며, 가부장제 내에서 모성애 작동원리에 대한 통찰은 지은이의 놀라운 발견이라고 생각된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로서 그들을 위해 돌봄 노동을 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남성들은 행위자로서 이동성, 자유, 초월성을 갖고 자신들을 인식하지만 여성은 남성들이 개척하고 의미를 발견해주어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될 뿐이다.
이 책의 장점은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사고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편으론 독자로 하여금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여성주의 특유의 불편함으로 지적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불편함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경험 차이가 독자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여성주의 언어는 각자의 경험이 공유되지 못할 때마다 그 힘을 잃게 된다. 여성주의는 자신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로 여겨 개별 경험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여성주의의 특성상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언어를 형성하다 보면 독자도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텍스트를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법, 정치, 노동, 사회, 인종, 빈곤 등과 같이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을 공부할 때는 그런가보다 하다가도 경험을 기반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유도하는 여성주의에서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충실한 독자가 되어 일상의 경험을 대입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독자와 글쓴이사이의 경험적 괴리는 독자로 하여금 작위적인 느낌과 불편한 느낌을 준다. 경험을 기반으로 언어를 형성하는 여성주의의 언어는 양날의 검이다. 여성주의 언어는 일상에 침투된 가부장제를 정치적인 영역으로 끌어내어 폭로하는 데는 유용하나, 각자의 경험이 공유되지 못할 때마다 힘을 잃게 된다.
둘째는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감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알겠으나 부적절한 비유 등의 과한 표현은 불편함을 유발한다. 예로 남자와 여자를 늑대와 여우라고 비유하는 기존의 이론을 기반으로 늑대와 여우의 성행위가 오히려 비정상적이라는 해석을 들 수 있다. 이성애중심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부적절한 비유로 인해, 말 하고자 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의 거리가 생겼다. 이는 독자에게 불편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또한 '어머니를 죽인다'와 같은 표현은 사회에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선(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선) 가부장제의 남성권력이 여자에게 준 역할을 벗어나야만 하는 딸들의 고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부모를 죽인다는 언어가 독자 각자에게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는 천차만별이기에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꼽히는 불편함은 여성주의가 피해를 너무나 강하게 표현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가부장제 하에서 어머니들의 눈물어린 희생과 성매매와 성폭력에 대한 피해는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도 하겠으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억압받고 피해를 받는 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그러나 여성주의가 사회에 다양한 목소리를 존재케 한다는 역할을 고려한다면 여성주의에서 피해에 대한 강한 분노 표출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성주의는 소수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택하도록 하며,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준다. 소수는 자연스레 존재하고 있으나 다수에 의해 당연시 배제되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다수가 당연시 생각하는 사고와 그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언어라는 그 거대한 구조 앞에서 개인은 나약하게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고 배제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은 여성주의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그 과정에서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그들은 화가 났기 때문에 그들의 표현은 부드럽게 가다듬어 질수 없다. 여성주의가 항상 과격할 필요는 없지만 여성주의란 공간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는 소수자에게 부드러울 것을 권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모순이자 억압이며 폭력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포괄하기 위해선 부드럽게 일상도 감싸야 하나, 본래 여성주의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과격함 역시 여성주의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이다. 여성주의 내의 과격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분노가 표출되는 소수자의 격한 목소리가 아직은 배제와 차별을 절실하게 경험하지 않은 그래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분노를 경험하지 못한 주류의 사람들에게 불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아직 경험을 해 보지 못한 감정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다. 만약 당신에게 여성주의의 과격함이 마냥 불편하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편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배제와 그로 인한 절실한 분노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여성주의의 과격함이 마냥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이 어느 순간 불편함을 느끼고 거대한 다수의 앞에서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방황하게 된다면, 그래서 어느 영역에서든 소수자의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면 여성주의의 과격함과 그 속에 내포된 분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딱히 권하고 싶지는 않은, 그러나 살다보면 언젠가는 겪게 될 다수에 의한 배제의 경험으로 당신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남다른 시각 그리고 특유의 민감성을 얻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땐 불편해 보이기만 하던 여성주의내 과격함의 근원인 분노를 분출하며 그 속에서 위로와 안식을 얻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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