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위하여(잉여는) 꿈을 꾸나.

일반부문 3등작

누구를위하여(잉여는) 꿈을 꾸나.

한윤형 외,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전상희


한 달 전쯤 라디오 음악방송 PD를 꿈꾸는 친구와 함께 안암동에 간 적이 있다. 조금은 쌀쌀한 가을 저녁이었던 그날, 그 곳에선 문화로 먹고 사는 방법에 대한 ‘독하고 리얼하지만 유쾌하고 낙관적인’ 좌담회가 열리고 있었다. 낙관적이라? 그럼 문화로 밥벌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건가. 연녹색 포스터 한 장을 보고 조금은 생경한 6호선에 몸을 실은 것은 ‘낙관적’이라는 말 한마디에 건 일말의 기대 혹은 의심 때문이었다. 선전 문구를 얼추 맞추며, ‘독하고 리얼하지만 유쾌했던’ 두어 시간이 끝나갈 무렵, 패널로 나온 어느 PD는 대안학교 졸업생이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에게 강연을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눈에 뻔히 그려지는 모습은 금의환향한 졸업생이 꿈을 가지라 이야기하며 후배들을 응원하는 모습이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미안하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다들 꿈을 잃지 말아라, 꿈은 이루어진다고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 ‘낙관적’인 문구만을 채우기를 기다리던 나는 이 어색한 결말에 잠시 멈칫했다. 이쯤에서 꿈은 이루어진다고 한 마디 멋있게 날려줬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무릎팍 도사에 나오는 그들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미래를 준비하며 땀을 흘리는 그들은, 채용공고 속 인재를 찾고 있다는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꿈을 갖고, 열정을 갖고 힘차게 노력하라 외쳤다. 열정만 갖고 노력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에 응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영화판에 뛰어들기도 했고, 프로게이머가 되기 위해 온종일 골방에 틀어박혀있기도 했고, 대학 4년 내내 온갖 스펙으로 가득 채워 자기소개서 가득가득 꿈과 열정을 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약속 혹은 계약은 성사되었어야 했다. 젊은이들은 꿈과 열정을 원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약속된 상품을 내보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매우 높다’고 독하고 리얼하게 말한다.

사회비평가 한윤형, 전 딴지일보 기자 최태섭, e스포츠 칼럼니스트 김정근이 함께 만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웅진 지식하우스)』는 사회의 이러한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꿈을 이루기 어려운 현실에서 꿈을 가지라고 부추기고, 열정을 갖고 노력하라 말하면서도 꿈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음흉한 단면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몇몇 광고 장면을 통해 은근하게 혹은 직설적으로 ‘개인의 열정’을 강조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광고 방영 당시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었던 ‘젊은 날의 열정, 박카스!’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바로 징병검사장에서 시력검사표를 외우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일 것이다. 이 청년은 그 유명한 대사, “꼭! 가고싶습니다”를 힘있게 외친다. 젊고 순수한 청년의 이 우렁찬 한마디에 우리는 ‘젊고 순수하고 열정이 있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는다. 하지만 이 한마디가 안보, 조직문화, 젠더 등 수많은 문제가 얽혀있는 한국 사회의 군대 문제를 참 단순하고 명쾌하게도 ‘젊은이의 패기와 열정’으로 단칼에 해결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시리즈로는 외국 거래처와의 통화를 위해 야근을 불사르는 회사원이 같은 처지의 옆 건물 회사원에게 “힘냅시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기업과 고용자간의 관계, 삶의 질 등의 문제는 힘찬 응원의 말 한마디면 해결된다. 이렇듯 ‘박카스 권하는 사회’에 대해 저자는 ‘교과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네모반듯한 청년들은 현실의 청년들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표현했다. 즉 박카스 광고는 사회의 복잡한 구조 속에 얽혀 있는 문제를 모두 ‘개인의 열정’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인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열정이 없으면, 화면 속에 웃고 있는 저 순수한 청년과 참한 아가씨와 동일 선상에 놓이지 못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군대는 가기 싫고, 야근도 하기 싫고, 중소기업에 가기 싫다고 불평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고, 더 나아가 이를 구조적으로 논할 기회를 박탈 당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사회의 주입식 열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열정이라는 말이 난립하고 있는 자기계발서들에는 ‘스무살, ~에 미쳐라’ 따위의 ‘미치는’ 방법까지 친절히 안내해주고 있다. 또한 ‘당신의 토요일이 궁금하다’는 어느 기업의 채용공고는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학점, 영어실력, 외국경험, 자격증 등과 함께 열정이 담긴 자신만의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다. 평범한 우리는 설 곳이 없다.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도록 열정을 다해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열정이 어느새 착취의 언어가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열정을 측정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자기계발을 해서 열정의 측정치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계발을 하고, 열정을 다해 뛰게 만든 젊은이들은 사회의 응원에 부흥해 프로게이머를 꿈꾸었고, 연예인을 꿈꾸었고 영화나 문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각본처럼, 상위 소수 몇 %만을 제외하곤 빛나는 미래는커녕, 그야말로 밥벌이를 면할 소득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일례로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는 생활고와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열정을 다 받쳐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던지는 사회의 한마디이다. ‘너희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잖아.’ 이러한 인식은 노동자 스스로도 내면화하여 ‘어차피 다른 일을 해도 돈을 벌지 못할 바에는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며 사회구조를 그대로 순응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효율적인 구조가 없다. 스스로 알아서 스펙을 쌓고, 스스로 알아서 낮은 봉급 현실을 자신의 열정적 꿈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요소로 승화시키니 말이다.

한 때 디지털 강국의 열풍이 불어 우후죽순 생겨났던 IT업체의 노동자들과, 이른바 ‘언론고시’를 통해 언론사에 가려 하는 수많은 지망자들, 잘생긴 재벌과 연애하는 삼순이 덕에 인기몰이한 제빵 직종 노동자, 세상을 바꾸는 신념을 일한다는 시민단체 노동자들 등 저자는 곳곳의 열정 노동자들의 현장을 되짚는다. 이들 모두는 열정을 갖고 자신의 일에 헌신하나, 처한 현실은 고 최고은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자부심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라고 언급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라는 단어는 일종의 낮은 사회, 경제적 위상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로 불리기를 거부하여 이들은 전문가, 아티스트, 사장님(직원은 자기자신뿐이더라도) 등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불리기를 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정노동의 착취구조는 더욱 쉽게 모습을 위장한다. 노동자가 없으니 노동 착취는 성립될 수 없고, 모두가 자신의 열정과 숭고한 희생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노동의 투입을 극대화하되 비용을 최대로 절감하고자 하는 사회의 노력은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빛을 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소수의 우승자에게만 기나긴 일정의 대한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오디션에 나서 자신의 열정을 뽐낸다. 그 과정에서 참가자간 끊임없이 경쟁하며, 경계의 화살은 오디션을 주최한 사람이 아닌 함께 오디션을 참가한 동료에게 돌려진다. 떨어지더라도 자신이 투자한 노력과 시간, 돈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대가로 스스로 받아들인다. 혹자는 ‘더욱 큰 것을 얻어간다’도 말하니, 주최자 입장에선 투입 없이 산출만 뽑아낼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다. 단지 주최자가 해야 할 것은 소수의 최종 우승자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꿈꾸며 도전하라고 부추기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회 인식과 관련하여 함께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분석한 ‘잉여’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잉여’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의 상태를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잉여로 부르게 된 이유로 더 이상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구조의 변화를 들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잉여’라는 단어에 담긴 사회논리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럴 의사조차 없는 시장의 무능이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리는 것에 있다. 취업과 같은 사회의 오디션에서 소수의 우승자가 되지 못한 다수의 잉여들은 스스로의 무능을 탓하며 자학한다. 앞서 다수의 자발적 경쟁구조 속에 최소의 투자로 손쉽게 이득을 취했던 오디션 주최자와 같이, 우리사회의 경제구조도 고도로 정제된 열정만을 선별하고 동시에 수많은 잉여를 생산해낸다. 물론 비난의 화살을 잉여 스스로에게 향하게 하는 뒤처리도 잊지 않는다.

잉여는 억울하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 해서 옆에 앉은 잉여와 열심히 비교해가며 열정수치를 올려놓았는데, 결국 운 좋게 뽑힌 몇 명을 제외하곤 ‘남는 인생’의 잉여를 면치 못한다. 혹은 원하는 길을 가게 될지라도 사회가 약속한 장밋빛 미래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다. “꼭 가고 싶습니다!”고 외치는 열혈 청년 앞에 나의 순수함과 열정이 작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든다. 한편으론 저 아이보다 영어점수 몇 점이 떨어지는 내 잘못인 것 같기도 하다. 아 결국 사회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꿈을 이루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싶다. 다만 정말 꿈을 이룬 소수가 눈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에 그들에게 모두 틀렸다고 항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앞서 대안학교 졸업생의 이야기를 전했던 PD는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고, 정말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인간은 될 수 있다.”. 그에게 혹은 다른 누구에게라도 한 가지 되묻고 싶다. 왜 우리는 그 ‘적어도’에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열정이 노동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만 만족하거나 사회의 책임도 스스로에게 묻는 착한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 세 명의 공동저자는 세대와 정치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 대안에 앞서 상당히 싱겁고 진부할 지라도 나는 문제를 문제라고 바라보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열정이 노동이 되어가는 과정을 파악하고, 구조의 잘못을 개인에게만 짐 지우는 상황을 인식해야 더 이상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스스로를 잉여로 부르며 절망하지도 않고, 쥐꼬리만한 봉급과 피곤에 절은 일상 속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며 위안하는 것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광고에서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외치고, 또 다른 광고에서는 ‘피로는 간 때문’이라 신나게 외치고 있다. 두통을 부를 정도의 열정이 이상화되어 그려지는 현실이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로는 개인의 간 때문이다. 어젯밤 회사의 과중한 업무와 당직과 야근으로 점철된 일상의 탓을 돌리면 우리는 열정이 부족하고, 의지가 부족한 잉여가 될 위기에 처한다. 나는 그저 두통이나 피로 없이 꿈을 꾸고 싶을 뿐이다. 죽음의 토너먼트를 뚫어야 하는 살벌한 경기에서가 아닌, 개인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노력을 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합리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미칠 듯 열정적이기 보단 ‘건강하게’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날 저녁 안암동에서 찾지 못한 ‘낙관적 밥벌이’는 잉여가 꿈꿔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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