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달,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로버트 달,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달,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김대원
경제민주주의, 새로운 역사를 위한 새로운 고찰
한 남자가 사면됐다. 특별 사면이자 단독 사면이었다. 형이 확정된 지 불과 4개월 만이었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이 간단하고도 자명한 원칙은 무참히도 짓밟혔다. 원칙의 포기는 국익이란 이름으로 포장됐다. 정부와 언론은 합을 맞춰 ‘올바른’ 선택을 광고했다. 국민들은 그러려니 했다. 경제 권력 앞에 무력했던 정치권을 이미 수차례 보았던 국민들이다. 모두가 짐작하듯이, 그 남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삼성공화국이라는 세간의 풍문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2009년 12월 31일, 사람들의 입과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그 풍문은 이제 당당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대기업과 동거한다. 국익의 대표적 이름은 경제 성장 혹은 경제 안정이다. 대기업 수출 장려를 위해 고환율 정책을 유지하며 물가 상승은 신경도 쓰지 않던 한국정부는 사실 양반이다. 미국은 자국 경제를 파탄 낸 월가 앞에서 절절 매며 자신들의 합법적 권위는 내팽개치고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국민들의 시위에 기대려 한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백악관도 자국의 경제인들 앞에서는 별수 없다.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은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익숙한 일이다. 세계 도처에서 대기업은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굴복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민의 지배는 허황되고 경제의 지배가 횡횡한다. ‘민주주의’의 ‘민주’가 ‘민주(民主)’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불평등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분명, 사람들도 어렴풋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적 불평등을 인식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뚜렷한 해법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바로 ‘사유재산권’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사유재산권’은 생존권과 같은 도덕적 기본권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일종의 불가침 영역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1인 1표라는 외형적 정치적 평등이 유지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깨고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자들로 여겨지기 일쑤다. 사회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와 현실 속 싸움에서 패배했다. 전체주의와 평등의 악몽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그저 안철수와 같은 선한 자본가들이 정치적 불평등을 해소해주고 우리를 이끌어주길 바래야 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인간 역사의 종착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역사의 끝자락에 도착한 우리들은 ‘분명하지 못한 문제의식’은 버리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한 평생을 바쳐온 노학자,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색다른 돌파구를 제시한다. 서론을 읽는 순간부터, 느낌이 온다. ‘이 책은 다르다.’ 그는 양극화가 아니라, 양극화를 불러온 무한대의 경제적 자유에 초점을 맞춘다. 얼핏 익숙한 지점이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자유를 자본주의의 선천적 구조적 모순과 같은 사회주의의 그것으로 고찰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적 자유가 사유재산권과 동일시되는 정치철학적 문제에 집중하고 이 부분에 집중해서 정치적 평등을 위해 ‘경제 민주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경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펼쳐지는 자유와 평등의 관계 재정립, 사유재산권 재정의, 그리고 기업의 민주적 절차 수용 정당성 논증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정치철학 통찰력을 제시해주며 빛을 발한다.
평등은 자유를 위협한다?
올해 여름, 대한민국은 시끄러웠다. 무상급식과 함께 터져 나온 복지 논쟁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보수 대학생 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는 학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학생은 좋아하는 정치사상가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을 꼽았다. 복지가 불러온 평등의 바람 속에서 그는 자유의 가치(더욱 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자유)를 염려했다. 그 학생은 토크빌의 모든 것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과 토크빌의 중요한 사상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것은 바로 평등으로부터 위협당하는 자유다.
그 동안, 평등은 자유를 위협한다는 것은 하나의 정설로 여겨졌다. 그래서 로버트 달은 경제적 자유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평등이 정말 자유를 위협하는 지부터 살펴본다. 달의 토론 상대는 민주주의 하에서 평등과 자유의 관계를 정립한 토크빌이다. 토크빌은 몇 가지 가정을 세웠다. 문명 세계에서 평등은 확대될 것이고,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을 좋아한다. 자유는 권력에 대한 강력한 견제 장치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견제 장치 없이, 다수가 국가를 지배한다. 결국, 평등은 다수의 독재를 조장하고 자유를 위협한다. (p. 16) 이 간단하고도 설득력 있는 논증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다.
대표적인 예가 ‘중우정치’의 폐해다. 포퓰리즘과도 연관이 깊은 이 단어는 평등을 등에 업은 대중이 자유의 권리를 위협하는 법을 제정할 것이란 두려움을 조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괜한 느낌이 아니다. “‘평등’해지고 싶고, 남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대중이 몇몇 선동가에 의해 ‘경제적 자유’를 침해하는 복지 포퓰리즘에 휘둘리고 있다” 무상급식을 비롯한 복지 논쟁에서 보수 논객들이 자주 남발하는 구호다.
그러나 이 그럴듯한 논증은 생각 속에서만 빛을 발할 뿐이다. 정말로 평등의 확대와 더불어, 자유는 위협 받았는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그리고 로버트 달이 정확하게 짚어냈듯이 역사적으로 평등의 확대는 자유를 위협하지 않았다.(p. 31) 자유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발전을 구가했고, 오히려 경제적 자유가 평등을 위협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냉전이 종식되기 전까지 세계는 평등을 공산주의와 등치시켰고 냉전 이후에는 포퓰리즘과 등치시킴으로써 평등에 온갖 굴레를 덧씌웠다. 평등을 강조하는 그 순간, 우리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길로 갈 것만 같았고 소수를 억압할 것 같았다. 그러나 로버트 달이 평등으로 무너진 민주주의 사례들을 논증할 때,(p. 48) 우리는 알게 된다. 자유가 위협받는 것은 평등이 넘쳐서가 아니라 평등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사회가 평등해질수록 자유는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자유와 평등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우리는 평등에 대한 무조건적 악몽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평등을 논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관계 재정립은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로 여겨지는 사유재산권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해준다.
사유재산권의 뿌리와 허상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토크빌이 말한 자유가 경제적 자유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중요시한 부분은 오히려 정치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이었다. 이 부분은 자유주의 사상의 시초로 여겨지는 존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며, 자유는 경제적 자유로 치환됐고,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권은 불가분의 관계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사유재산권은 기업의 개인 소유에 대한 결정적 근거가 됐다. 로버트 달은 이 부분에 집중한다. 경제적 자유와 사유재산권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기업의 개인 소유도 당연시 되면 안 된다는 것.
사유재산권은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수학 공식처럼 너무나도 간단하고 자명해 우리가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내 돈 내가 쓰는 데 뭐라 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이며 전체주의자였다. 사유재산권은 기본적 도덕권처럼 여겨졌고, 그 근저에는 ‘사유재산권 = 경제적 자유‘라는 공식이 존재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달은 재산권의 범위부터 비판을 시작한다. 재산권은 다양한 권리와 특권, 의무 그리고 책임들의 묶음이다. (p. 88) 로버트 달은 이 권리의 범위가 무분별하게 광범위하다고 말한다. 그는 구체적 정의를 위해 로버트 노직,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정의하는 소유권 개념을 불러오지만, 실상 그들의 소유권 개념 또한 너무 협소하거나 광범위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존 로크의 경우 자신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은 물건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공식에 의하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물품은 노동자의 것이지 절대, 기업가의 것이 될 수 없다.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로버트 노직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로버트 달은 다양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의견을 종합, 재산권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매우 불분명한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설사 정확하다고 해도 그는 현재의 재산권 개념은 분명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업의 소유까지 정당화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사유재산권에 대한 어떤 논증도 사유재산의 무제한적 축적 권리까지 정당화하지 못한다. (p. 88)실제로 이 부분은 로버트 달이 인용했던 로베트 베커 말고도 재산권에 우호적이었던 존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글을 자세히 보면, 존 로크는 “충분한 양질의 재화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향유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단서로 달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 또한, “더 잘 살기 위해서 남에게 해가 가면 안 된다”라는 유사한 조항을 달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경제 활동에 단서를 단 이유는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이 경제적 자유 보다는 개인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달도 이러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평등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적 자원 확보만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는 정치적 자치권이 사유재산권보다 우월한 권리임을 확실히 한다.
이 사유재산권 부분은 사실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어가는 발판에 불과하지만,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책 전부를 통틀어 백미로 추켜세우고 싶은 부분이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력은 ‘힘’이다. 여기서 ‘힘’이란 단어는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다. 남을 움직이고 굴종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경제적 ‘힘’은 많은 사람들을 굴복시켰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당장 우리 주변을 보자. 돈 많은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와 동등한 인격체일 수 없다. 대기업의 온간 부당한 처사에도 우리는 묵묵히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의 무력한 ‘복종’이었다. 그 ‘힘’은 현대 사회에서 법으로 보장되고 경제논리로 포장돼서 우리에게 ‘의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강한자의 권리에 대해서’ 말했듯이 ‘힘’은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힘’에 대한 복종은 어쩔 수 없는 행위이고 자기 의지에 의한 행위가 아니기에 복종은 의무가 아니고 ‘힘’은 권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사유재산권이 도덕적 기본권으로 추앙되면서 ‘경제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근대적 ‘힘’은 ‘권리’로, ‘경제력’에 대한 복종은 ‘의무’가 되었던 것이다. 로버트 달은 이 ‘경제력’이란 ‘힘’의 도덕적 정당성을 정치철학적으로 철저히 해체시켜 버렸다. 그리고 ‘경제력’이 사실 아무런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야만적 ‘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로써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우리는 정치적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경제 민주주의’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 단단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당연한‘ 경제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살펴보며, 평등이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사유재산권의 재정의를 통해 기존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정의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기업의 소유구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간 법의 이름아래 무제한적 팽창으로 부의 독점을 일궈내고 정치적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비민주적 체계로 사원들을 억압한 대기업들의 소유구조를 말이다. 로버트 달은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주장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듯이, 기업에 대한 민주주의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결사체 구성원들에 대한 7가지 가정을 제시하고, 이 가정이 적용가능하다면 어느 결사체에서도 민주적 절차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69)
이런 도발적 주장은 어떤 생각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까?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합리적 신념을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합리적 신념의 핵심은 어떤 종류의 결사체에서든 그 결사체에 속한 사람들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치의 절차가 최대한 민주적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p. 68)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큰 문제점이 없는 생각이다. 이미 우리는 자유에 의해 위협받는 정치적 평등에 대해 살펴봤고, 기업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논증도 살펴봤다. 기업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의 정당성이 제거된다면, 우리가 기업에 대해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달이 주장하고 있듯이 기업도 하나의 정치체며, 사회에서 기업의 상관이 갖는 권력은 정치권력과 단순비교는 불가할지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게 현실이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기업은 그 규모면에서도 일개 국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지 않았던 것은 이제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이 행사하는 부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진작부터 논의가 됐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사유재산권이라는 선글라스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보게 됐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업 지배 구조의 비민주성 모두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 민주주의’의 문 앞에 서게 된다.
경제 민주주의, 새로운 역사를 위한 남다른 가치.
이론적 정당성을 모두 갖춘 그는 마침내 ‘경제 민주주의’의 정확한 형태로서 1인 1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종업원에 의한 공동 소유를 통한 자치 기업(협동조합)을 말한다. 이러한 기업형태가 이익갈등 해소와 공정성 기준에 대한 좀 더 확고한 합의를 통해 정치적 평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 민주적 절차의 확립과 경제적 불평등을 바로 잡을 것이 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p. 119) 실제로 토크빌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결사’로 인해 더욱 공고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그런 의미에서 기업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된다면 민주주의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는 점은 타당해 보인다. 또한 기업 소유자와 종업원간의 임금차이도 혁신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점도 큰 무리가 없는 주장이다.
그는 이런 자치 기업이 과연 지속적일지에 대한 회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치 기업이 기존의 기업보다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재투자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확률이 높다는 점과 자발적 참여와 민주적 경영분위기에 힘입어 경영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책을 읽다보면 그가 이 부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로버트 달은 분명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 도처의 다양한 협동조합의 경제적 성과를 지적하며 자신의 자치 기업을 옹호한다. 그가 자치 기업의 현실성을 위해 자주 언급한 스페인의 Mondragon 협동조합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점을 볼 때, 그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한국에서도 올해 3월 KBS에서 Mondragon 협동조합을 소개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금융위기를 겪으며, 세계 각지에서는 협동조합의 우수성이 소개되고 있다. 2012년은 UN에서 정한 협동조합의 해이기도 하다. 그의 책이 출간된 지 25년, 이제 그의 노고가 빛을 발하는 것일까?
섣부르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아직 협동조합은 실험적 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경제 위기가 심화된다면 협동조합보다 효율성 위주의 기업 체계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제시한 자치기업 혹은 협동조합이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그의 주장은 현실에서 자치 기업이 성공할 것인가 보다, 왜 자치 기업이라는 체제로 가야 하는가에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경제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성공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치철학적 고찰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양극화와 정치적 불평등이 무제한적 경제의 자유로 인해 발생됐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자유와 평등은 그간 자유에 가려져 우리가 잊고 있었던 평등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자유의 위협성을 강조한다. 사유재산에 대한 그의 논증은 현대 ‘경제력’이 사실 공허한 권리(사유재산권) 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려왔다는 것을 밝혀준다. 무엇보다, 정치적 불평등이 끝없이 훼손되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분명하지 않은’ 문제의식이 사실은 ‘분명한’ 문제의식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발전해야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그의 ‘경제 민주주의’ 주장은 양극화에 대한 이전의 접근을 보완해주는 의미도 갖는다. 그간 맑시즘을 비롯한 사회주의 일반은 경제적 측면에만 집중해서 정치철학적 의문(‘사유재산권’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 비판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경제 권력의 구조적 폭력에만 편중돼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달은 경제 권력이 만들어내는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경제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권리’의 정당성을 공격함으로써 정치철학적으로 타당한 해석을 제공한다.
물론, 그의 사상에도 문제는 있다. 먼저, 경제 질서의 형태를 정하면서 사회주의 정권 하 중앙집권경제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분권적 시장 경제가 효율적이라며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다. 이 부분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에 대한 그의 안일한 진술과 함께 비판이 가능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주의의 비판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가 효율성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떨어질지는 몰라도, 사회주의가 제기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 구조와 양극화 관계는 아직도 설득력이 있고 유효한 이론이다. 그렇기에 그는 현재 민주주의의 문제를 야기하는 경제적 불평등이 단순히 기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지 생각해봐야 했다. 그의 ‘경제 민주주의’가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을 제거함으로써 기업의 소유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그가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법인 자본주의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치 기업이 종업원들의 민주적 투표에 의해 운영되고 종업원들의 경영이 양극화 축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해도 자본주의 자체가 체제적 모순을 갖고 있다면 양극화는 어떤 모습으로든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레 다시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2011년 11월 1일 한겨레에 소개된 협동조합의 권위자 존스털링 버챙 교수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협동조합은 때로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기본 소임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협동조합이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의미에 치중하지 않고 다양한 목적이 있다는 의미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그의 의도와 달리 협동조합 자체가 결국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변질돼, 자본주의 내의 억압구조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내재돼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현실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시켜 주리라는 기대는 과도한 것이며,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것이다. 앞에서 계속 주지했듯이, 로버트 달은 우리가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철학적 고찰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이 고찰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또 다른 루트를 제시했다는 점에 우리는 더 많은 의미를 둬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도 대치된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한 불안전한 체제다. 민주주의는 아직 발전해야 할 여지가 많아 남아 있고 그것은 인류에게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완의 역사가 남아있다는 뜻이 된다.
그 역사는 어쩌면 현재까지 역사와는 다를지도 모른다. 로버트 달이 말했듯이 ‘경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라고 하기에도 자본주의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굳이, ‘경제 민주주의’가 어떤 이념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대답한다. 어떤 이념이냐가 아니라, “이 소유형태가 인간의 기본가치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고.(p. 161) ‘역사의 종언’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의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양극단끼리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경제 형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싸움이었다. 로버트 달은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곳에서 시작한다. 또한 그는 경제 형태의 우월성보다 인간의 가치와 민주주의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기존의 역사가 보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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