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끓어오르는 분노가 더욱 타오르기를 바라며

새내기부문 3등작

조금씩 끓어오르는 분노가 더욱 타오르기를 바라며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김시은


혁명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혁명과 투쟁들이 우리 현대사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간 과거는 그 당시 그대로 영원히 고정된다. 그러나 또한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과거가 끊임없이 바뀌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가 계속해서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바꾸는 것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상황에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우리는 인식해야하며, 어떻게 우리는 계승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질문의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노(老) 레지스탕스의 호소인 『분노하라』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이라는 두 대학생의 피로 시작된 6월 항쟁은 수십 년간 지속된 군사 독재를 마감하고 제헌헌법부터 규정되어 있던 진정한 ‘민주 공화국’을 실현하는 첫 단추가 되었다.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는, 권위적이고 폐쇄적이던 군사정권의 잔재에서 벗어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민주화’를 구현하기위한 여정에 돌입했다. 과거의 잔재들이 켜켜이 쌓인 상황에서, 느리면서도 급격하게 사회는 변화했고 현재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현 정권의 문제에 대해선 차치하고, 우리는 6월 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구현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한다. 민주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 오른 것도 아니다. 바로 민중들이 독재정권의 횡포와 국민에 대한 억압과 탄압에 대해 분개하고 분노하였기 때문이다. 즉 민중들의 단합된 분노가 ‘민주’국가의 ‘절대’권력인 독재 정권을 종식시킨 것이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얻어낸 값진 민주화는 제한된 민주화였음이 여실히 들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1987년 이래 절차적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민주화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러한 비민주적인 부분들에서도 민주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절실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떠한 상황 때문에 아직도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민주화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많은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우선 대학생의 상황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현재 대학생들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극한 경쟁’이다. 대학 입시를 통해 소위 명문대에 학생이 되던, 삼류대 학생이 되던 모두 경쟁하기는 매한가지다. 사회적으로 희소한 가치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회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경쟁은 사회 발전과 통합을 저해하는 무의미할 정도의 극한 경쟁이다. 한번 경쟁에서 낙오하면 ‘패자부활전’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거나 아예 없기에 더욱 경쟁은 치열해진다. 이러한 대학생과 청년들의 팍팍한 삶은 언론을 통해서 또 주변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TV 다큐멘터리에서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 젊음을 담보 삼아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시에 열중하는 노량진에서의 청년들의 사투가 소개되고, 중산층마저도 감당하기 어려워진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24시간 아르바이트해야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의 절규가 보도된다. 그리고 더 좋은 기업에 자신을 ‘판매’하기 위해, 수많은 경력과 자격증 등의 소위 ‘스펙’을 쌓느라 대학생들은 혈안이 되어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는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선 왜 대학생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과거 대학생들이 누렸던 낭만은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나. 스펙을 쌓는 것은 소위 좋은 직장으로 통하는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함이다. 왜 대기업에 그렇게 취직하려 하는가. 그것은 대기업으로 상징되는 재벌에 우리 사회의 모든 부와 그로 비롯하는 금권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모든 금권을 장악한 재벌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의 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교적 높은 연봉에, 사내 복지가 잘 갖춰져 있는 대기업을 선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분노하라』에서도 지적하듯,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정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재벌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그 재벌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무의미한 스펙경쟁에 여념이 없다.

한편 왜 노량진에서 젊음을 희생하면서 공무원이 되려 하는가. 그것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입은 적을 지라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 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IMF 이후 비교적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감소하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만 효율성과 경쟁력의 제고라는 미명하게 늘어나면서 시민들은 불안정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불안감의 발로가 공무원에 대한 선호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의 부재와 안정적 일자리의 부족은 대학생들의 낭만을 앗아갔다. 또한 청년들이 연애나 결혼을 할 엄두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더불어 부부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육과 교육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를 보완해 줄 사회보장제도의 부재를 알기에, 출산을 기피하게 하고 이는 장래 한국 사회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절실한 요구는 과거에는 ‘빨갱이’로, 현재는 ‘포퓰리즘’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또한 현 정권을 위시한 보수 세력들은 ‘아직 우리 경제력으로 복지를 시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또는 ‘전면적인 복지의 시행은 복지병만 낳을 뿐’이라면서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상황은 아직 한국의 민주화가 미완의 민주화임을 다시 한 번 말해줄 뿐이다.

이제 현재의 한국이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이유가 무엇이며 이 난국을 타계할 방법은 또 무엇인지 고민해야한다. 문제의 원인이 곧 해결방법이기에 답은 명백하다.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의 무관심이 현 난국의 원인이다. 시민들이 무관심하다고 해서 시민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에서 알 수 있듯,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강남지역의 투표율은 높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민들이 많은 몇몇 다른 지역에서는 투표율이 낮음을 알 수 있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하고 오늘 벌지 못하면 내일은 길거리에 나앉아야하는 많은 서민들에게 투표하는 것 즉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큰 ‘사치’일 것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 늦게 퇴근해야 끼니를 이을 수 있는 대부분의 서민들에겐 투표장에 가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야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즉 시민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주인인 시민들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의 사회 구조와 제도가 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문제가 있는 그 구조와 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은 결국 시민들에게서만 나온다. 강남지역의 소위 ‘계급투표’ 자체는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선거 풍토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비강남 지역에서도 ‘계급투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대다수의 시민들은 현재와 같은 팍팍한 삶에서,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사회 기득권층, 특권층과 야합한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겐 ‘표’가 곧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대학생들에게는 더욱 무거운, 무관심의 책임이 있다. ‘청년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이야기하는 격언일 것인데, 현재의 청년-일반적으로는 대학생-들은 무엇을 했는가. 대학생들은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움직였노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은 이 사회의 피해자일 뿐, 자신들의 고통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나라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이 모두 기성세대들과 사회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현실은 냉혹하다.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야하고, 움직임을 만들어야하고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자세는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자세에 불과하다. 현재의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술자리에서는 대기업 취직하기 어렵다고, 그 많고 어려운 ‘스펙’따기 어렵다고, 목숨을 걸어야하는 이 경쟁사회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투표일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민해야한다. 대학생들은 아무런 권력도 없는 집단이 아니다. 이들에겐 여러 가지 무기가 있지만, 합법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무기로 투표권이 있다. 투표라는 좋은 무기를 망각한 채 세상에 대해 ‘투정’만 부리고 있는 상황에선 대학생들은 영원히 경쟁사회의 희생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상적인 주장으로, 공허한 외침으로까지 들릴 말이지만 정치인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부당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시민들의 ‘분노’이다. 그 분노가 제일 쉽게 표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거이다.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면 비웃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어떻게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몽상에 불과하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생들은 이런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야한다. 선배 청년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보아야한다. 4.19 혁명, 6월 항쟁 그 외의 많은 민주화 투쟁에서 청년 대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투쟁했는가를 알아야한다. 그들에겐 투표권마저 주어져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거리로 나아갔다. 하지만 선배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현재의 청년 대학생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 무기를 얻기 위해 피 흘린 선배들의 역사를 망각하면서 무기의 소중함과 능력 역시 망각되었다. 청년 대학생들이 현실에 무관심해지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 발버둥 칠수록, 현실은 그들에게 더욱 냉혹하고 격렬한 생존경쟁을 요구할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근래에 보이는 청년들의 움직임이다. 반값등록금 투쟁이나 이번 10.26 서울시장보궐선거에서 청년 대학생들은 과거의 무관심 일변도의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 그 움직임이 대학생 전체의 움직임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라도 무관심에서 벗어나 분노를 사회변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연결시켰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선배들의 치열한 투쟁을 기억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고 투표로써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낸다면, 대학생들의 목소리는 사회에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정치권에서 청년들의 고통과 시름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에는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한몫을 담당한다. 청년들이, 대학생들이 꾸준히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투표로써 요구 사항을 주장한다면 언젠가 그 요구가 이루어진다. 폭력적인 방식인 혁명이나 시위와는 다르게 비폭력적인 방식인 투표로는 고질적인 사회 문제들이 빠른 시일 내에 바뀌긴 어렵다. 하지만 비폭력이 가지는 힘은 폭력을 능가한다. 조용히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회에 정치에 대학생들이 관심을 가진다면 사회의 큰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반값등록금 투쟁으로, 10.26 보궐선거에서 보이는 대학생들의,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바라보며, 청년 대학생들이 과거의 투쟁들을 귀감으로 삼아,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가 더욱 세차게 타올라 이 사회를 변화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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