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외로운 ‘청춘’에서 분노하는 ‘청년’으로
일반부문 3등작
아프고 외로운 ‘청춘’에서 분노하는 ‘청년’으로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김도민
‘애완의 시대’의 아프고 외로운 ‘청춘’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공간에, 조그마한 강아지들이 눈부신 불빛 아래 칸칸이 진열중이다. 그 유리벽 한켠에 ‘종·성별·판매가’ 등 자신의 ‘스펙’이 자세히 적혀 있다. 잘 관리된 털은 반짝거리고, 마치 자신을 ‘선택’해달라는 듯이 투명한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미래의 주인’을 향해 반가워하며 다가가다 유리벽에 부딪힌다. 이처럼 투명한 진열장에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드러내놓은 애완견들같이, 취업을 앞둔 청년들은 외국어학원과 정형외과, ‘감정코치’학원을 전전하며 능력과 외모 심지어 감정의 ‘사회적 표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가꾼다. 제품의 부품과 기능 같은 세부사항을 뜻하는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의 줄임말이던 스펙(spec)이 언제부터인가 출신학교와 학점, 토익점수, 해외연수, 인턴경험 유무 등을 종합하는 취업준비생들의 필수어휘가 되었으며, 이러한 ‘스펙 열풍’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거대한 ‘자기계발’ 광풍(狂風)으로 이어졌다.
이 광풍은 최근 다양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에서 선연히 드러난다. 투명한 진열장의 애완견처럼 자신의 내밀한 ‘과거’까지 심사위원뿐 아니라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 전국의 집안 곳곳에 ‘날것’으로 전달된다. 물론 때로는 「위대한 탄생」이라는 MBC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처럼 훌륭한 멘토를 만나는 ‘대박’이 찾아온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해내는 희열을 느끼며 ‘인생역전’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1등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형 프로그램 설정상 나머지 전부는 떨어져야 하고, ‘재판관’인 멘토의 말 한마디에 참가자들은 자기계발의 희열보다 불안감을 더 느끼는 듯하다.
주인의 ‘사랑’을 애원하는 애완동물처럼 자본에 ‘간택’되기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이 ‘애완의 시대’에는 거대한 구조적 실업과 낙오 같은 불안과 공포가 드리워져 있다. 그 현실이 너무도 처참해서일까? 외려 한국사회에는 ‘행복과 긍정’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행복학 강의가 흔해졌으며, 누구든지 마음만 긍정적으로 바꿔먹으면 손쉽게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공유한다. 『시크릿』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같은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1, 2위를 다투는 사회. 회사에서 해고되어 실업에 빠지더라도, 자신을 해고한 회사의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실업수당이 왜 이리 적으냐며 국가실업정책을 비판하기보다, 부단히 ‘또다른 치즈’를 찾아 자기계발하기 바쁜 우리들. 긍정적 사고라는 ‘만병통치약’을 복용하기만 하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가 도래한 듯하다.
최근에는 돈과 성공에만 몰두하라는 물신주의적 ‘자기계발서’의 직설을 넘어 더욱 감성적이며 세련되게 진화한 새로운 자기계발서가 한국에서 ‘청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작년 12월에 출간되어 “한국출판사상 최단기 100만부 돌파했으며, 중국·일본·이탈리아 등 7개국에까지 수출하는” 초특급 베스트셀러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청춘 독자들은 이 책에서 나름의 ‘위로’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어느 순간부터 대학생은 ‘인생 앞에 홀로 선’ 고독한 청춘이 되어버렸다. 기성세대는 청춘을 향해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한국사회의 ‘주인’이 되었고 대학생들은 그들의 위로와 관심을 목매여 바라는 ‘애완동물’이 되어버렸다. 애견숍의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공간에 진열된 조그마한 강아지들은 ‘관리자’의 따사로운 쓰다듬음에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조그마한 애완숍의 진열장에 칸칸이 갇힌 ‘청춘들은’ 고독하게 주인의 선택과 위로에 목매여 한다. 이처럼 섬세하고도 달콤한 애완의 시대를 넘기 위해, 아프고 외로운 ‘청춘’들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분노하는 ‘청년’의 도래를 꿈꾸며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93세. 이제 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 같다. 세상을 하직할 날이 멀지 않았다”라며 생의 끝자락에서 ‘분노하라’는 절절한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프랑스에서 “2008년 실시된 개혁”은 “어떤 차별도 없이 ‘프랑스의 모든 어린이가 가장 발전된 교육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레지스탕스의 이 생각에 역행하는 내용”이라며 그는 분노했다. 1945년 이후 활동한 전국의 레지스탕스 평의회는 사회보장제도의 확립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등을 프랑스사회에 구축해냈으나 최근 이런 제도들이 하나둘 무너지는 현실을 비판하며 사자후(獅子吼)를 내뿜는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 20여 나라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고 있는 저자의 외침은 한국사회에도 예외가 아닐 듯하다. 저자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분노의 이유가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덜 확실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것일 수도 있다. 누가 명령하며,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흐름들을 샅샅이 구분한다는 것이 늘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 군부독재 같은 명확한 적이 존재할 때는 그 ‘군주’에 저항하기 위해 헤쳐모이면 됐다. 1970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선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살겠다 갈아 보자”처럼 확실한 적을 없애기만 하면 됐다. 90년대 이후 양극화는 갈수록 극심해졌지만 누구를 ‘갈아치워야’ 이런 문제가 해결될지 저항의 표적이 불명확한 시대가 도래했다. 따라서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개인적 ‘안위’와 ‘성공’이라는 ‘자기계발’에만 집중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분노의 대상과 이유가 불분명해진 지금-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저자는 자신만의 또렷한 ‘분노법(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제15항을 인용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개인은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제22항도.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 각국의 조직과 경제적 형편을 감안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성의 자유로운 계발에 필수불가결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의 충족을 성취함을 근간으로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선배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세계인권선언 작성에 참여했던 현장활동가이던 저자의 경험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분노의 기준과 방법론들이다. 즉 평등과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확고히 믿으며 이를 지켜내기 위해 비폭력적 수단으로 저항하기를 저자는 주문한다. 이는 저자의 역사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939년 파리 윌름 거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철학자 헤겔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며 “낙관적 성향을 타고난” 저자는, “헤겔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했으며 여기서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며 “수많은 사회들의 역사는 좀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여 종국에는 인간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됨으로써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국가를 갖게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벤야민처럼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라는 비관적·부정적 역사관과 거리를 둔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에 대고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질 당시 세계인의 인권을 위한 선언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음험한’ 태생적 한계가 있을지 모르며, 역사의 진보를 너무 ‘확신’하다가는 쉽게 ‘좌절’하여 쉬이 ‘변절자’가 되거나 ‘투항’해버리는 불편한 선례들이 많은 것을 지적하기에는, 실천가이자 하나의 ‘선언문’ 형식인 저자의 ‘유언장’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하다. 여기서는 저자가 제시한 ‘분노의 문법’과 다른 저항의 문법을 좀더 발전적으로 모색해보자.
돌이켜보면 한국사회만큼 ‘분노’로 들끓어온 시공간도 없을 것이다. 한국현대사를 수놓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아래로부터 응집된 분노의 표출이었고 이것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였다. 단정수립을 반대하던 제주4.3과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한 4.19,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 군부독재에 항거한 5.18민주화운동, 6.10항쟁뿐 아니라 몇 년 전 광우병 관련 촛불항쟁과 최근의 반값 등록금 촛불저항까지. 우리는 분노할 줄 알았고 그 분노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직접 써왔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의 문법’이 2008년 촛불항쟁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변혁에서 ‘누룩’의 역할을 해온 학생운동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90년대까지 학생운동은 주로 ‘핏빛’의 조명과 강한 음악, 절도있고 획일화된 몸짓의 향연이었다. 그러나 2011년 6월 서울대 법인화 반대를 외치며 대학본부 전체를 점거하면서 펼쳐진 서울대 학생들의 모습에는 새로운 저항문법들이 가득했다.
과거에는 총장실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혹시나 있을 침투에 대비해 마스크를 쓴 ‘특공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이중 삼중으로 총장실만을 사수하기 위해 총학생회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 서울대 학생운동에서는 바리케이드 대신 대학본부 자체를 점거했으며 학생업무를 보게끔 대학측에 ‘편의’까지 제공했다. 점거한 대학본부를 세미나실이나 중앙도서관으로 활용하자거나, 자신만의 ‘대자보’를 벽에 붙이거나, 소속 없이 홀로 온 ‘원자’들을 위한 공간제공 등 새로운 저항문법들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인간의 해방과 자유’ 같은 거창한 구호 대신 뮤직비디오 「이태원 프리덤」을 패러디한 ‘총장실 프리덤’이라는 동영상을 통해, 이들은 총장실 자체를 ‘프리덤’(freedom)의 공간으로 탈바꿈해버렸을 뿐 아니라 ‘자유’의 의미도 더욱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저항법에서 우리는 ‘이중적 탈권위주의’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학본부와 총장에 대한 ‘대듦’은, 한국사 면면히 이어져온 학생운동의 연장으로서 ‘외부의 권위주의’에 저항한 탈권위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거나 학과선배를 따라 길거리로 뛰쳐나간 것이 아니라, 인터넷 등으로 서울대 법인화의 문제를 스스로 공부하고 자신의 ‘분노’를 자발적으로 표출한다는 면에서 ‘내부적 권위주의’를 벗어난 탈권위주의 운동이었다. 물론 이 탈권위주의적 저항은 자칫 별다른 응집력 없이, ‘모래알’처럼 쉬이 흩어질 듯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새로운 탈권위주의적 신(新) 저항법은, 누구의 권위주의에 종속되어 따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저항할 뿐이기 때문에 쉬이 흩어질 듯하면서도 또다시 ‘자발적으로’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연대와 저항의 흐름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에 도래한 새로운 이중의 탈권위주의적 저항법이 한국사회에 더욱 퍼져나가길 바라며 이러한 신 저항문법을 저자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해주고 싶다.
지금-여기의 20대는 심각한 청년실업과 살인적인 대학등록금에 시달리면서도 갈수록 희박해지는 ‘성공’이라는 희망고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이들에게 세상은 성공전략을 위한 자기계발의 테크닉 혹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면서 ‘청년’들은 어느 새 위로받아야 수동적인 ‘청춘’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젊은이는 ‘청춘(靑春)’이기에 앞서 ‘청년(靑年)’이었을지 모른다.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푸르른 봄날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청춘’이기 이전에,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혁의 주체인 ‘청년’이었다. 3.1운동 때의 중고생과 4.19와 6.10항쟁 때 민주주의를 위해 변혁의 맨 앞에 섰던 존재가 바로 대학생 혹은 청년이었다. 이렇게 시대를 바꾸어온 변혁의 주체들은 위로받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70~80년대는 한국경제가 성장기였기 때문에 취업의 걱정이 부재했으며 대학생 간의 지금 같은 치열한 스펙경쟁이 불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학생들은 청년이라는 세대적 응집력을 가지고 세계를 항해 몸을 던졌고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세상을 바꿔나갔다. 외롭고 아픈 한국의 ‘청춘’들이, 당당하게 연대하여 이 ‘애완의 시대’를 향해 당당히 분노하는 새로운 ‘청년시대’의 도래를 노(老)투사 스테판 에셀도 꿈꾸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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