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들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대학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들
서보명, 『대학의 몰락』
정수환
매년 늦가을과 초겨울이면 대학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 시기에는 대학교에서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그리고 각 과/반 학생회의 선거가 있다. 늘 선거와 관련하여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학생 사회는 무엇인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 학생 사회가 디디고 있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둘째, 대학에 입학한 이래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이슈는 법인화였다. 내가 관계를 맺었던 곳들은 대부분 법인화에 반대했다. 그런데 법인화를 반대할 때 도달하는 질문이 있었다. 법인화를 왜 반대해야 하는가? 법인화는 대학을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왜 용납할 수 없는 방향의 변화인가? 대학은 법인화가 아니면,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하는가?
셋째, 11월 초에는 수능 시험이 치러진다.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의 생각도 나고, 수능을 보는 친구들, 후배들의 이야기도 듣고, 무엇보다도 매년 바뀌는 입시 제도를 보면서 왜 입시 제도가 저런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 어떤 학생을 뽑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학은 어떤 학생을 선발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은 이 사회 속에서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한 명의 대학생으로서, 대학에 대한 질문은 무의식 속에 잠겨 있든, 혹은 의식적으로 고민하든 간에 항상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 시기면 더욱 더 그 고민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다. 대체 대학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운 이유는 세 가지 방향에서의 고민이 모두 다른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향에서의 고민은 대학생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방향의 고민은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세 번째 방향의 고민은 이 사회 속에서 대학이 어떠한 기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들은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회가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던 새내기 시절부터 안고 있고, 2학년 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구체화되었다. 그 이후 대학에 관한 글을 읽고 논의를 접할 때면 언제나 저 질문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방향에서의 고민에 대해 모두 답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인 대학에 대한 상을 나에게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대학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가령 많은 교수님들은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자 진리 탐구의 공간이라고 설파하셨다. 내가 다니고 있는 서울대학교의 모토인 “진리는 나의 빛”과 같은 말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는 다시 “어떤 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곳이며 “어떤 진리”를 추구하는가를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순간 오히려 물음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답이었다. 어떤 교수님들은 세계 수준의 학문을 시급히 따라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어떤 교수님들은 소수 학문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어떤 교수님들은 한국의 특수한 경험을 연구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 하필 그것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묻는 순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것은 답이 될 수 없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추상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시대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전혀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이 대답은 당장 기층의 과/반 학생회에서 구체적인 이슈들과 부딪히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록 친 기업적, 친 자본적인 학문, 상품으로 전락한 학문이긴 하겠지만 법인화가 된다고 해도 대학은 학문을 연구할 것이다. 당장 법인화를 반대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저런 대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보명 교수의 책, 『대학의 몰락』은 ‘학문의 전당’이라는 개념에 너무나도 한계를 느끼던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자, 나와 마찬가지로 대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독자적인 대학론을 펼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책을 ‘대학의 철학사에 대한 에세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대신 대학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로 인식하면서, 기존의 대학에 관한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준다. 그리고 현재 이 사회에서 논의되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과거의 논의를 딛고 있다는 점에서, 대학의 철학사에 대한 이해는현재의 대학론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대학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주 잊고 있는 점이다.1)
책은 최초로 대학이 나타난 서양의 중세에서 시작한다. 서양의 중세는 신학, 의학, 법학을 중심으로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를 거치며 중세의 대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것이 바로 근대적인 대학이다. 근대적인 대학은 당연히 중세와 전혀 다른 형태로 자신을 규정짓고 새로운 대학론을 펼쳤다. 근대적인 대학론을 최초로 펼친 철학자는 바로 칸트였고, 이후 훔볼트와 피히테 등 근대 대학의 선구자들이 등장한다. 이후 냉전 시대에 대학은 새롭게 변형되며, 이 와중에 스탠포드 대학을 비롯한 미국 대학들이 부상한다. 이어 현대에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학이 새롭게 개편되고 있다. 그리고 각 시기별로 등장했던 대학론은 모두 현대의 대학을 둘러싼 논의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가령 서울대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 법인화 문제만 해도 이 지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법인화 찬성과 반대 양측은 논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주장을 끝없이 되풀이할 뿐이다. 양자 사이에는 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대학에 대한 상이 너무나 다르기도 다르며, 자신의 생각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다른 대학론을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현재까지의 대학이 어떠한 공간이었으며, 앞으로 어떤 공간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법인화를 둘러싼 양측, 특히 대학 본부측의 입장에는 여기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 단순히 순위 상승을 통한 좋은 대학 만들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칸트는 국가와 신이라는 외부에서 권위를 찾던 중세의 대학과 달리, 이제 대학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두고 철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철학은 현재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칸트의 주장은 지금 이야기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대학’, ‘진리 추구의 공간으로서의 대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이 순수하게 ‘진리’만을 추구하는 공간이었던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의 이상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근대 대학이 태동하기 이전에 제시된 근대 대학의 상이었다.
칸트 이후 실질적인 근대 대학의 전개를 주도한 것은 피히테, 훔볼트 등 독일의 철학자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베를린 대학이었다. 베를린 대학은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으로, 미국과 일본 등의 후발 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대학은 프랑스 혁명의 지적 영향 하에서, 그리고 프러시아가 프랑스에게 패한 위기 상황에서 출발했다. 왜 프랑스에게 패했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시대적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베를린 대학은 한 민족의 학문과 경험을 구체화하며 민족 국가(nation state)들의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성장했다. 민족 국가의 시대에, 대학은 민족과 국가를 섬겼다. 학문도 여기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민족 국가가 몰락하면서 베를린 대학 모델의 이상은 크게 쇠퇴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대학에게 한국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한국인의 경험을 언어화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잃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민족 국가가 힘을 잃으면서 이들을 대체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냉전 시대의 대학들이다. 냉전 시대 당시의 미국의 대학들은 동서 이념 분쟁의 속에서, 국가의 경쟁력을 증대시키고 전략적 사고 속에서 소련과 공산주의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국가는 막대한 양의 연구비를 통해 이들을 지원했고, 연구비를 받아 연구한다는 행위를 진리 추구의 본질처럼 이야기한 대학들이 이를 따랐다. 냉전이 무너지면서 과거와 같은 행위가 많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도 대학의 연구 용역은 국가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국가 경쟁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의 연구 용역을 통해 대학을,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학이 연구하는 학문의 방향을 통제한다. 최근의 ‘국가 석학’이니, ‘국가 과학자’니 하는 것들이 이 맥락 하에서 볼 수 있으며, 대학의 학문 수준을 국가 경쟁력의 척도 중 하나로 생각하는 논자들도 이 맥락 하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난 지금, 대학은 다시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현대 대학의 새로운 변화와 이에 대한 비판은 대학의 현재상을 반영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 대학의 화두는 ‘경쟁’이다. 대학은 이제 여론과 자산 규모를 중심으로 순위가 매겨진다. 이 순위에서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학은 더 많은 자산을 굴리고, 경영학적 마인드를 바탕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중세 대학에서 신학이 차지했던 위치는 이제 현대의 신인 자본을 모시는 새로운 신학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레이건 시대에 특히 가속화되었다. 이제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한때 좌파 지식인들의 피난처이자 비판적 지성의 장이었던 대학은 기업이 되었다. 대학은 신용 평가 회사에서 신용 등급 판정을 받고, 대학의 주식이 거래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평가한다. 이 과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대학은 뛰어난 대학이 되고, 그렇지 못한 대학은 도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들은 최근 이를 따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오로지 순위를 높이고 자산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대학의 법인화를 단행하고 있다. 두산대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중앙대는 이 분야에서 가장 독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균관대와 카이스트가 변화한 것은 오래되었다. 서강대는 성직자 아닌 총장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보는 소위 명문 대학뿐 아니라 모든 대학들의 화두다. 그러나 이 글로벌 경쟁, 순위 상승 경쟁은 너무나도 맹목적이다. 경쟁해야 하고, 순위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경쟁이다. 경쟁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렸다. 가령 서울대학교 법인화 추진 위원단이 보낸 다음과 같은 메일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서울대학교는 기존 국립대학체제에서 벗어나 2012년 1월 보다 큰 자율과 책임이 요구되는 국립대학법인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서울대학교 법인 출범은 보호와 규제를 근간으로 하는 국립대학체제에 안주하여서는 세계 유수대학들과의 대등한 경쟁이 더 이상 어렵다는 매우 절박한 현실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고등교육은 학생선발과 교수채용 뿐만 아니라 재정운영에서도 국가의 규제를 받아왔습니다. (하략)
이 메일은 서울대학교의 법인화 이유를 경쟁이 어렵기 때문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재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경쟁의 목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경쟁이며, 여기에 대한 고민은 없다. 평가에 대한 종속과 맹목적인 경쟁.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대학에 남아 있는 대학론이며,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대학론이다.
이상의 대학론이 서구 사회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면, 한국적인 차원의 대학론도 존재한다. 저자는 한국의 대학론에 성균관의 영향을 이야기한다. 성균관은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한편 한국의 최고 교육 기관이었고, 이 두 가지는 공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균관의 전통, 즉 교육과 배움, 그리고 유교적 제사의 기능이 함께하는 대학의 전통은 단절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교적 영향을 받은 학벌 사회에서, 한국의 대학이 수행하는 기능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학론이 분명 존재한다. 성균관을 통해 과거의 자격을 얻고, 다시 이것이 사회적 신분을 얻는 수단이었던 것처럼, 한국의 대학은 학벌이라는 일종의 신분을 부여한다. 그리고 보다 명문 대학은 보다 높은 신분으로 통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대학은 공정한 평가 방식을 통해 가난하지만 잠재력 있고 성실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신분 상승과 계층 이동의 통로로 기능하기를 기대 받는다. 이 전통이 있었기에 본래 유대인들을 배제하기 위한 용도였던 입학 사정관 제도가 한국에서는 저소득층을 우대하기 위한 제도로 변형되어 도입될 수 있었다.
서보명 교수는 이상의 다양한 대학론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학은 역사적 사회적 구성물이며, 대학에 대한 논의 역시 각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의 역사와 철학사에 대한 지식이 없이 대학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를 혼란시키기 딱 좋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대학론은 부재하지만, 대신 대학의 철학사를 정리해 주는 이 책의 가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첫 번째 한계는 이 책이 학생들을 전혀 조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은 대학의 철학사와 제도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 주제에 천착한 나머지 대학의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인 학생을 단순히 교육 서비스에 대한 수동적 소비자의 위치로 격하시켰다. 물론 대학은 외적으로 사회와 소통하여 형성되는 공간이며, 내적으로는 그 교육 이념과 제도가 중요한 것이 맞다. 그러나 대학은 또한 제도와 교수, 그리고 학생의 상호 작용 하에서 형성되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저자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나에게 특히 큰 한계로 다가왔다. 앞서 대학에 대해 품고 있는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은 해결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반면, 첫 질문은 이야기조차 되지 않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질문이야말로 대학을 살아가는 한 명의 학생으로서 가지게 되는 가장 실천적인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의 대학에 대한 독서를 정리한 에세이로 책을 정의하는 만큼, 이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생의 존재를 완전히 지운 대학론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저자는 대학의 중요한 전통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유럽은 물론, 미국이나 한국의 대학들이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실천과 참여를 강조하는 강력한 전통이다. 대학은 사회의 조건을 수용하는 공간임이 분명하지만, 또한 대학 역시 사회에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사회 참여의 전통을 강조하는 전통은 항상 강력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 노학연대와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강력한 사회 참여의 전통이 있었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대학은 68혁명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투쟁했으며 많은 논쟁이 터져나왔다. 반(反) 대학(Anti-University)과 같은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기도 했다. 사실 책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80년대 이후 대학에서 신자유주의의 반격은 어느 정도 60년대 후반 대학의 급진적 에너지에 자극받은 것이 컸다. 그러나 책에서 이 이야기는 단지 자본의 반격 이전의 전사(pre-history)로 취급될 뿐이다. 하지만 대학의 사회 참여적 전통은 분명 존재했고, 오랜 시간 동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대학론은 역시 불완전하다고밖에 생각될 수 없다. 책을 대학의 철학사로 한정하더라도,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전통은 대학의 철학사와 지성사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첫 번째 한계와 두 번째 한계는 많은 부분 통하는 점이 있다. 학생들은 오랫동안 대학의 실천적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국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크게 힘이 약화되었지만, 한국의 대학생들은 사회 참여적이고 실천적인 전통들을 지켜 왔었다. 또한 학생이 빠진 대학론, 실천적 전통이 빠진 대학론은 학생을 대학 제도의 수동적 수용자로, 대학을 사회와 담론의 수동적 수용자로 격하시킨다는 점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물론 저자가 이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을 “관점은 있지만 현실성은 없는 글” 이라고 평가하는 모습과 가장 실천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을 부분을 간과하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추측이 과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모습을 취하지만 책머리에서 대학의 현실이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지 오래며, 자신의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이어 책의 말미에서는 벤야민을 인용하며 금융자본주의의 늪에서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체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책의 독자들이 극복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던 대학에 대한 고민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물론 이 책이 대학에 대한 나의 고민을 완전하게 해결해 준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한 두 권의 책을 읽고서 해결될 고민이었으면 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의 실마리를 던져준 책임과 동시에, 대학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대학은 중층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복합적인 공간이다. 학생과 교수, 교직원, 그리고 대학의 제도가 어우러져 상호 작용하면서 담론을 생산한다. 그 담론은 실천적인 전통, 유교적인 전통, 칸트적인 전통, 민족적인 전통 등 다양한 범위를 포함한다. 그리고 대학은 사회 외부와 상호 작용하며, 사회에 영향을 주고 다시 영향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대학에 대해서 가지는 상은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수많은 상들 중 어떤 상이 현재의 대학에 바람직한 상이며, 어떤 전통이 신자유주의에 함몰된 대학에 새롭게 생기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학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역시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대학이 결국에는 변화할 수 없다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