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금꽃나무를 읽는다

일반부문 3등작

다시, 소금꽃나무를 읽는다

김진숙, 『소금꽃나무』

정재원


선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가 기존의 지배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박원순이라는 개인이 서울 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상징하는 민주주의, 소통, 복지, 반개발 등의 가치가 지지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멀리는 재스민 혁명으로부터 월가 점령 시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의 목전에서 조중동을 무력화시키고 일어난 SNS 선거 혁명에 이르기까지, 최근에 나타난 일련의 변화들을 목격하면서 나는 모처럼 세상이 조금은 꿈쩍이는 듯한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었던가.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의 탐욕은 수많은 인간의 생존을 안전선 밖으로 밀어냈다. 저들이 독차지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경쟁하고 반목했다. 인간관계는 파괴됐고 더불어 우리의 인간성도 하향 평준화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 기꺼이 복종하고 살았고 주체나 자존이라는 개념은 망각의 상자에 넣어 가슴 속에 깊게 숨겼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이던가. 한국 사회의 수구 세력들이 잃어버린 십년이라 언급했던 그 시기는 사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잃어갔던 십년이라 할만 했다.

한 쪽으로 편향된 역사가 길게 펼쳐지면 반드시 그 반대 방향의 힘이 생겨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착취와 억압이 얼룩진 자리에도 자연스레 저항의 꽃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자각을 꽁꽁 숨겨놓고 노예처럼 살았다 하더라도 어느새 우리의 의식은 나는 인간이라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 순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정도가 아닐까.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회 변화가 확인시켜준 사실이다.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60-70년대의 낭만, 80-90년대의 학생운동과 같은 자기규정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루저 세대’, ‘잉여 세대’ 같은 패배적 자조이거나 ‘아프니까 청춘’같은 기성세대의 거짓말뿐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자신을 규정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나온 청춘을 온전히 평가할 수도, 앞으로 겪을 인생을 온전히 기획할 수도 없다. 생각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세대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전개의 형식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끊임없이 구분한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철저한 세대론이다. 책에서 젊은 세대는 화자고 기성세대는 청자다. 강사인 저자는 자신이 수업에서 만난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최대한 가감 없이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기성세대가 이런 사실들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파는 경제적인 이유로, 좌파는 정치적인 이유로 젊은 세대를 비난한다. 저자는 그들에 맞서 젊은 세대를 변호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성세대인 ‘우리’는 청춘을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올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어인 ‘우리’가 저자 자신과 저자가 비판하는 기성세대를 지칭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연대

억압을 당하면 반드시 저항하는 우리의 인간성만큼이나 이 세상을 바꾸는데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도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더 강력한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 그리고 다른 인간과 관계 맺으려는 본능이 바로 그것이다. 저항성이 우리 가슴 안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씨라면 공감과 관계에 대한 지향은 잘 마른 장작이나 불이 고픈 기름이다. 그 불이 타오르면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 손을 잡는 ‘연대’라는 형태로 그 실체를 체험할 수 있다.

다시 김진숙의 책을 꺼내든 이유가 그것이다. 김진숙이 <소금꽃 나무>에 펼쳐놓은 언어들을 단 두 단어만 두고 요약해야 한다면 난 공감과 연대를 남겨놓겠다.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글들은 내 머리에 대고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가슴에 대고 말을 건다. 남이 어땠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말하지 않고 자신이 공감했던 것, 연대하고 살았던 것만큼만 이야기 한다. 담백하게 가슴을 때린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어디쯤에 깃발이 있다고 논하는 글이라면 그 타당성에 따라 고개를 끄덕일 순 있지만 나를 당장 행동하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가 자기 걸음으로 덤불숲을 헤치고 길을 내면서 여기까지 온 뒤에 하는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는 기꺼이 당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김진숙의 이야기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공감과 연대는 전태일의 삶이기도 했다. 전태일은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현란한 지식으로 자신을 강화하려 하지 않았다.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굶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세 시간 거리의 집까지 걸어가는 그런 하루하루의 삶 속에 있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은 많은 갈등 속에서도 그를 끝내 연대의 길에 서게 했다.

김진숙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처음으로 노동자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는 전태일을 만나게 된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나기가 내려 오후 작업을 못 하고 명휴(회사의 명령으로 쉬는 것)를 했는데, 비는 철철 오고 빨래하기도 그렇고 갈 데도 없고해서 노느니 장독 깬다고 심심파적으로 그 책을 들척거렸다. 그 책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중략)…….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시집을 끼고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으며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넌 누구냐. ‘노동자’란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넌 도대체……. (47쪽)

김진숙은 전태일과의 만남을 계기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살고,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변해야 내 삶 또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십대 김진숙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태일에서 김진숙으로, 그리고 김진숙에서 다시 이 땅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이어지는 공감과 연대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지고 있었다.

연대에 있어서는 어디를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 올바른 연대가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시장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값어치 매겨 줄 세운 뒤 비교하는 저 등가교환의 법칙이, 약자들이 손을 잡으려하는 과정에도 끼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진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을 준다. 자본이 비정규직이라는 무기를 철퇴처럼 휘두를 수 있게 된 까닭을 논할 때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빼놓기 어렵다. 비정규직은 하나의 섬이 되었고 자본은 이쪽의 흙을 덜어 그 섬의 크기를 점점 키워나갔다. 정규직 노동자가 한 명도 없다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상황이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에서 그칠 수 있을까. 열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쌍용차 평택 공장의 생산 현장에서는 몇 년째 단 한명의 정규직 고용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에 ‘살아남은 자’들은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고, 새로운 외국 자본이 출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고 있는 섬의 크기는 점차 커질 것이다. 김진숙은 늘 그런 상황이 오리라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힘은 오로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손을 잡는 진정한 연대에 있다는 점을 수많은 발언과 글을 통해 이야기 해 왔다. 그 중 2006년의 한 집회에서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규직의 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본입니다. 우리가 맞장을 떠야할 건 약자가 아니라 구조조정이라는 사시미 칼을 든 깡패입니다. 자본의 발밑에 짓밟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민들레를 한 번 더 짓밟는 게 아니라 그 발을 치워줘야 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시험 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 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 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살아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승리해야 우리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날엔 눈이 없습니다. (154쪽)

신영복 선생이 ‘하방연대(下方連帶)’라는 말로 표현했듯이 연대는 늘 아래를 향해야 한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195쪽)” 우리는 김진숙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엮어야 할 연대의 모습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감이란 어떤 것일까. 공감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와 같은 조건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가슴으로 헤아려 상대의 아픔을 느껴보는 것이다. <소금꽃 나무>를 읽고 있으면 김진숙이라는 사람은 많은 아픔 속에서 살아왔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스스로가 걸어온 삶의 과정에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마저도 늘 자신의 것처럼 껴안아 왔기에 더 그렇다. 고무노동자 권미경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준다.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 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와 어린 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걸렸던 그림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 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 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 내려가는 데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놓고 공장 옥상에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짧기만 했습니다. “……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222쪽)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아마 신문은 몇 줄의 단신으로 그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무표정한 얼굴의 아나운서가 짧은 영상과 함께 그 소식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김진숙의 언어를 타고 전해지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림과 글에 재능을 가졌던 아이가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공장에서 공순이 취급을 받으며 일할 때의 그 절망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파괴당한 그의 인간적 자존이 결국 성큼 죽음을 그 앞에 가져다 놓았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70년대 전태일의 죽음이 알려지고 그가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 이야기들이 지식인들의 각성과 실천을 이끌어낸 것처럼, 김진숙의 이야기는 공감이라는 인간 고유의 인간적 능력을 자극하면서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책을 집어 들고 있는 이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공감과 연대의 새로운 장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고 있으면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이 오가지만 별로 진지하지 않다.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재미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 깊이 보면 그 흐름들을 관통하는 원리를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이야기들은 빠르게 전파된다. 전파의 경로는 네트워크다. 비슷한 관심사에 공감하고는 있지만 알고 보면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이들이 맺고 있는 느슨한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분명 기존의 운동 조직에 비하자면 더 연약하고 느슨하다. 전경 차벽을 뚫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라면 이런 네트워크는 사실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조직에 비해 좀 더 완만하고 평평하게 넓다.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거의 완전하게 수평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집단 지성을 가지고 움직이기에 전략적 오판의 가능성이 적고,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기존의 운동 형태에서 생활은 운동과 분리되어 있었고, 더구나 재미나 놀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 소셜 네트워크상에서 벌어지는 흐름에는 생활과 정치적 실천과 놀이가 하나로 통합되어가고 있다. 지난 선거의 ‘투표 인증샷’처럼 재미있어 하는 것들이 의미 있는 사회적 실천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연대, 그것이 세계 곳곳에서 강력한 정치 경제적 힘을 가진 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김진숙은 타워크레인 위에 그의 실존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트위터에도 있다. 나는 그를 팔로잉(following)하고 있는데 그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트윗을 띄운다. 나는 그가 기뻐하는 것들과 안타까워하는 것들, 마음 아파하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전해 받는다. 그가 전하려는 이야기 중에 사회적 중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리트윗(Retweet)함으로써 나의 지지 의사를 표현하고, 몸이 안 좋다는 트윗이 뜨면 따로 멘션을 보내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달한다. 예전 같으면 소통이 어렵기에 김진숙은 타워크레인 아래의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겠지만, 이제는 바로 옆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네트워크를 따라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김진숙에게 더 열심히 싸울 힘을 주는 것도, 그리고 밑에 있는 사람들이 김진숙이라는 희망을 따라 버스를 타고 모일 수 있는 것도, 이 새로운 형태의 연대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SNS 네트워크 위에서 경계해야 할 것도 있다. 그것은 ‘진정성’이다. 진정성은 내 말이나 생각이 아닌, 내가 실제 발 딛고 있는 현실적 삶의 토대 위에서 자라난다. 어디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정보를 네트워크를 통해 얻고 몇 번의 클릭과 글쓰기를 통해 거기에 동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직접 현장에서 그것을 접하고 사회적 실천의 자리로 내 발을 움직이는 것만큼의 진정성을 네트워크상의 실천을 통해 발휘하기는 어렵다. 연대의 양상에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요즘의 네트워크 만들기는 과거의 연대하기에 비해 훨씬 더 적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맺고 끊는 일이 손쉽게 일어난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과정은 힘차게 진행되다가도 한 순간 지난한 답보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내 것을 먼저 내어주는 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네트워크 만들기의 과정에서도 늘 하방연대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에게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이들을 추종하며 그들과 관계 맺는 것 뿐 아니라, 나보다 여러 가지 정보와 관계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향해서도 넓게 관계 맺는 것이 중요하다. 이정도가 됐을 때 우리는 지금의 네트워크를 두고서 ‘느슨한 연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공감과 연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있어서 김진숙의 <소금꽃 나무>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짚어주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 준다.

김진숙. 그가 아니었다면 쌍용차 해고 이후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숫자와 한진중공업의 해고 이후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의 숫자가 같이 올라가는 끔찍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노동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그 스스로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지만, 그는 벼랑 끝에서 봄을 부르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소금꽃 나무>를 통해 김진숙이 이야기하는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우리 안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이 책을 다시 꺼내들었던 까닭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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