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일반부문 3등작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김지산
‘청춘이란 [...] 이다’라는 형식의 제목을 쓰고 싶었다. 어떤 경험에 대한 입장은 그 경험을 마친 직후에 가장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으니, 졸업과 취업 사이에 낀 스물여덟 살이라는 나의 현재야말로 청춘을 말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나는 아직도 청춘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청춘은 이런 거란다’라고 조언해주지도, 기성세대의 꼰대질에 ‘지금 세대의 청춘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지도 못하겠다. 소극적이고 식상하고 비겁한 ‘독후감’ 같은 제목을 지은 이유다.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에게는 60-70년대의 낭만, 80-90년대의 학생운동과 같은 자기규정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루저 세대’, ‘잉여 세대’ 같은 패배적 자조이거나 ‘아프니까 청춘’같은 기성세대의 거짓말뿐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자신을 규정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나온 청춘을 온전히 평가할 수도, 앞으로 겪을 인생을 온전히 기획할 수도 없다. 생각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은 세대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전개의 형식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끊임없이 구분한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철저한 세대론이다. 책에서 젊은 세대는 화자고 기성세대는 청자다. 강사인 저자는 자신이 수업에서 만난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최대한 가감 없이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기성세대가 이런 사실들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파는 경제적인 이유로, 좌파는 정치적인 이유로 젊은 세대를 비난한다. 저자는 그들에 맞서 젊은 세대를 변호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성세대인 ‘우리’는 청춘을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올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어인 ‘우리’가 저자 자신과 저자가 비판하는 기성세대를 지칭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을 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말할 권리뿐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들릴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p.238)
저자는 그 권리를 기성세대의 ‘태도’에서 찾으려 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려야 한다는 것은 이들의 거칠고 정리되지 않고 울퉁불퉁한 목소리를 우리가 진지하고 꼼꼼하게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p.238)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기성세대의 자기계발서다. 물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라 주문하는 보통의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이 책은 (...) 나로 하여금 무엇을 새롭게 인식하고 성찰하게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p.239) 이라는 말처럼 인문학적 태도론에 근거한 자기계발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자의 청춘론이 가지는 명확한 한계가 드러난다. 기성세대의 성찰적 태도를 요청하기에 앞서, 애초에 청춘의 목소리가 자신들에게 들리지 않는 이유를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허용된 사회적 발화의 기회는 매우 적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젊은 세대가 매체에 대한 권력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갓 사회에 진출한 ‘청춘’들이 이미 체제 안에 공고히 자리 잡은 언론과 출판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이십대 풋내기에게 ‘너희가 글을 쓰면 책을 내주겠다’라고 말하는 출판사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책에 내 글이 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동안 지상에서 5cm정도 떠서 걸어 다녔던 것 같다”(서문에 실린 한 학생의 글에서, p.28)가 출판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일반적인 반응이 된다.
물론 모든 기회가 봉쇄된 것은 아니다. 어떤 이십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아주 약간의 기회가 모든 이십대에게 균등하게 부여되는 것 역시 아니다. 예컨대 여기에도 학벌이 있다. <이십대 전반전>이라는 책이 있다. 서울대 학생들의 에세이 모음집인 이 책은 서울대생이라는 타이틀 없이 나올 수 없었던 책이다. 비슷하게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라는 책이 있다. 한윤형의 자기서사인 이 책 역시 그가 가지는 ‘20대 대표 논객’이라는 상품성에 근거해 기획되었다. 그 역시 서울대생이다. 저자가 책에서 대변하고 있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와 덕성여대 학생들의 글만을 오롯이 엮은 책이 출간될 수 있을까? 어렵다. “한국에서 대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학생들 자신도 안다. 그래서 저자는 그들을 대신해 발화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청춘의 책이 아닌 엄기호의 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은 어떤 경우엔 기성세대의 불합리한 권위의 발현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먼저 젊은 세대가 아직 자신의 언어를 공적인 영역에 출판(publish)할 만큼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사유와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발화하는 차원은 철저하게 기술적인 영역에 있다. 매체를 잘 다룬다는 것은 열정과 패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어서, 설령 매체에 대한 접근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미숙한 젊은 세대가 그것을 통해 쓸 만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서 저자가 직접 인용한 글들 역시 수업에 참여한 모든 학생이 아닌 저자에 의해 선별된 십 수 명의 것이다. 저자의 기획의도에 부합하고, 영 바보멍청이는 아니며, 어느 정도의 글쓰기 능력이 있는 학생들의 글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출판에 적합한 수준의 글쓰기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십대의 목소리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것은 단지 청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386세대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특수한 형태의 매체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용적으로는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이고, 형식적으로는 학생운동이다. 명백한 사회적 모순, 그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 인식에 대한 명백한 실천의 형식, 그에 따른 명백한 자기규정. 이전 세대는 모든 확실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말은 듣지 않을 수 있어도 행위를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386은 권력을 획득했고, 지금까지 획득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386세대’라는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완료된 공고한 세대 규정을 만들어냈고 이 규정은 단지 이름뿐이 아니라 민주화세대가 정당정치에서 실질적 권력을 획득하며 실제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그것들 중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 지식인 타이틀은 더 오랜 기간 지식을 축적해온 이전 세대에 자연스레 넘어갔고, 주어진 사회적 실천의 형식은 기껏해야 투표율 정도로 축소되었다. 남은 것은 데카르트적 성찰뿐이다. 지금 사회에 뭐가 문제지?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지? 도대체 나는 누구지? 데카르트처럼 뛰어난 두뇌를 가지지도, 데카르트처럼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은 젊은 세대는 결국 질문만을 반복한다. 성찰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찰만으로 삶이 도야하는 것은 아니다. 성찰은 주체적 삶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닌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결여된 것은 인식이기보다 실천의 영역에 있다. 저자의 말처럼 이십대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존재들이 아니다. “전공 9학점보다 힘든 교양 3학점”짜리 저자의 수업을 꿋꿋이 듣는 것이 지금의 젊은 세대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괴롭다. 저자의 대변처럼 젊은 세대는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가 아닌 “도대체 투표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다. 결국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성찰적 태도이기보다 구체적인 실천적 지식에 가깝다.
이전 세대와 다르게 지금의 젊은 세대가 가진 언어는 행위가 아닌 텍스트로만 전해진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텍스트의 힘이 약화되면서 자연스레 그 언어의 힘도 약화된다. 도대체 누가 트위터를 두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라 말한단 말인가? 원고지 한 매도 안 되는 공간을 열어 두고, 결국은 유명 인사들의 말을 리트윗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공간에 어느 이십대가 정치의 주체로 존재하고 있는가? 기성세대는 누구보다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파는 한 줌 남은 대학생들의 직접행동을 더욱 압살하려 하고, 좌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주문한다.
어려운 것은 실천이다. 우리는 매주 꼬박꼬박 스마트폰에 나꼼수를 넣어 듣지만, 선뜻 희망버스를 타지는 못하는 세대다. 사실 이것은 비단 젊은 세대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과연 기성세대는 얼마나 사유하고 또 얼마나 실천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탈정치적인 대학생을 비난하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어도 탈정치적인 회사원을 비난하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다. 기성세대도 그저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삶은 더 이상 예측가능하지 않다. 인생은 기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p.26)
무엇이 실천을 가능케 하는가?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결단할 수 있는가? 힌트는 저자가 겪은 사유의 공간, 즉 ‘교실’에 있다. 교실은 지식과 사유가 교통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가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했다는 점, 그리고 공동체가 성찰적 행위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교실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마치 과거의 학생운동이 그러한 기능을 했던 것처럼, “우리는 교실을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진리가 상연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살아 있던 것은 다만 몇몇 동아리나 몇몇 교실이 아닐까?”(pp.265-266)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과, 사람들이 교통하는 공동체뿐이다. 그것이 실천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자의 ‘교실’이 보다 세밀히 묘사되기를 바랐다. 교실에서 오간 말들의 내용만이 아닌, 교실이라는 공간이 실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나의 경험과 비교하고 거기에서 어떤 ‘힌트’를 얻고 싶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여전히 교실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학생운동과 같은 거대하고 공고한 체제가 아닌 제한되고 일시적인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게 이 책은 저자가 비록 미약할지언정 자신의 로두스를 꺼내놓았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도대체 어떤 삶들이 있는가? 기성세대가 청춘을 모르는 것처럼 청춘도 청춘들을 모른다. 청춘이 발화될 수 없는 시대에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게나마 보이는 것들을 더 세밀하게 보아야 한다. 저자가 학생들을 더 많이 인터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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