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의 윤리학? 먹거리의 정치학이 필요하다

일반부문 2등작

먹거리의 윤리학? 먹거리의 정치학이 필요하다

피터 싱어 외, 『죽음의 밥상』

정수환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윤 추구를 핵심으로 하며, 자본주의 체제는 적당한 수준의 평균이윤율이 보장되지 않는 한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칼 맑스에 따르면, 이윤율은 경향적 저하 법칙을 보이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대항하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이윤율을 반등시키려 시도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전쟁과 같은 방법으로 이윤율 압력을 해소하는 방법도 있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하였듯 끊임없이 이전에는 비(非) 자본주의적이었거나 전(前) 자본주의적이던 부문을 새롭게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는 방법으로도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계속하여 새로운 대상을 그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새로운 대상을 자본의 통제 하에 편입시키는 과정은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에 의한 형식적 포섭은 대상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과정 속으로 포함시킨다.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본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상의 행동에 대해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일컫는다. 실질적 포섭 과정을 통해 대상은 자본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통제되며, 이는 대상에 대한 물리적 변형과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실질적 포섭 과정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경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칼 맑스가 처음 이 문제를 『자본』에서 논한 바 있으며, 해리 브레이버맨이 『노동과 독점자본』에서 이를 현대의 노동 과정에 대하여 적용한 바 있다. 위 연구들을 통해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함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은 근골격계 질환이나 각종 직업병을 앓게 되었으며, 노동 과정이 분절되고 개인에게서 만족감과 통제감을 박탈함에 따라 소외를 느끼는 등의 정신적 고통을 유발함이 밝혀졌다.

실질적 포섭 과정은 노동자뿐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에 대한 형식적 포섭은 주로 자연물을 생산의 목표물로 전환하는 과정의 확대에 의해 이루어지며, 자본주의의 발흥 이래 이 과정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한편 최근에는 자본의 자연에 대한 실질적 포섭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자본의 자연에 대한 실질적 포섭은 자연물의 순환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의 확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은 필연적으로 자연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하며, 자연의 순환대사 과정을 중단시키고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현재의 자연 생태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균형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본은 이 자연의 미묘한 균형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당장의 이윤 추구를 위해 자연을 급속도로 변형시킨다. 그 과정의 부작용이나 부산물은 모두 자본의 시야 바깥에 있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통제의 확대는 수많은 환경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각종 생명들의 생존에 심각한 문제를 드리우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과정이 주로 농업과 식품 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대표적인 실질적 포섭의 증거로 우리는 GMO를 확인할 수 있다. GMO는 자본이 자연의 재생산 과정에 개입하여 생명을 자본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변화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변형은 축산업 등 식품 산업 전반에 걸쳐서 광대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생산 과정을 통해 생산된 식품들은 자연은 물론이고 그것을 섭취하는 인간들에게조차 매우 해로우며, 그 ‘대상’이 된 동물들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과정이 된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책이 집필한 『죽음의 밥상』은 자본주의적 축산업과 식품 생산의 각종 폐해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의 각종 부당함에 대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접근을 하는 것이 하니라, 현재의 폐해를 직시하고 여기에 대해 저자들의 견해를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저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동물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저자들이 현재의 실상에 대해 오랜 기간 조사하고 연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또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서평에서는 먼저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싱어와 메이슨이 제시하는 대안의 한계에 대해서 비판하려 한다.

자본주의적 식품 산업은 수많은 동물과 어패류의 성장, 재생산, 나아가 생애의 전 과정을 이윤 추구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형시킨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동물과 어패류의 일생은 왜곡되고, 고통 받는다. 싱어와 메이슨은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하고 있다.

제 1부는 “전형적인 현대적 식단”이라는 이름하에, 현대인의 일상적인 식단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어떤 폐해가 발생하는가를 묘사한다. 싱어와 제이슨은 닭, 달걀, 그리고 고기와 우유라는 현대의 동물성 식단의 생산 과정에 집중한다. 이 부분은 자본주의적 축산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읽는 중간 몇 번이고 상상하면서 몇 번이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하다. 수많은 닭, 돼지, 소들은 제대로 된 환경은커녕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고기와 달걀, 우유를 생산하는 기계로 여겨질 뿐이다. 이 과정을 제어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항생제가 투여되며, 이 항생제로도 많은 부분이 감당되지 못한다.

그런데 수많은 축산업자들은 왜 이렇게 생산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동물의 감정에 둔감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 역시 그렇게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식품 회사들은 자신들이 취급하는 ‘상품’이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세세한 매뉴얼을 만들어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적 관리는 브레이버맨에서 묘사되는, 관리자에 의한 지식의 독점과 그 독점 하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차이점이 있다면, 브레이버맨의 책에 비해 수십 년이 지난 현대에서는 그것이 더욱 철저하고 더욱 잔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책임은 일개 축산업자와 축산업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거대 식품 자본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러한 일을 전개하는가? 1부 중에 소개된 아이오와 주의 양돈업자, ‘웨인 브래들리’의 증언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돼지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거세 과정에서 마취제를 쓰자는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까짓것, 돼지 한 마리에 1달러만 쓰면 되는데 뭘.’ 이렇게는 말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돼지 한 마리당 1달러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비용이니까요. 1니켈(5센트), 1페니, 그쯤 된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도 없죠. 하지만 그 비용이 과연 부담이 되지 않을지, 그건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80p)

그렇다. 이것이 핵심이다. 자본은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한 푼이라도 비용을 줄이려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를 위해서 동물의 고통에는 당연히 관심을 쏟을 리 없다. 그나마 위에서 소개된 웨인 브래들리는 독립적인 축산업자로, 돼지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만약 돼지 거세를 위한 마취제가 5센트나 1센트라면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그 비용이 부담이 되지 않을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국제적 식품 자본은 더더욱 이 문제에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동물은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고통 받으며 살다가 죽어간다.

사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최소한 그들이 먹는 음식이 그렇게 청결하거나 윤리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알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러나 현실의 일상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2부에서 제시되고 있다. 2부는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어느 정도 동물의 고통에 관심이 있으나 그것의 실천을 철저하게 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 어떤 타협안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것들의 진실은 어떤지에 대해서 고발한다.

2부에서 다루는 것은 현대의 소위 ‘양심적 소비자 운동’에서 많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이다. 가령 유기농이나 친환경적이라는 인증을 받은 상표, 해산물, 로컬 푸드, 공정 무역,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것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들은 물론 1부에서 다루어진, 다국적 기업에 종속된 현대인의 일상적인 식단보다는 훨씬 윤리적으로, 환경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듯, 이것들 역시 환경적으로 문제가 상당하다. 이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양심적인 소비자의 대안’들이 대부분 새로운 자본의 이윤 추구 대상이 되어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싱어와 메이슨 역시 이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유기농 상표는 그 기준만 맞출 뿐, 환경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대자본들의 생산품에도 지급되며, 이 상품들은 높은 가격에 팔린다. 일반인이 사기는 어렵다.

그러나 싱어와 메이슨은 이처럼 윤리적인 기업 운영과 친환경적인 기업들, 그리고 그들이 ‘양심적 잡식주의자’라고 이름붙인 사람들의 소비 형태에 대해 분명 한계를 지적하지만 우호적으로 논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어서 보다 윤리적이며 올바른 대안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논한다. 그것을 논하는 3부의 제목은 ‘완전 채식주의자들’이다. 여기서는 유기농, 베건, 프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 현대의 식습관은 비윤리적이고 반인도적이며, 우리는 보다 윤리적이고 올바른 먹을거리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책의 전 내용을 통틀어, 싱어와 메이슨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윤리적이고, 개인적인 접근이다. 육식은, 최소한 거대 식품 자본에 의해서 취급되는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는 육식은 비윤리적이고 반인도적이기에, 개인적 차원에서 소비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음식에 대한 알 권리를 요구하고, 보다 올바른 식품들을 소비할 것을 주장한다. 베건이 된다면 가장 좋을 것이고,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로 살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그들에게 보다 윤리적인 상품을 공급해주는 기업이 있어야만 소비를 할 수 있다. 싱어와 메이슨은 그런 윤리적인 기업 운영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2부에서 다룬 홀푸드마켓에 대한 싱어와 메이슨의 서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홀푸드마켓은 ‘윤리적 경영’을 통해, 동물에게 고통을 덜 주는 상품을 취급하여 크게 성장한 기업이다. 그들은 홀푸드마켓을 다룬 부분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다.

“유기농 운동가들 중에서 일부는, 대형화를 추구하다 보니 매키[홀푸드마켓의 CEO-인용자]가 기업의 논리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주류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어째서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양립될 수 없느냐는 반문이다. 홀푸드마켓은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마지막 한 푼까지 쥐어 짜내는 것이 수익률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윤리적인 기업 운영. 그것으로도 가능하다.”(264p)

과연 모든 기업이 홀푸드마켓과 같은 식으로 상품을 취급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그것을 통해 전 세계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농업 없이도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쿠바에서 증명된 바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농업은 노동 절약이라는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지만, 생산요소 대비 산출물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절대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 질문은 다른 부분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기업이 홀푸드마켓과 같은 ‘유기농이고 환경적으로 비교적 정당한, 그러나 훨씬 비싼’ 식품만을 취급할 때 사회가 유지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저렇게 비싼 식품을 먹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빠지게 되는 부분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싱어와 메이슨은 이 부분을 외면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제3세계는 물론이고, 미국의 빈곤층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미국의 빈곤층, 그것도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빈곤층에 대해서 바바라 에렌라이히는 그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탁월한 연구를 해낸 바 있다. 에렌라이히는 저임금 노동력으로 3달 동안 살아갔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저임금 노동력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값과 먹을 것을 제대로 충족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로 부족한 소득으로 인해 푸드 스탬프에 의존하는 미국인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2009년 미국 흑인의 28%가 푸드 스탬프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값비싼 유기농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실제로 책에 인용된 사례들은 소수의 프리건을 제외하면 모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거나 관련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싱어와 메이슨의 실천 방법은 너무나도 요원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의 빈곤층과 노동 계층이 변화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적 생산, 공장식 농업과 축산업은 절대로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는 환경적으로 보다 올바른 제품을 생산하며 판매하는 기업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앞서, 자본은 계속해서 비(非)자본주의적 부문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친환경적인 이미지, 올바른 이미지를 가진 상품 및 서비스는 자본이 새롭게 진출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이는 그린워싱(greemwashing)이라 불리며 널리 알려져 있다. 식품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미 책에서도 유기농 마크에 대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점점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싱어와 메이슨, 그리고 매키가 이야기하듯 기업이 윤리적으로 활동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유기농 인증 상표와 동물 배려 상표를 부착한 먹거리 산업에 진출하는 대기업들은 이 상품들에 올바른 이미지를 부여하고 고가로 생산하여 중산층 이상의 소수를 대상으로 판매한다. 그리고 앞서 지적하였듯, 다수는 여전히 이전의 방식대로 생산된 제품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동물들의 문제나, 여기서 파생되는 환경 문제는 이러한 소수의 친환경적이고 유기농적인 소비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 노동계층과 빈곤층이 보다 올바른 소비를 택할 때에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친환경적인 소비와 윤리적 기업은 이 광대한 계층을 상대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들은 사회 전체의 질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농업의 바다에 몇 개의 ‘유기농의 섬’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으로는 체제가 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이것은 사회 전체 체제, 즉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하여 접근한 저자들의 접근법, 그 자체에서 나오는 오류이다. 먹거리의 선택이 윤리학적인 문제라면, 저자들의 접근법은 완전히 옳다. 보다 윤리학적이고 올바른 먹거리를 선택하면 되는 문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먹거리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소득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윤리학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은 시스템의 문제이다. 따라서 먹거리의 문제는 절대로 윤리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먹거리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실질적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그리고 인간 삶의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듯, 이 문제 역시 정치적인 문제이다. 정치적인 문제를 윤리학적, 개인적 선택으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해결될 수가 없다. 싱어와 메이슨이 제기하는 동물들의 권익에 대한 문제 역시 그러하다. 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저임금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력의 재생산비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저가의 식품을 대량으로 공급해할 필요를 만든다. 따라서 저렴한 가격으로 다량의 음식을 공급하는 자본주의적 식품 생산 산업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둥 중 하나다. 이 기둥의 겉에 녹색 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책 『죽음의 밥상』은 현대적인 축산업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책이나, 이 점을 직시하지 못하고 문제를 개인적, 윤리적 차원으로 치환시켰다는 점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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