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의 그림자, 白의 그림자
새내기부문 2등작
百의 그림자, 白의 그림자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이호섭
1. 아름다운, 슬픈 말들
세상에 어떤 말들은, 다른 말들보다 조금은 더 많이 닮은 것 같다. 이를테면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그런 말들. 이 말들은 서로 닮아서, 그 닮은 만큼 아름답고, 닮지 않은 만큼 슬픈 것 같다. 아름다워서 슬픈 것 같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 같다. 그래서 평론가 신형철이, 소설가 황정은의 소설 『百의 그림자』에 붙인 해설에서 “고맙다”(174)고 쓸 때, 나는 그녀에게 “미안해”라고 쓰고 싶다. 은교 씨에게도, 무재 씨에게도, 오무사 노인에게도, 여 씨 아저씨에게도, 유곤 씨에게도, 그렇게 쓰고 싶다. 미안하다고. 당신의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설 때, 그것이 당신의 입을 먹으려 할 때에, 나도 또한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의 입도 이미, ‘입을 먹는 입’은 아니었는지, 그대들을 언제부터인가 깨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깨무는 것이 소리가 아닌 침묵이어서 거부할 수조차 없었을 텐데, 나는 또 아파하고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쓰고 싶다. 미안하다고. 평론가는 어떻게든 말해왔지만, 나는 말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차이가 못내 슬프기 때문에, 나는 차마 고맙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쓴다.
하지만, 그래서 고마운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미안해야 할 사람들을 알려주어서 고마운 것이 아니겠는가. 평론가가 이 소설 앞에서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한”(192) 것은, 그가 고마우면서 또 미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와 닮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미안하면서 또 고마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 이제 누가 미안함과 고마움이 닮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 소설에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이, 적어도 둘은 확실하게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둘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의 수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합친 것보다 많을 지도 모른다. 설령 그게 아니라도, 이미 이 소설이 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2. 사랑한다는 말
그런데, 내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 어째서인지 그 말은 하기가 조심스럽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끔씩 사랑 그 자체보다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워서, 소중하게 아끼고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언어는 결핍에서 오는 것이므로, 그것을 발화하는 순간 무언가가 빠져나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까. 아니면 충분히 솔직하지 못해서 나를 위장하고야 마는 기만적인 정당화일까.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따금 그러한 사실은 과연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그 되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 의심이고, 그래서 부정적인 대답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품고 있다. 그런데 보통은, 그런 의문일수록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확률이 높은 것이 얄궂은 이 세계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 때 이 소설은 그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도, 사랑한다는 문장 한 줄도 없이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교 씨와 무재 씨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대화에서 가장 직접적인 애정의 표현은 “좋아합니다”(22)라는 다소 소박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설의 곳곳에서 사랑을 말한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그들의 대화와 서술에서 사랑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실 전력을 다해”(신형철, 186)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폭력도, 어떤 섣부름도 함부로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떤 어둠도, 어떤 허무도 우리의 입을 막도록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13)시라고 말하는 무재 씨의 다그침이 그러하고,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들을 떠올리는 그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덤으로 얹힌 한 개의 전구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그들의 대화가 그러하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함께 걸어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그러하다. 탁한 달빛 아래에서도, 그 빛 아래 부옇게 늘어져 있을 그림자를 등지고서도, 함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풍경이 그러하다.
도저히, 사랑이라는 것이 없으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왜냐하면 사랑이란, 간단히 말해 책임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하는 어떤 행위나 발화가, 그리고 그것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의 그것들과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몸짓과 언어는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음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을 상상하고 나눌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존재함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나는 ‘느낀다’고 썼다. 이렇게까지 나는 이 글에서 앎에 대한 결벽증과 언어에 대한 불신을 표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태도가, 이 소설에 대한 글이기에 가능하다고, 심지어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서 아무것도 모르고자 하는데, 아무것도 함부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데, 내가 그렇게 섣불리 말해서야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사랑하고 있는 나에게, 그것은 이미 가능한 일이 아니다.
3. 우연의 순간
아는 것이 힘이 되고 돈이 되므로, 결국 모든 것이 되어 욕망의 근본에 천착하는 지금, 기꺼이 모르고자 하고 남겨두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그래서 눈부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들의 관계는 그래서 아름답다. 은교가 어두운 것들 앞에서 자신을 놓으려 할 때, 임계를 넘어버린 무의미에 굴복하고자 할 때, 우연히 울린 전화벨은 그래서 반갑다. 그런 순간에 그런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은, 필연적 전개를 규범으로 삼는 소설에서 어쩌면 오류이다. 하지만, 반갑다는 이유로 그 오류는 충분히 허용될 만하다. 그 곳에서 은교가 삼켜졌다면, 어두워져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상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당할 수 없다, 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착각이다. 당신은 이미 수많은 순간을 감당해왔다. 감당해온 나머지, 놓아버렸을 뿐이다. 놓아버린 나머지, 무뎌졌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은 다른 어떤 필연보다도 날카롭고 첨예한 윤리 의식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눈앞에서 우연히 구제되는, 저 멀리서 우연히 구제하는 순간은 그렇게 우리가 지나쳐온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정전이라는 그 상황에서 울린 전화벨에도 의구심을 품었다. 정전인데, 전화라니. 물론 핸드폰이라 생각하면 불가능한 상황도 아니고 그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핸드폰이라는, 휴대폰이라는, 휴대전화라는 많은 말들 대신에 문장에 쓰인 전화기라는 단어를 볼 때, 나는 얼마쯤 더 행복해지는 듯하다.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우연이라 한다면, 나는 오히려 더 기쁠듯하다. 우연에 의해서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이 장면이 의도된 것인지 우연인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조차 즐겁다. 나에게 유쾌한 상상의 공간을 허락한 문장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공간을 허락하는 것. 나에게 조금씩, 천천히 나아갈 여지를 주는 것. 그렇게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이 가진 수많은 미덕 중의 하나이다.
어느 소설가가 그랬던가. 시를 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고 계속해서 써나가는 것이라고. 사랑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인가 하면 저러한 것이고, 저러한 것인가 하면 다시 그러한 것이라며 쓰는 것이라고.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에 대한 해설을 쓴 신형철이 이 소설에 대해서 “일곱 개의 절로 된 장시”(174)라고 말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뜻일 것이다. 어떠한 말은 그것이 의미하고 함축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 그 말을 사용하는 순간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담겨서 구겨진다. 구겨진 의미들과 사실들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지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황정은은 이 역설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사랑을 말할 수 있도록 한다.
4. 그리고 정치
말했듯이, 『百의 그림자』는 연애 소설이다. 그러나 은교 씨와 무재 씨의 사랑은 단순히 서로를 향하고 있지 않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그들이 살고 있는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그 공간에 대한 배려와 윤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그 공간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윤리로 이어진다. 은교 씨와 무재 씨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어떠한 폭력과 상흔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 침윤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동에서 마동까지’라고 말하면 편할 것을 굳이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29)이라고 말하고,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 어디로 갔을”(112)지를 못내 안타까워한다. 그 공간의 물화를 막고, 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화석화를 막고, 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망각되는 것을 막는 것이 그들이 하고 있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일종의 저항이다. 저항이라면, 그것은 결국 정치적 행위이다. 이렇게 황정은의 소설에서 사랑은 정치적 사유와 행위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이를 그려내는 황정은의 언어는 너무나도 소박하다. 담백하고 시적인 언어의 리듬에는 폭력적인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용산의 전자상가라는 공간적 배경과 철거라는 상황에서 그것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황정은은 르포 「입을 먹는 입」에서 쓴 것처럼 날카로운 묘사를 하고 있지 않다. 이 르포에서 그녀는 국가-자본 권력의 폭력성과, 그것을 은연중에 용인하는 침묵에 대해서 냉철하게 서술한다. 이를 볼 때, 그녀에게 시스템을 묘사할 역량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자의 일어섬’이라는 환상으로 표현되는 내적 삶의 한계성이 효과적으로 나타나있을 뿐, 그것을 야기하는 현실적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언어를 삼간다. 이는 앞에서 본 소설 속 인물들의 윤리적인 ‘무지’와 관계가 있다. 그들은 애초에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사람들의 그림자를 일어서게 만드는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지. 어째서 그 쫓겨남은 하나의 단어 안에서 구겨져서 잊혀야만 하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이러한 무지는 소설의 결말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어두운데 누굴 만날 줄 알고요.
만나면 좋죠,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요.― 『百의 그림자』, 167쪽
“마치 섬 전체가 무재 씨의 그림자인 듯”(166)한 공간에서 은교는 두려움을 느낀다. 외부의 폭력적인 시스템이 완전히 내재화된 듯 한 그 공간에서,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조차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무재 씨는 이를 털어내듯 ‘그러려고’, 모르는 누군가를 알고 사귀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가벼이 얘기한다. 나는 ‘가벼이’라고 썼지만, 과연 저 대화는 가볍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섣불리 알고자 하지 않는 배려로부터 비롯되는 태도는 아닐까.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우리가 그곳으로 걸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세계로 남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폭력과 상흔이 가득하고 날선 언어가 오가는 세계라 해도, 그것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직 그들을 모르고, 그러므로 그들과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는 저항의 조건이고, 그러므로 정치의 출발점이다.
5. 하얀 그림자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아마 처음에 ‘백의 그림자’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하얀 그림자?’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미학적인 역설을 상상하면서, 어떤 예상된 문학적 쾌감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소설은 ‘百’이라는 단순한 수사를 사용하면서 이를 포기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듯, 소설의 표지는 百이라는 한자가 큼지막하게 서 있다. 대관절 이 수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百은, 흔히 ‘많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 정도면 된다. 많다. 그림자는 아주 많다. 나에게 있음은 물론이고, 너에게도 있으며,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 그림자도 아주 많을 것이다. 사람뿐이겠는가. 빛이 내리쬐는 한 어디에나 그림자는 있지 않겠는가. 괴물처럼 바로 선 건물 옆으로 길게 뻗은 그림자에 삼켜진 경험이 없는가. 그 속에서 햇빛이 보이지 않아, 문득 절망한 적 없는가. 결국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면, 그림자는 많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황정은은 단순히 이러한 보편의 영역에만 그림자를 남겨놓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르다.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만, 그 그림자의 사연과 역사라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어느 한 사람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니, 그림자 또한 완전히 같을 수가 없다. 그림자 또한 ‘이빨’이 있고, “이빨 달린 것에 붙은 놈이니 당연히 있지 않겠”냐마는, 사람들의 치열이 모두 다르듯 그림자도 그 깨묾의 형상이 저마다 다르지 않겠는가. 그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섣불리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림자에게도 폭력이 아닐지 말이다.
굳이 어느 정치 철학자의 개념어를 빌리지 않아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명하다. 누구나 그림자는 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이 이야기를 하면 내가 듣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당신이 듣고.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점에서 어느 정도 같아지는 것은 아니겠는가. 오히려, 하나라는 환상을 버리자. 하나로 같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내려놓도록 하자. 그러면, 百은 白이 되지 않겠는가. 어둠을 빛으로, 채워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 소설이 가진 순백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어렴풋이 보이지 않겠는가. 하얀 그림자를, 이제는 마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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