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파사전
일반부문 2등작
『좌우파사전』
이건범 외, 『좌우파사전』
박천우
0. 묻다. “너 좌파지?”
강남 한 복판에 봉은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자리 잡은 터가 좋아 그런지 조금 촌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부자 절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절의 주지가 좌파랍니다. 맞습니다. ‘좌빨’이라고 말 할 때의 바로 그 좌파입니다. ‘얼씨구나 드디어 한 건 잡았구나!’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좌파 주지를 가만 놔둘 수 있는 것이냐며 침을 질질 흘리면서 으르렁 거리는 걸인(乞人)이 한명 보입니다. 도대체 그 으르렁 거리는 위인이 누구냐구요?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재직 중이던 걸물, 행불(行不) 안상수 선생 되시겠습니다.
2010년의 일이었습니다. 입바른 소리를 아끼지 않던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의 존함은 바로 명진 스님. 사실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가 눈엣가시와도 같았을 명진 스님을 ‘좌파’로 규정하며 전면적 비난 공세에 나섰던 것은 그네들의 속성상 어쩌면 그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호들갑을 떨 일은 더더욱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왜 이 쉰내가 폴폴 나는 구린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려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로 하여금 지금 이 서평을 써내려가게 했던 근본적 동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백컨대, 저를 사로잡았던 것은 명진 스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명진 스님은 안상수 대표의 발언 직후, 인터뷰를 통해 단호히 안상수 대표를 꾸짖으셨습니다. 진노하신 스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날 것 그대로의 사자후를 토해내셨지요. ‘나는 해병대 출신이다!’, ‘게다가 나는 심지어 월남전 참전용사다!!’, ‘어찌 행불상수 너 따위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감히 나를 두고 좌파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행불 안상수 선생을 죽비로 내려치는 듯한 스님의 세 마디 말씀을 접하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아마도 반응은 세 부류일 것 같습니다. 첫째, ‘명진 스님 정도 되는 분마저 저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그대는 굳이 이 서평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좌우파사전』을 읽을 필요 또한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둘째, 이거 뭔가 조금 이상한 것 같긴 한데, 뭐가 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분들. 이 분들은 이 글은 그냥 훑어만 보시고, 바로 『좌우파사전』부터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핵심은 바로 지금부터겠지요. 만약, 혹여라도 아직까지 단 1g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셨다면, 게다가 안상수를 꾸짖은 명진 스님이 그저 마냥 통쾌하기만 할뿐이라면, 옳거니! 님들의 존재야말로, 바로 지금 제가 아등바등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이유입니다. 청컨대, 얼른 이 글을 마저 읽으신 후, 『좌우파사전』 또한 정독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군소리가 너무 길었나요? 그럼 이제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저는 명진 스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아쉬움을 느꼈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문제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도대체 지금 이 이야기들과 『좌우파사전』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1. 정언(正言), 그리고 정명(正名).
한국의 비판적 지성들에게 있어 ‘사상의 은사’이자 큰 스승이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공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정언’편이 있어.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공자는 “사물의 이름(명칭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라고 답했어요. … 모든 형태나 관계나 성격이나 형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인간 상호간의 생존에서 혼란을 예방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고의 주체인 개인의 의식과 행위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에요.”(『대화』, 374쪽)
우리네 쓰라린 현대사는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젊고 혈기 넘치던, 그리하여 정의로움에 눈떴을 뿐만 아니라, 앎을 삶으로 살아내려 했던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형언하기조차 힘든 아픔과 고통들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를 넘어서 기억해야만 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했을 뿐인 이들에게 씌워졌던 치졸한 레테르들과 숱한 마타도어들을 말이죠. 예컨대 이런 것들 말입니다. 한 시절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요 작디 작은 말들, 어디 한 번 끄적여 보겠습니다.
좌익, 빨갱이, 용공, 간첩, 친북, 좌파.
‘폭압과 착취가 난무하는 독재기에 의인이 갈 곳은 감옥 아니면 죽음밖에 없다’고 읊조렸던 것이 김남주 시인이었던가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두 가지 정도로 불렸을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이름 대신 수인번호로 불렸을 것이고, 감옥 밖에서는 위에 적은 저 작디 작은 말들이 그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하루하루를 감내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엄연히 우리네 현실이었습니다. 우리의 오늘은 바로 그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축적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난날의 그 뼈아픈 과오를 기억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더 나은 현실과 미래를 모색해 나가는 것일 겁니다.
너무 교과서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뻔하고 식상한, 그저 그렇고 그런 공자님 말씀은 이제 그만 듣고 싶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밝은 눈과 맑은 맘으로 촉수를 드리우고 우리네 현실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마도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공자님은 말씀하셨지요. 정언(正言). 말을 바로 하라는 얘기입니다. 무엇이든 모든 것은 말을 바로 하는 데서 출발하는 법, 그래서 정언은 곧 이름을 정확히 붙이는 정명(正名)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공자가 정명론을 주창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의 정언(正言)과 정명(正名)의 수준은 어느 정도(程度)일까요? 아쉽게도 우리네 현실은 여전히 씁쓸할 따름인 것 같습니다. 수십 년 간 일편단심으로 ‘좌파’란 말과 짝을 이루어 온 것은 ‘친북’이라는 스테디셀러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친북’을 제치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신상품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하여, ‘종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어렵사리 무상급식을 비롯해 친 서민 복지정책들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무시무시한 개념어가 등장하곤 합니다. 예, 맞습니다. 바로 그놈의 ‘포퓰리즘’ 이야기입니다. 또 있습니다. 복지를 위한 증세 논의나, 일부 위헌 판결을 받고 사실상 불능화 되어버린 ‘종부세’ 논의가 대두될 때마다 언제나 등장하는 올가미가 또 하나 있지요. 이건 뭐 행불 안상수 선생이 상시 휴대한다는 보온병 폭탄도 아닌 것이……., 여하튼 ‘세금폭탄’이란 올가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듯, 말을 바르게 하고, 그 이름/개념을 바르게 하라는 공자님 말씀은 2011년 오늘날 까지도 여전히 교과서 속에만 존재하는 요원한 이상일 따름입니다. 화이부동. 다원성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두어 건설적인 대안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건강한 사회로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수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저는 오염된 언어의 올가미를 통해 기존 시스템에 비판적인 사람들이나 주장을 옥죄어왔던 뿌리 깊은 폐습의 역사야말로 근본적 층위의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총칼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던 지난날은 분명 평범한 이들이 정면으로 저항하기 힘든 시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공고화되었다고 믿었던 오늘날까지도, 그놈의 ‘좌파 타령’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씁쓸함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2. 입증책임과 묵비권, 그리고 하나의 가정.
제가 안상수에 대한 명진 스님의 반박으로부터 통쾌함뿐만이 아니라, 아쉬움과 불편함 또한 느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물론 『좌우파사전』을 읽고, 서평까지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안상수는 무고한 이에게 올가미를 던졌습니다. “너 좌파지!”라고 말이죠. 다원성을 긍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떤 사람이 좌파이건 우파건 간에 그것은 도무지 책잡힐 일이 될 수도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되는 법입니다. “너 좌파지!”라는 올가미 던지기는 마치 “너 여자지!”라면서 여성들을 차별했던 극단적 마초주의자나, “너 흑인이지!”라면서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다름없는 졸렬한 처사일 따름입니다.
문제는 이 올가미가 매우 강력하다는 데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올가미의 강력한 효과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때로는 어쩌면 그 올가미에 걸린 사람들의 필사적인 발버둥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려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올가미에 엮이게 되는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의 쓰라린 역사는 이에 대한 숱한 실례들을 조곤조곤 얘기해 주는 듯합니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너 좌파(빨갱이, 간첩, 용공, 친북)지!”라는 공격을 받은 상대는 죽을힘을 다해서 ‘나는 절대 좌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분투해 왔습니다. 물론,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육체적 고통마저 감수할 수 있는 강단의 소유자는 아예 그런 입증시도를 할 이유조차 없었을 테니 잠시 논외로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렇다면 그 올가미에 걸린 사람의 입증 시도는 성공했을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자신이 좌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입증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올가미였으니까요.
법정 공방을 함에 있어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대개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부과되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용의자의 유죄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검사가 왜 그리도 강압적인 수사를 밀어붙이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검사의 부담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는 ‘묵비권’ 또한 바로 이 입증책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너 범인이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 누구라도,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범인이 아니란 점’을 입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입증 시도는 대개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너 범인이지!”란 올가미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이내 그 올가미는 “너 스스로 네가 모든 점에서 범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내라”는 가히 무적의 올가미로 자동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법치 시스템은 용의자로 하여금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아예 “너 범인이지!”라는 올가미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묵비권’을 헌정 질서 속의 소중한 권리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증책임과 묵비권의 논리는 안상수와 명진 스님의 사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안상수의 “너 좌파지!”란 추궁에 대한 명진 스님의 반박은 결국 “난 결코 좌파가 아니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의 월남전 참전용사’라는 반박은 분명 군 미필자 안상수를 향한 통쾌한 반박이었을지 몰라도, 결국 나는 결코 좌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시도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명진 스님이 꼭 좌파일 이유도 없고, 제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명진 스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방식의 이른바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만약 그랬다면 한나라당과 안상수의 천박한 공세가 더욱 거세졌을 것이란 점 또한 자명합니다. 다만, “너 좌파지!”라는 윽박지름으로 대변되는 지난 수십 년 간 형성되어 온 강고한 반공주의라는 굴레와 보수 편향의 올가미를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명진 스님 정도의 인품과 덕목의 소유자라면, 예컨대 이런 식으로 답변하셨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단번에 색깔론의 올가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을지라도, 그 올가미의 매듭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드는 지공(遲攻)전략이라고나 할까요.
“안상수 의원님, 저는 정치인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그저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불자일 뿐입니다. 하여, 저는 좌파가 무엇이고 우파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을 받자옵고, 그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의 모순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을 일컬어 좌파라고 부르신다면 뭐 제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좌파라는 것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 좌파니 우파니 하는 부질없는 언어의 성찬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 『좌우파사전』: 볼 끝이 살아 있는 꽉 찬 돌직구, 뭐 대략 그 정도.
정언(正言)과 정명(正名), 그를 통해 지난 수십 년 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레드 콤플렉스를 위시한 일그러진 담론구조를 바로잡는 것. 반공을 국시로 내걸었던 30여년의 군사독재 치하, 국가보안법이 헌법위에 군림했던 참담한 현실이 잉태한 극단적 보수 편향의 사회를 극복해 나가는 것. 명진 스님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첨병 격인 CEO 출신 안철수 마저도 좌파로 내몰리는 우리네 현실을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 이와 같은 거대한 과제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할 때면 때로 숨이 턱 막히는 듯 한 느낌에 가슴이 갑갑해집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놈의 ‘좌파 타령’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참으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 복잡다단한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고민 끝에 저는 조금 쉽게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실천하고 그 결실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지요. 먼저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버렸습니다. 단칼에 해결해내야만 한다는 강박과 조급증 또한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제가 택한 대안은 먼저 저부터 확실히 변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단단한 삶의 지평을 세우고 당당해져야 한다는 점, 더불어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함께 달라질 수 있다는 실천적 지혜를 남들과 공유해나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굳이 짬을 내어 후배들과 『좌우파사전』을 함께 읽고, 나아가 이 책을 많은 분들께 알리고자 지금 이 서평을 쓰게 되었던 것 또한 바로 이런 문제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
『좌우파사전』은 시종일관 직구를 뿌려댑니다. 마치 변화구의 존재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니 어쩌면 알았다고 해도 던지지 않았을 것만 같은 괴짜라고나 할까요? ‘기계적 중립’으로 대변되는 변화구들로만 가득 찬 세상에 대한 반골기질이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매번 꽉 찬 돌직구로 타자를 압도하는 2011년 한국 시리즈 MVP 오승환을 보는 느낌, 뭐 대략 그런 느낌이라면 『좌우파사전』에 대한 첫인상이 그려지시는지요? 예컨대 제목부터 그러합니다. 앞서 이리저리 부연하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그 자체로 터부시되어온 개념어입니다. 그 때문에 좌파/우파란 개념쌍 보다 진보/보수라는 개념쌍이 더 선호되어 왔습니다. 당장 ‘좌파와 우파’와 ‘진보와 보수’라는 키워드로 논문과 단행본 검색을 해보아도, 후자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이 이를 예증합니다. 그런데 저는 2011년인 오늘날까지도 굳이 (무)의식적인 자기검열기제를 발동하여 좌파/우파란 개념쌍 대신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어를 고집하는 논의들을 접할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혹여나 라면을 너무 짜게 끓인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 걱정하며 눈치를 살피던 이등병이, 원래부터 조금 짠 라면을 좋아하는 병장들 몰래 살금살금 조금씩 물을 타 넣는 듯 한 느낌이랄까요? 『좌우파사전』은 분명 이러한 기존의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 않습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개념쌍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1장을 통해서 직접 검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좌파와 우파는 공간적 은유이고, 진보와 보수는 시간적 은유”라는 설명이 바로 그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제목을 이루는 두 단어 중 하나인 ‘사전’또한 말 그대로 묵직한 직구입니다. 온갖 현란한 디자인과 편집, 그리고 유려한 제목으로 무장한 책들이 서점에 도열한 채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전자사전의 보급으로 종이 사전의 매출액 또한 가히 혁명적으로 감소한지 오래입니다. 이런 판국에 ‘사전’이라니요. 하물며 그것도 ‘좌우파사전’이라니!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컨셉의 책이 출판된 것 자체가 사실상 처음이라는 점입니다. 척박한 인문사회과학 출판 업계에서 이 정도의 공력을 들여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출간했다는 점,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자들은 (‘좌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진보적’인 사람일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좌우파사전』 같은 책의 출간은 분명 한국 인문사회 출판계의 진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꼭 이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관계자가 읽게 될 확률은 이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진입할 확률보다도 낮겠지만, 그래도 이 초라한 지면을 통해서나마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는 ‘인류의 적’ 스포일러(spoiler)의 위험성을 최대한 주의하면서 『좌우파사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통정리가 잘 된 계몽 논문들’. 『좌우파사전』에 대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촌평입니다. ‘좌우파가 필참해야 할 지도와 나침반’. 근래 『진보집권플랜』을 출간했던 조국 교수의 한 마디입니다. 저는 이 평가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좌우파사전』은 말 그대로 사전입니다. 1장의 총론과 총 6개로 분류된 22개 주제의 각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전입니다. 모르는 단어나 숙어, 구문이 나올 때 사전을 들춰보듯, 그 언제라도 각 주제에 대한 좌파와 우파 각각의 주장과 논거들, 나아가 한계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사전은 어디까지나 사전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사전이라 하여도 직접 작문을 해주진 않습니다. 주요 예문을 알려줄 뿐이지요. 『좌우파사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좌우파사전』의 각 장 말미에 수록된 ‘더 읽을거리’를 함께 읽어나가야 되는 이유인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야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분명, 『좌우파사전』은 정답을 말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남재희 전 장관의 말처럼 이 책의 글들은 분명 ‘계몽 논문들’이지만, 그 계몽이 일방향적이지 않습니다. 『좌우파사전』이 시종일관 직구만을 뿌려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직구는 몸쪽과 바깥쪽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집요하게 한 곳만을 공략하는 ‘환상의 코너웍’이라고까진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어디를 향하건 ‘볼 끝’이 살아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좌우파사전』이 선동이나 직접적 설득을 위한 책이 아니란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주제에 걸쳐서 좌파와 우파 양쪽의 논의를 모두 개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계도 뚜렷합니다. 예컨대 『좌우파사전』의 첫 번째 장은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쌍에 대한 총론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짧은 글을 통해 좌우파 개념에 대한 총론과 한국 사회에서의 좌우파 논의 전반을 함께 아우르려다 보니, 예컨대 근본적 차원에서좌파와 우파가 나뉘게 되는 근본적 계기 및 원인, 즉 좌우파의 인간관/사회관/정의관의 뿌리를 살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좌우파사전』을 읽으면서 정치사상/철학적 논의들을 함께 독해해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부연하자면, 『좌우파사전』은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핵심 가치로 ‘평등’을 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왜 누군가(즉, 좌파)는 평등을 좀 더 옹호하게 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의들은 지면관계상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논의들은 기존의 정치사상, 윤리학 등은 물론 최근에는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등의 영역에서 또한 고도의 설명력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독자적 설명체계에 대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모든 독자가 이에 관심을 가질 수도 없고,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관련 참고 도서 목록에 이와 관련된 논문이나 단행본이 단 한편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점은 분명 아쉬웠던 점으로 특기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나는 꼼수다’ 신드롬에 힘입어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기까지 한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닥치고 정치』의 경우, 바로 그 근본적 차원의 차이에 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물론 그 논의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좌우파사전』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물론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필진들의 성향이 일정 부분 편향되어 있다는 점도 혹자에게는 미진한 점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극단적으로 우편향된 사회였던 한국 사회에서, 30여 년 간의 군사 독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자생적 발아에 성공했던 비판적 지성인 그룹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그들이 불가피하게 좌파적/진보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 독재의 철권통치라는 ‘작용’에 대한 본능적인 ‘반작용’이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쓴 필진들의 주류인 486세대의 감수성과 지적 뿌리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기계적 중립’에 대한 집착이나, ‘상대주의’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일련의 행태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따라서 굳이,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의 유명한 언명을 상술하지 않는다 해도, 『좌우파사전』에 크게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마도 누군가 엄밀한 독해를 하는 과정에서 분명 정파 간의 상이한 논지들이 모두 공평하게 담기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좌우파사전』을 비판 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어디까지나 ‘지도’내지는 ‘나침반’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며, 결국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미진한 점 또한 일정 부분 용인할 만한 것이란 생각 또한 해보았습니다.
4. 험한 세상, 혼탁한 시간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는 어떤 자세에 관하여.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을 외쳤고, 이명박은 ‘공정사회’를 이야기 합니다. 한 시절 ‘노동 운동, 김문수만큼만 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열혈 운동가였던 김문수는 이제 무상급식이 공산주의 정책이므로 찬성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노회한 정치인이 되었고, 역사교과서의 ‘민주주의’를 ‘자유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갈수록 거세져만 갑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유’, ‘정의’, ‘공정’, 이런 개념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온전히 긍정적인 개념들입니다. 반대로 김문수 도지사가 언급한 ‘공산주의’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철저히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됩니다.
결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자유전쟁』에서 지적했듯, 정치인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의제와 개념을 선점하려하고, 반대로 자신이 반대하는 정책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덧입히려 합니다. 이러한 정치판의 생리를 염두에 둔다면, 무상급식을 두고 누군가는 민주주의요, 복지제도라고 말하는 반면, 반대편에서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실은 하품이 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 사회의 공적 가치를 고민하는 시민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난무하는 권모술수로 충만한 현실 정치권의 전방위적 의제설정과 규정력 하에서, 민주 사회의 온전한 주권자로 거듭나는 길은 분명 쉽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공부가 필요합니다. 조금은 심도 있는 공부가 말이지요. 예컨대, 복지국가 논의를 예로들어 봅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실 정치권이 규정한 ‘무상급식’을 둘러싼 협애한 논의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아가 복지국가 논쟁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고, 복지가 실은 보수의 어젠다였다는 점을 직시하는 동시에,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구조적 틀거리와 행위자들의 결단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꾼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진짜 시민으로써 오롯이 홀로서고 싶다는 바람과 다짐이 있다면 말이지요.
예컨대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제 2의 안상수가 제2의 명진 스님에게 “너 좌파지!”란 올가미를 씌우려 드는 즉시, 그 정치인의 반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사실상 그를 재기 불가능한 수준으로 매장할 수 있을 정도의 시민의식. 그리고 그에 기반한 자유롭고 합리적인 공적 토론의 장. 아마도 그 정도의 사회라면 살만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좌우파사전』의 가치 또한 어쩌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부여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우파사전』은 장점과 단점 모두를 지닌 책입니다. 그러나 저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는 식의 상투적 어구를 반복하면서, ‘기계적 중립’에 기반한 무미건조한 총평을 내릴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좌우파사전』은 분명 장점이 더 많은 책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험한 세상, 혼탁한 시간들의 연속입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이지요. 현재 무직 상태로 은둔 중이신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의 시장 직을 건 무리수로 인해 정치의 계절이 좀 더 빨리 찾아왔다는 점이 예년과의 차이점일 뿐, 진지하고도 열린 사유의 지평을 확보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좌우파사전』이란 지도와 나침반을 100% 활용하여, 올바른 인식과 관용에 기반을 둔 치열한 토론을 통한 심의 민주주의의 도래가 앞당겨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아마도 『좌우파사전』을 읽게 되시면, 쉴 새 없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질문들의 다종 다기한 결들을 주체하기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혹은 그 질문들 자체가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자문하면서 끝 모를 자괴감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홀로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분명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질문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끙끙 앓을 필요도, 조급증에 빠질 필요도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것만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변화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하여 바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으로부터 모든 변화의 가능성이 출발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만이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좌우파사전』의 행복한 악전고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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