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는 대결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는 대결
『무엇이 정의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도전하다
이택광 외, 『무엇이 정의인가』
이한빛
들어가며
한 사회의 지적 깊이는 시대정신을 둘러싼 대결을 거쳐 심화된다. 『무엇이 정의인가?』(이하 『무엇』)는 부제-“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가 표방하듯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와 대결하고자 쓰였다. 『무엇』의 저자들은 소설가, 학자, 논객 등 온갖 분야를 망라하는데, 이는 『정의』와 대결하려는 한국사회 지식인․오피니언리더들의 열망을 드러내는 듯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촛불집회를 거치며 ‘정의’는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으로 새겨진다. 2010년, 『정의』가 인문학 서적으론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것은 바로 이 시대정신의 극화였다. 이현우의 분석처럼 『정의』 열풍은 자기계발서로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채워온 한국 국민의 무의식이 변화함을 보여준다. 『정의』 열풍의 힘이었을까.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2010)와 공생발전(2011)을 정부 기조로 채택했다. 실제 정책이 스스로 천명한 기조에 부합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경쟁과 성장, 발전 일변도의 이명박 정부가 ‘공식적으로’ 꼬리를 내린 것은 분명하다.
샌델은 공화주의 혹은 공동체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을 뿐 『정의』엔 ‘정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지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 이런 『정의』가 한국의 시대정신을 확립하고, 출판계의 판도를 바꾸며 정부 정책의 기조를 뒤집었다. 일련의 흐름을 바라보며 『무엇』의 저자들이 『정의』와 대결하고자하는 것은 필연이다. 이택광은 샌델의 정의가 실체가 없듯 한국사회의 『정의』 열풍 또한 한국사회의 ‘정의 결핍’이 만들어낸 문화적 소비라 본다. 그러나 이택광은 이 실체 없는 열풍을 “허투루 넘겨 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문화적 소비란 상실을 채우는 “정치적 과잉”이기 때문이다.
정의justice라는 시대정신을 정의definition하는 대결은 바로 여기서부터 전개된다.
대결 1 : 배타적 공동체
이양수는 샌델이 한국에 정착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우려한다.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에서 자유주의 비판은 이르다는 반박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양수는 다른 전통 속에서 공화주의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우려가 제안으로 이어지는 논지는 탄탄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양수의 문제의식은 모더니티, 즉 근대성에 대한 사유와 더불어 『무엇』의 다른 필자들이 『정의』와 대결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한국에서 모더니티가 이해되는 방식은 단계론 이다. 후발국가인 한국은 선진국의 모더니티를 좇아야 한다고 규정된다. 선진국의 현재는 후진국의 미래이며 선진국에서 비선진국으로 모더니티가 확산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티 규정은 커다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근대세계체제』의 저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러한 모더니티 규정을 비판하며 ‘관계론적 접근법’을 도입한다. 월러스틴은 상이한 시간대 규정을 거부한다. 세계체제에서 동일한 모던의 시간대가 부여된다. 모던은 선진국의 모던과 비선진국의 모던으로 나뉘며 각각 중심-주변으로 분할된다. 유럽의 근대화가 비유럽을 식민지로 삼아 가능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유럽의 모던(발전)이란 비유럽의 모던(착취)과 동시에 전개되는 즉 동전의 양면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월러스틴의 시각에서 『정의』와 『무엇』의 대결로 돌아가 보자. 샌델은 미국의 정치철학자이다. 『정의』는 세계체제의 정점, 즉 선진국 모던의 정치전통을 다룬다. 한국엔 우선 자유주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기각된다. 더하여 샌델이 제시하는 공화주의적 전통의 복원 또한 ‘미국의 조건’[선진국적 조건]에만 부합할 뿐이다.
이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노정태에게서 두드러진다. 노정태는 샌델이 『정의』에서 다루는 딜레마(사례)가 “권력의 눈높이에 맞춰진 정의의 딜레마”임을 폭로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이 처한 딜레마는 세계체제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미국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접한 공리주의자,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의 반응을 고민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민간인을 향해 이죽거리며 발포하는 미군”의 공범이 된다. 장정일은 샌델의 주장과 직접 대결한다. 장정일은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배타적 애국주의와 접목됨을 지적한다. 『정의』는 공공연히 ‘미국 국민’이란 공동체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자발적으로 불법 이주민을 감시하는 트럭 노동자를 지지하고, 애국심의 강화를 위한 징병제를 긍정한다.
반주변부 국가로서 선진국의 문턱에 있는 한국에서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주변부 국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쟁점이 된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문제에 있어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제노포비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특정한 가치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배타적인 영역을 설정할 것을 요구하는 공동체주의는 이러한 폭력으로 딜레마를 해결한다.
『정의』는 단지 뛰어난 정치철학자 개인의 저작이 아니다. 『정의』는 한 세기 가까이 세계 패권을 쥐어온 미국이라는 국가가 도출한 이데올로기이다. 이양수, 노정태, 장정일은 이러한 『정의』의 배타적 공동체 설정과 대결하였다. 이 과정은 단일민족 신화가 해체된 한국이란 공동체에 이제는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대결 2 : 계급을 은폐하는 공동체
위 내용이 국가-국가를 배타적으로 구성하는 샌델의 정의론과의 대결이었다면, 두 번째 대결은 샌델이 강화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은폐하고 있는 계급을 드러내는 대결이다.
2010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건 서울시 교육감의 당선으로 시작된 ‘보편적 복지’ 논쟁은 서울시 주민투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퇴, 서울시장 재보선 선거의 야권연대, 박원순 시장 당선으로 이어진다. 바야흐로 한국의 정치구도가 ‘복지’를 축으로 새롭게 짜이고 있다. 김도균은 샌델의 정의론이 복지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음을 비판한다. 김도균은 한국 사회에서 복지라는 이슈가 핵심적인 이슈로 떠오를 것이며, 『정의』가 이 이슈에 접근하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없음을 예상한 셈이다.
샌델의 정의론이 이를 외면하는 이유는 이러한 주제들이 ‘공통의 텔로스’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도균은 민주적 시민의식 함양과 같은 정의의 문제를 한국사회에 적용하면서도 이를 복지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켜야함을 역설한다. 샌델이 ‘경제적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샌델은 공동체의 통합을 저해하는 양극화에 분명히 반대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을 뿌리로 한다. 그러나 다양한 딜레마를 던지며 도덕적 판단을 고민토록 했던 다른 문제들에 비해 명쾌하게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 경제 문제의 해결 자체가 목적이 아닌 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두고 박홍규와 최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분석하며 샌델과 대결한다. 두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본질을 정반대로 바라본다.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 돈만을 중시할 뿐 노예제, 제국주의, 차별, 반생태적 정의론의 근원이라 일갈한다. 반대로 최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며 이를 기각하는 샌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을 왜곡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바라보는 박홍규와 최원의 차이는 『정의』와 대결하며 모순적으로 결합한다. 이들은 공동체주의가 계급성을 은폐하는 형태로 공동체를 발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샌델은 공리주의/자유주의가 배태한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공동체의 미덕과 가치를 중시했다. 그러나 물질주의 비판이 오히려 계급 간의 분화와 통약불가능성을 간과해버렸다. 게다가 박홍규가 지적하듯 계급간의 차이가 은폐된 공동체에서는 돈에 의해, 즉 ‘지배계급’에 의해 정의가 구성된다.
물론 한국을 뒤흔든 ‘무상급식’이라는 사안에 대해 샌델은 선택적 복지가 야기하는 공동체의 분열을 우려하며 무상급식 실시를 지지했을 테다. 샌델은 보편적 복지의 논쟁을 직접적으로 전면화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 일단 논쟁이 벌어졌다면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자는 쪽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최원과 박홍규의 비판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무상급식이라는 사안을 칸트 식으로 모든 사안에 보편적으로 적용해보자. 노동, 환경,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학벌 등. 한국에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었을 때 분열을 우려하고 국민적 통합을 위한 희생을 강요받던 집단은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한 집단이었다. 집단의 위신이 깎인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참을 것을 요구하고, 회사가 어려울 땐 노동자를 구조조정 한다. 샌델의 정의는 공동체 내부의 소수자의 저항을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뭉개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 박홍규와 최원은 『정의』와 행한 대결은 진보와 급진성의 가치가 거세된 샌델의 정의, 이 정의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급진적 정치철학을 고민하다
『무엇』의 저자들이 샌델과 벌인 두 대결은 단일한 명제로 수렴된다. ‘급진적 정치철학’의 부재. 『정의』는 한국사회에 어떠한 진보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급진성이 거세된 한국적 조건에 『정의』는 이물감 없이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래로 이정표를 잃어버린 한국사회의 진보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 부유하고 있다. 결국 2011년 현재, 진보가 아닌 ‘민주’대연합의 깃발 아래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운동의 성과를 모두 넘기는 것이 ‘정의’로 여겨지고 있다. 야권에서 『정의』 열풍을 자신들의 기회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MB정부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그러나 어떠한 급진성도 배제하는 샌델의 정치철학은 ‘민주진영’의 이데올로기에 딱 들어맞는다.
서동진과 박가분은 이곳을 직접 공격하며 『정의』 뿐 아니라 급진성이 거세된 주류 정치철학과 대결한다. 서동진에게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의 책임이란 신자유주의적 윤리의 변형이다.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개혁이 추동되는 사례는 샌델의 정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폭로한다. 박가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사유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본과 국가가 만들어낸 억압적 장치라 본다. 이는 구성원에게 민주주의적 가치를 학습시켜야 한다는 샌델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서동진과 박가분은 각자의 분석에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요청한다. 윤리 혹은 정의란 바로 이러한 급진적인 실천의 부산물이다.
물론 서동진과 박가분의 논의는 공허하다. 아니,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 박살내자!’는 구호는 식상하다. 그러나 공허함과 식상함은 옳음의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샌델의 정치철학은 패권국가인 미국의 배타적이고 현상유지적인 정치철학이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진영은 反MB, 민주주의란 가치 아래 진보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정의』 열풍은 이 두 현상 사이의 미싱링크다.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식상한 서동진과 박가분은 이 세 고리를 연결시켜 한국사회에 급진적 정치철학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급진적 정치철학의 구체적인 모습을 새롭게 정초하는 작업은 이제 한국사회에 새롭게 주어진 과제이다.
나가며
샌델이 하버드 대학에서 30년 동안 가르친 내용들을 축적하여 만든 『정의』와 한국사회의 『정의』 열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급히’ 만들어진 『무엇』은 같은 링 위에서 대결하기엔 체급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의』와 대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분석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된 『무엇』의 도전은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한계를 넘는 작업은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국면 속에서 가능하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 민중들의 급진적 실천 속이 미국의 정치철학을 아래로부터 대체하는 것이다. 한국사회 또한 한-미 FTA 체결, 2012년 총선/대선이란 국면이 도래하고 있다. 급진적 정치철학의 실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무엇』과 『정의』라는 지식인의 대결이 대중 공간에서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시대정신의 대결로 나타날 것이다. 시대의 전환점에서 우리가 다져온 지적․철학적 역량이 확인되고 도전받는 때이다.
마지막으로, 샌델이 『정의』에서 던진 ‘전차 문제’로 돌아가자. 『무엇』의 저자들은 이 딜레마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명기하지 않았다. 샌델이 원한대로 ‘나’의 도덕적, 사상적 입장에 근거하여 비극적 딜레마 상황에서 선택을 행한다면, 동전을 던질 것이다.
<참고문헌>
-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 2006
- 이진경 편저, 『모더니티의 지층들』, 그린비, 2007
- 이택광 외, 『무엇이 정의인가?』, 마티, 2011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Ⅰ』, 이동기 옮김, 까치, 1999
-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Ⅱ』. 이동기 옮김, 까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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