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맛 철학자 지젝의 위험한 수작

일반부문 3등작

병맛 철학자 지젝의 위험한 수작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김성민


인물도 사상도 결국에는 늙는다. 어느 시대에 아무리 참신하고 전복적이었다 해도 그 다음 세대까지 젊음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세기의 탕아였던 프로이트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전락하였다. 플라톤과 칸트마저도 분명 당대에는 일면 급진적인 위험인물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는 불로의 존재들이 있다. ‘건방진 어린 놈’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문제작 중 하나가 필독서가 될 때쯤이면 반드시 또 다른 문제적 수작을 출판하여 뭇매를 자처해 맞는다. 개봉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최신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장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MTV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슬라보예 지젝은 환갑을 넘기고서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건방진 어린 놈이다. 그런 그가 뒤늦게 폭력담론에 가담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폭력이란 무엇인가』 (2008)를 내어놓았다.

폭력이 일부 극단주의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인간 보편의 공공재라는 사실을 구태여 강조하는 것은 이제 진부하다 못해 폭력적이다. 적어도 아렌트 이후로 폭력은 인류 모두의 유산이 되었으며 존 쿳시나 헤르타 뮐러와 같은 소설가들도 수려한 문장으로 폭력을 묘사해왔다.폭력은 경제, 외교, 환경 분야와의 공생관계 속에서 어느새 진보 성향 인물이라면 ‘머스트 해브’해야 하는 지위재가 되었다. 이처럼 폭력담론 시장이 이미 과공급 상태인데 때마침 지젝이 합류하니, 그가 유행에 편승하려는 줄로 오해하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오독하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지젝이 아직까지 써온 책들의 계보만 보더라도 그의 관심사가 폭력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만 여러 전작들에서 꾸준히 밝혀온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을 폭력이라는 트렌드에 맞게 코디하였을 뿐이다.

지젝을 멋대로 해석하여 과도한 숭배나 폄하로 향하게 하는 주된 원인은 MTV 철학자답게 키치 공산품을 진열장에 세련되게 전시해놓은 듯한 문장에 있다. 마치 영화 리뷰만 늘어놓은 듯한 『폭력이란 무엇인가』 속에서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지젝이 얼마나 ‘병맛’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지젝이 오늘날 살아있는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인터넷 신조어 병맛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병맛은 주로 만화에서 인물과 서사 등의 내러티브성 요소를 의도적으로 엉성하게 구성한 뒤 갖은 패러디와 풍자로 일관하다가 극단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는 온라인 문화 사조이다. 영화 중에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작품들이, 병맛 만화 중에는 <이말년 시리즈>가 감상자의 비창의적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서로 만나면 발작을 일으킬만한 두 장면을 이어 붙이듯, 지젝의 문장도 자주 독자를 배신한다.

지젝은 진리를 파괴하는 들뢰즈의 액션과도 마지막 남은 이성의 수호자인 바디우의 순정과도, 심지어 자기 작품세계의 시점(始点)이었던 마르크스의 르포나 라캉의 사이코드라마와도 교점은 있을지언정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는 해체주의자들이 그토록 폐기하고자 했던 식상한 정신분석의 알레고리들을 차용하되 이를 가장 최근의 정치적 사건들, 시대를 망라하는 예술 작품들과 나란히 두고 독해한다. 초기작 『삐딱하게 보기』 (1991)를 통해 충분히 드러났듯 서스펜스 스릴러에서 칸트를, B급 좀비 호러에서 민주주의를 발굴해내는 지젝의 철학은 그야말로 장르불명 병맛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지젝은 폭력담론 매니아들의 기대를 온전히 채워주지 않는다. 그는 폭력이라는 언어로 정치철학 웅변을 쏟아낸다.

책을 이루는 일곱 개의 장 각각에 저자는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와 같이 일반적으로 악보에 기입하는 빠르기말을 표기해놓았는데, 이는 그의 호흡이나 독자의 뉴런 활성 속도와도 일치한다. 느리게, 풍부히 감정을 담아서 읽으라 권하는 첫 장에서 그는 일단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폭력의 형태를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나눈다. 이어서 객관적 폭력을 다시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양분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폭력행위의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보이는 주관적 폭력의 너머에 언제나 이를 생산하는 객관적 폭력이 자리함을 명시한다. 시신과 화약이 섞인 냄새가 탐욕스러운 군수업자 때문이라는 정도의 피상적인 분석이 아니다. 주관적 폭력을 비정상적 상태로 인식하는 작용 자체가 정상적인 상태를 설정하고 유지하려 하는 객관적 폭력의 결과라는 것이다(21).

객관적 폭력의 두 축 중 하나인 상징적 폭력을 설명하며 저자는 ‘공통의 장소로 간주되는 하이데거’에 의존한다.하이데거가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상징적 폭력을 ‘존재의 집’이라 명명한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지젝은 강조한다(107). 하이데거는 상징적 폭력을 주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시기에 이전 시대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신세기적 질서를 창시하여 부과하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지젝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거부반응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그가 단순히 트위터를 혐오하는 보수 논객처럼 최첨단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우매한 복고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 폭력이 그리스 도시국가나 중세 유럽에서 고착화한 사회적 폭력 구조를 다가올 시대에도 재생산하리라 예측했기 때문에 기술의 지배를 우려했다는 것이다.

바디우도 ‘공통의 장소로 간주되는 하이데거’를 공유하기 때문에 특히 폭력에 있어서는 지젝과의 교차점이 생긴다. 그가 분류하는 실재하는 악의 형상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상징적 폭력은 그 중에서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하는 파국으로서의 악과 상통한다.파국으로서의 악은 종국에 하나의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명명하려는 시도로 악을 도출한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지젝과 바디우는 공통적으로 흑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집단이 어떻게 언어의 폭력을 통해 열등화되는지 예를 들어가며 보인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2003)에서 마을 전체의 이상화된 가난을 향유하는 여주인공이 자신에게 주민들이 가하는 주관적 폭력을 그대로 견뎌내는 것은 그들에게 상징적 폭력을 돌려주는 위선이다. 끝내 이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면서야 비로소 그녀는 존재의 집에서 탈출한다(265-267).

하이데거의 유적에서 벗어나 저자의 주된 생각을 내비치는 객관적 폭력의 다른 한 가지,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목은 빠르기말 ‘몰토 에스프레시보’에 맞추어 감정을 충분히 담아 읽어야 한다. 지난 십 수년 사이 우파는 우파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중도파는 또 중도파대로 지젝과 원한을 맺었는데, 이는 대부분 지젝 자신이 자청한 일이었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그의 시선이 좌우를 막론하고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체제—매운 카레 전문 식당의 메뉴와 같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맵기는 마찬가지인 자본주의의 여러 형태들—중 하나에 만족하는 이들 모두에게 삐딱해 보이기 때문이다. ‘구조’라는 단어에서 시대별로 다채로운 취급을 받은 푸코의 광우들을 먼저 떠올린다면 현실감각을 상실한 독자이다. G1 중심 세계질서와의 단절 속에 도시농경으로 살인적인 경제봉쇄를 극복한 카스트로 형제를 찬양하려는 독자도 지젝과는 맞지 않는다. 저자는 가식을 벗어 던지고 마침내 자신의 지론인 사회주의 무첨가 공산주의론을 펼친다.

지젝은 철저하게 현실 속 언제 어디에서 구조적 폭력이 이빨을 드러내는지 예를 들어가며 짚어낸다. 더 이상의 언급이 지면 낭비인 자유주의자나 여러 종류의 근본주의자들 대신 그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가장 대표적 사례로 들어 이들이 교활하게 가공하여 생산하는 구조적 폭력의 실상을 폭로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용의자들로 저자는 초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어용 철학자들을 지목한다(44-45). 좌파 싱크탱크의 아이디어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자본주의를 반박이 불가능한 무결점의 체제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겉으로 주관적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하지만 그 존재 기반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관적 폭력이 중단될 수 없기에, 두 얼굴을 한 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구조적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체하는 HIV 확산이나 자영농 몰락과 같은 폭력의 여러 단상이 경영방침상 필연적으로 나오는 부산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기업이나 국가의 경영자들에 대해 논하면서 저자는 ‘빅 브라더’에게 온갖 저주를 쏟아 붓는 손쉬운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는다. 차베스에게 결정적인 집권 기회를 준 베네수엘라의 살인적 대중교통 요금 인상과 같은 일은 세계 다른 곳에서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최고 수준의 악이라면 위선 정도는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국가』 속 트라시마코스의 기준에 미달하는 어설픈 구조적 폭력은 지구상에서 도태한지 오래이다.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체하며 특허 괴물회사를 차려 전 세계의 지식을 매점하려 하는 IT업계의 행태는 트라시마코스가 보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 (2006)에 등장하는 민주적 독재자가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펜트하우스에서 캐주얼 차림으로 장애인 게이 파트너와 함께 있는 모습에서 지젝은 구조적 폭력의 세련된 가해자를 읽어낸다(59).

사실상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사회주의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이들에 대해서도 지젝은 가차없이 비웃는다. 그들이 자신의 내적 부정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라며 지젝은 냉소한다. 그는 세계화 논쟁의 두 축 중 포르투 알레그레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거나 다보스에 포함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42).비판적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취했어야 할 최소한의 행동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2009)에 밝혀두었다. 지젝이 보기에 현재 실패한 좌파는 몽고 전사가 자신의 아내를 겁탈하는 사이 그의 고환을 받치고 있으면서 그곳에 먼지를 묻혔다며 기뻐하는 러시아 농민과 같다.전사를 거세할 생각은 품지 못하고 무력한 저항만 하여 유의미한 결과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고작 강단이나 서재에서 거대한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미세한 흠집만을 내온 좌파에 대한 지젝의 평가는 냉혹하다.

지젝이 끝내 사회주의를 공산주의 실현의 최대 장애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고환을 받치는 하인이 되어버린 무력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이 더 복지를 잘 할 수 있다 주장하여 사실상 정당 간 극명한 정책 대결이 존재하지 않는 많은 선거를 보면 흡사 이미 세계가 충분히 사회주의화된 듯하다. 하지만 『천 개의 고원』 (1980)의 비유를 그대로 빌리자면 아무리 장기말 대신 바둑알을 쥔다 해도 장기판 위에서 바둑을 둘 수는 없다. 폭스콘 부품공장 농민공들의 자살 없이도 신형 아이폰은 출시될 수 있으며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농가의 자녀들이 학교에 갈 수 있고, 나아가 충실한 소비가 이들의 삶도 개선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거액의 자선을 무자비한 이윤 추구와 맞바꾸며 현실을 회피하는 논리가 되어줄 뿐이다.

지젝은 객관적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 본성과 이를 수행하는 장본인들, 그리고 그들이 폭력을 확산하는 원인을 밝힌다. 하지만 이를 한심해하며 혀를 차는 데에서 그친다면 지젝이 아니다. ‘알레그로’에 맞추어 빠르게 읽어야 할 제 6장에 저자는 신적 폭력을 배치한다. 『삐딱하게 보기』에서 사용한 히치콕식 얼룩을 거의 그대로 재활용하여, 벤야민이 무혈의 프롤레타리아 폭력에 붙인 이름인 신적 폭력과 연관 짓는 6장은 『폭력이란 무엇인가』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독자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의 공산주의론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동시에 신적 폭력이 행위로의 이행을 거치기까지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하여 문화대혁명 등의 예를 가지고 솔직히 밝힌다.

신적 폭력의 유효성 자체를 의심하는 지식인들도 있다.하지만 적어도 지젝에게 신적 폭력은 단 하나 남은 진정한 폭력이다. 그는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대규모로 가장 잔혹하게 주관적 폭력을 자행한 이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며 조소한다(297). 자신이 딛고 있는 체제를, 장기판을 바꿀 뜻은 품지 못하고 이를 지켜내고자 발버둥쳐온 그들의 모습을 지젝은 오히려 안쓰러워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역사의 종말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본주의는 매운 카레와 같은 단 하나의 메뉴가 되었다. 뿌리깊게 정착한 자본주의, 그리고 의회정치와 복지정책이라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수족이 된 인간 역사의 다른 발명품들이 모두 무용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지젝에게 신적 폭력 외에는 달리 무기가 없다.

병맛 컨텐츠가 주로 따르는 서사 구도를 ‘기승전병(起承轉病)’이라 칭한다. 작품의 결말이 자연스러운 서사의 흐름으로부터 도주하여 허무하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암시적으로 주제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도 심각하게 병맛이다. 객관적 폭력, 특히 구조적 폭력의 원인과 책임자를 규명하는 책의 초중반부가 기와 승이라면, 또 하나의 폭력이자 유일한 폭력으로 신적 폭력을 내세우는 후반부는 전에 해당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진정한 폭력, 자본주의의 매운 맛을 고르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다른 요리를 택하는 단계로서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조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저자는 신적 폭력으로 민중의 소리를 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독자를 선동할 대로 해놓은 뒤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 (2007)에 등장하는 투표 보이콧을 한 가지 대유로서 던져줄 뿐이다. 그는 심지어 벤야민 이후 늘 함께 다루어지는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명확히 구분할 수도 없다고 한다(275).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인 신화적 폭력으로부터 그 어떠한 수단도 아니고 다만 주권자의 소리일 뿐인 신적 폭력을 식별하는 일은 오직 이에 가담한 주권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체 게바라와 같이 잔혹할 정도로 순수한 혁명가의 집념에 호소할 정도로 신적 폭력의 구현에 대해서는 지젝의 구체적 도안이 공개되지 않는다.

지젝은 병맛 충만하게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결론을 맺는다. 이를 보고 실망하는 독자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와 같은 지젝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신적 폭력의 행사가 반드시 특정한 물리적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신적 폭력의 이행이 때로 스스로를 옭아매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그의 마지막 말을 유념해야 한다. 한때의 신적 폭력이 거쳐간 타락과 자기파괴의 공정을 이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공허한 듯한 책의 결말은 끝내 문제를 풀지 못한 저자가 내놓은 백지 시험지가 아니다. 각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 소극적인 보이콧으로도, 급진적인 행동으로도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당부이다. 후일 병맛 작가 지젝의 전체 작품세계를 놓고 보면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분명 과도기적 작품에 속할 것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가 위험한 수작(手作)을 부린 수작(秀作)임은 분명하지만, 지젝은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이 남은 어린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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