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실패를 사랑할 수 있다

일반부문 3등작

이제는 실패를 사랑할 수 있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오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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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게 한 때 비평가를 꿈꾼 적이 있다. 모든 사건들이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이 비평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자리,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이 괴로웠다. 나는 비평가가 되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건들을 모조리 넝마 속으로 주워 담고 싶었다. 실패한 자리마다 진실의 흔적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들이 품은 일말의 진실은 비평가의 메모지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왜 거대한 덩어리를 쫓기보다 남들이 버려놓은 부스러기들에 탐닉하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그런 부스러기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라는 부스러기도 결국엔 의미를 얻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사실은 그만큼 외로움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었을 때 그 수많은 메모들 속에서 넘실대는 외로움에 목이 컥컥 막혔다. 그때부터 비평가를 사랑했다. 그들은 외로운 사건들을 구원하는 자였다.

그러나 비평가는 아무래도 읽는 사람들이었고, 주워 담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비평가는 예술가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다소 진실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비평이 창조 이전에 올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그러하다. 분명한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과 거리는 여전하다. 그러나 비평가는 사건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평을 열어젖힌다. 세계의 조각들이 품은 진실은 비평가의 냉철한 눈앞에서만 반짝인다.

하지만 해석보다 변혁이 문제가 된 이후, 비평가들의 자리는 어딘가 어정쩡해졌다. 비평가는 사건과 관객 모두로부터 한 발 멀어져 있다. 참혹한 순간들 앞에서 비평가는 언어를 통해 ‘여기 사건이 있다’고 외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아질 것 없는 세계 속에서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평가는 거리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평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가, 비평가에게는 우울함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이것이었다. 세계는 계속해서 몰락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비겁할 수밖에 없다. 내가 꿈꾸던 자리는 과연 윤리적일 수 있을까? 비평이 사건을 구성한다고 하여도, 비평이 그 자체로 사건이 된다 하여도, 언어인 한 비평은 여하간 거리로부터만 만들어진다. 비평가의 윤리는 그때부터 나에게 하나의 딜레마였다. 무엇인가를 읽는다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읽는 이의 비겁함을 공격하면서도, 내 스스로의 비겁함에 눈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항상 망설이며 주저하는 인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만큼 신념이 투철하지도 않다. 오히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가진 능력과 신념을 질투했다. 나는 단지 긴장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정답을 선언할 만큼 깜냥도 없었고 현란한 이론들을 다루는 재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들에 머리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흔들렸던 삶 자체로 답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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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들어와서 지난 몇 년간 읽고 쓰는 일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누군가에게 알리지는 않아도 그저 닥치는 대로 읽고, 꾸준히 평을 쓰고, 다른 이의 평을 듣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진실을 붙잡기 위해서 그 일들에 탐닉했다. 친구의 시에 평을 쓰면서도 그 시의 진실을 붙잡지 못할까 고민했다. 나의 글을 두고 끊임없이 자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진실을 붙잡지 못한다는 생각보다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괴로웠다. 과학적인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단 반응이 더 즐거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글을 누군가가 진심으로 읽어주기를 바랐다. 독자가 없는 비평은 외로웠다. 비평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비평이기에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 속에서만 막히지 않고 흐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공유하는 게 적었다. 용산은 남의 일이었고, 4대강은 미래의 일이었다. 소설은 심심풀이였고, 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끊어져 있고 갈라져 있는 홀로들의 세계만큼 우울한 것도 없었다. 내가 무엇인가에 홀릴 수 있었다면 그만큼 서로가 공유할 거리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는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갈망할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손에 든 그의 책 제목은 너무나 절실하게 다가왔다. 『느낌의 공동체』는 오늘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의 귀한 소임을 “당신의 신발을 벗게 하는 일”(282)이라고 말하며 공감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신발을 신기 위해 나의 신발부터 벗는 일을 시도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며 그 문학은 우리를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꾸준히 읽고 쓰는 만큼 그를 다시 읽고 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는 예외적으로 대중적이지만, 그를 소비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뿐 그를 반복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이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감히 단언할 수 있다면, 오히려 소비자가 늘어나는 만큼 비평가는 외롭다. 비평가는 단순히 책 소개자가 아니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같이 읽지 않는다면 비평가의 시도는 반쪽짜리에 불과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이해하기 힘든 실패의 흔적들을 읽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비평가의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으로서 제도권에 대해서 나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 무언가를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만큼 읽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건 명백하다. 정확한 이해를 제공할 사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이해할 마음이 없어서일까. 여하간 이러한 현실 앞에서 나는 그의 책을 읽고 싶었다. 책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 맞고 틀리고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책 그 자체를 읽는 것 말이다. 어떻게 읽었는가가 아니라 왜 그는 끊임없이 읽고 쓰는가를 묻고 싶었다. 만약 책을 읽어 그의 춤에 답할 수 있다면 이 책에 대한 가장 최고의 예우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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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기, 저기, 정전(canon)들이 있었다. 그것 외의 모든 것은 언제나 무가치했다. 정전은 언제나 성공한 묘사였고 완벽한 체계였다. 나는 가끔 정전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했다. 그 불명료한 세계를 깔끔하게 표현해내는 이론들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도 가졌다. 하지만 스스로 실패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정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모든 글자들은 명백한 사실들로 향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글자들로 건너뛰었다.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오독이거나 왜곡이거나 아니면 무능이었다. 하지만 나는 외롭기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의 생각을 정전 속으로 비틀어 넣으면서 오명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문제로부터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대의에 대한 경의뿐이었다. 허나 나는 그 경의를 끝내 정당화하지는 못했다.

졸아든 세계 속에서 언어를 점차 잃어버렸다. 형식적으로 열려있는 공간은 사실 완전히 닫혀 있었다. 굳어버린 공간은 공동체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건들이 넘쳐흘러도 우리는 정해진 방식 이외에는 말할 수 없었다. 새로운 읽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비평이 음미하며 읽는 것, 부스러진 것들에 시선을 주는 것이라면 이러한 공간은 비평을 행하기에는 너무 단단했다. 모두들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세계는 여럿으로 쪼개졌지만 각자의 좁은 시야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읽기와 쓰기는 단단해진 세계를 더욱 옥죄었다. 무엇인가 다르게 읽을 수는 없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나태함이었다. 그리하여 텍스트 사이를 떠다니고 농담이나 일삼던 나는 바깥이 되었다.

사실 내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바깥으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나는 현실의 문제를 직접 마주하는 일이 더욱 급하다고 생각했다. 시와 화염병 가운데, 화염병을 집어 들기로 했다. 주어진 언어들 속에서 용케 생각을 정리해내고 단단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생각들을 잘라냈다. 새로운 읽기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피곤했고 지쳐있었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현실은 얼마나 사람을 질리게 하는가. 하지만 그 모든 시도들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이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 망설임은 바로 무능함의 징표였다. 현실의 모순에 주저하는 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적이니까.

세계를 바꾸려는 어떤 지독한 열정 앞에서 실패는 교훈에 지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을 회피하려는 것이라는 주장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의미 있는 실패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실패는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치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유능함에 질려 있었다. 한줌의 유능한 자들은 더듬거리는 무능한 자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확신에 찬 언어와 정갈하게 계산된 언어로 다른 읽기들에 코웃음 친다. 그들은 왜 실패하는지 공감할 수 없다. 무능한 자들이 끊임없이 일을 벌이며 무너지는 그 세계를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실패를 여하간 비뚜름하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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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쓸어 담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실패다. 그의 말마따나 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시도하는 과격함이고 소설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기 위해 시도하는 무모함이다. 이것들은 그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해내려고 했던 이들의 치열한 실패의 흔적이었다. 문학에는 그 고유한 싸움터가 있었다. 문학은 도대체가 구원할 수 없는 이들이 품은 일말의 진실을 드러내야 할 윤리적 책무가 있었다. 문학은 인간을 물건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오늘의 법과도 싸울 책무가 있었다. 단 그것은 문학인 한에서.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는 그 긴장을 유지하는 한에서.

비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평은 고유한 싸움터가 있다. 그것은 끝내 실패해버린 모든 시도들이 부스러기로 널브러져 있을 때 그것들이 무엇을 향해 전력을 다 하였는지를 복기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절박한 활동이었다. 누군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비겁한 위치에서 한가로운 말놀이를 하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평하는 것, 읽는 것은 단순히 도피가 아니다. 그들도 실패로부터 의미를 구원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다시금 되돌아볼 소중한 시간들을 얻는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하고 있을 때 문학은 몰락한 자들을 굽어본다. 비평은 그 널브러져 있는 작품들에 진실이 있음을 외치는 행위다. 비평은 목소리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요구한다.

도피하듯 떠난 군대에서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도서관으로 반입된 『몰락의 에티카』를 읽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비평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비평은 언제나 구원이었으나 그것은 피안과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평은 작품이 품고 있는 진실과 작품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진실들은 숨겨지고 잊힌 이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마이너리티에 대한 감수성이 비평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축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제야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읽고 쓰는 일이었다. 이것이 단지 도피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읽고 쓰기는 현실로부터 한 발 멀어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세계를 잇기 위한 과정이었다. 『느낌의 공동체』는 세계와 마주하기 위해 책 전체를 통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자기들만의 좁은 세계 속에서 서로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들에게 다른 세계와 마주하라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비평이 어려워지는 시대에 비평을 요구하는 것 역시 무리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줄어들고, 서로가 읽은 것들을 공유하는 경우도 점차 드물어진다. 무엇인가 읽으려고 해도 무엇을 읽을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와 쓰기를 다르게 할 가능성들을 요구하기를 멈추고 싶진 않다. 허무맹랑하거나 선동적인 읽기는 가능성들을 묻어버린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나오는 문지기는 끊임없이 농부를 좌절시킨다. 매 순간 문은 열릴 수 있지만, 문지기는 그때마다 갖은 핑계를 대며 문을 닫는다. 우리에겐 천천히 이룩해야 할 어떤 먼 미래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마다 지금이 아닌 구원의 순간들이 항상 현실 속에 있다. 읽기는 그러한 매 가능성의 순간들을 열어젖힐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나는 이것을 정치라고 부르는 랑시에르의 말에 동의한다. 그는 『문학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그것에 개입하면서 드러내는 역량이다. 문학이 복무해야 할 정치가 있는 게 아니라 문학 그 자체가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작가와 비평가는 그러한 열림을 의미 있게 만드는 삐뚜름한 독자이자 작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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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언제나 해석을 요구한다. 문학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이유는 없다. 문학은 여전히 어디서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도가니가 그렇고 허수경이 그렇다. 물론 문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예컨대 도가니가 잘못된 프레임으로 문제를 다룬다는 점은 비판할만한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이 해야 할 일과 비평이 해야 할 일을 혼동하여 문학에 과도한 짐을 지울 필요는 없다. 문학은 실패의 흔적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실패의 흔적을 더 철저하게 읽지 않았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문제를 물어야 한다. 사건을 읽지 않았던 우리들과 읽고 말하지 않았던 우리들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엉망인 세계를 고발하는 것은 문학이다. 그리고 그런 문학을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평론이다. 평론은 그래서 필요하고 평론을 위해서 독서는 필요하다. 신형철의 글은 부담스럽지 않은 문체를 통해서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질책도 힐난도 아니지만 나는 그의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먹기가 어렵다. 당신은 읽고 쓰기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닥치고 읽었던 모든 것들을 되돌아본다. 나는 정말로 누군가와 마주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 내 진심을 다해 내던지듯 글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나 회피해왔던 것 같다. 그것이 나를 비평할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그동안 나는 비겁하여 책으로 향했다. 나는 세계를 뒤흔들만한 깜냥이 없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고, 그 읽음을 쓰는 일이 여전히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비겁함은 언제나 망루에 올랐던 이들에 대한 비겁함이다. 그러나 나는 비평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보지 않는다.(그가 비겁하다는 말이 아니다) 비겁하기 때문에 물러설 수 있고 물러설 수 있기에 나는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비겁함을 대신할 호소를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잊지 말자고 못난 문장 몇 개나마 적어보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은 윤리들을 본다. 희망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라는 장 제목이 말해주듯 그의 산문은 시와 끊임없이 긴장하며 자신을 다잡는다. 어디로든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의 글에서 이 끊임없는 긴장을 본다. 나는 그에게서 비평가의 자세를 본다. 그 근본적인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읽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자부도 체념도 없는’ 그런 상태여야 한다. 실패를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조건을 갖춘 것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이제야 실패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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