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대지에 두 발을 딛다

일반부문 3등작

비평가, 대지에 두 발을 딛다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BeGray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사유의 핵심을 간략하게 정의하기란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다. 그를 소개하는 여러 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가 쓴 수십 권의 책들 중에서 탁월한 저작들을 열거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주저‘들’을 관통하는 맥락을 잡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예컨대『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가라타니는 니체-푸코적 계보학의 영향 하에 있는 문학 비평가고,『탐구』연작의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맥락에서 타자로부터 탄생하는 새로운 주체를 찾아가는 철학자, 그리고『네이션과 미학』의 그는 일본 민족주의 형성과정을 미학적 측면에서 추적하는 이론가다. 다시 말해, 가라타니‘들’ 사이의 괴리는 ‘입장변경이 있었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곤란할 정도로 매우 크다. 마치 사격 후 위치를 바꾸고 다시 공격해오기를 반복하는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할 엄두조차 나지 않듯, 그 현란함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단지 특이한 존재로 간주하고 엄밀한 추적을 포기하도록 유혹한다―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을 논하는 글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칭송/비난을 반복하거나 그의 일면만 간추려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인 현황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상황은 비교적 최근작이자 저자 스스로도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납득할 수 있는 책”이라고 밝힌 본서『트랜스크리틱』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정치철학’의 유행을 포함하여 이른바 가라타니 고진의 대표작으로서의 본서를 향한 관심이 어느 정도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류동민의 서평과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단순 요약 및 감상 이상으로 논의를 진전시키는 글을 찾기 어렵다. 가라타니에 대한 옹호이든 비판이든, 그것이 단지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혹은 ‘마르크스(혹은 칸트)를 왜곡한다’는 층위에 머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현실은 부분적으로 가라타니의 텍스트를 독해함에 있어서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성급함으로부터 빚어진다. 분명 그의 저술은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들―예컨대 바디우(Alan Badiou)나 지젝(Slaboj Zizek)―보다 간결한 언어로 서술되어 있어 진입장벽이 낮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간결한 언어는 결코 사유의 단순함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사실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그렇지만, 가라타니의 맥락 안에서 읽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언어는 깊은(thick) 의미로 다가온다. 이전 저작들의 가라타니‘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본서만을 통해 진정한 그를 만나고자 하는 순진하고 안이한 태도는 오히려 사상의 평이함만을 초래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진짜 어려움은 가라타니로부터가 아니라 단지 상품으로서의 이론을 구매하고 ‘상품평가’를 남겨놓을 뿐인 ‘소비자’들, 해석을 향한 치열함을 상실한 독자들로부터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본 서평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전술한 문제의식과 대면하면서『트랜스크리틱』을 읽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나는 마치 동전의 양 면처럼 둘이되 하나로 이어져있는 관점을 취하고자 한다. 하나는 다양한 가라타니‘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태도를 포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가라타니‘들’로 느슨하게나마 이어진 흐름 안에서 본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다시 말해 이전의 저술들과의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연속 안에서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가라타니 고진이 처음부터 본서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문예/문학)‘비평가’(critic)이기를 그만두지 않았음을, 그리고 『트랜스크리틱』은 그러한 비평가가 극복해야할 현실의 정세에 제출하는 실천적 응답임을 강하게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 두 가지 명제 모두 가라타니가 직접 자신의 각종 저술들에서 계속해서 밝히고 있는 바로, 하등의 새로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서와 대면하는 사람들 중 이 말들의 의미를 가슴 깊숙이 품은 경우는 극히 드문 듯 보인다. 중요한 말이니까 되풀이되는데, 역설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익숙하게 느끼고 마침내 의식에서 지워버린다. 나는 새롭지만 공허한 깨달음을 말하기보다 낡았지만 의미 있는 말을 한층 더 강하게 주지시키고자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대담이나 강연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 근본적으로 ‘비평’임은 다름이 없으며, 단지 그 대상을 문학이 아니라 철학, 인류학, 언어학, 사회학 등의 학문으로 확장시키고 있을 뿐이라 말해왔다. 본서의 제목인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 또한 ‘크리틱’이라는 점에서 본서가 근본적으로 저자가 이전까지 수행해왔던 ‘비평’작업의 연장선 안에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저자가 초두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에서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단 한번이라도 ‘비평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가라타니의 ‘비평가’적 면모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역설적으로 그 자체로 문학비평인『일본근대문학의 기원』과 같은 저술보다도『탐구』연작이나 본서와 같이 문학의 바깥에 자리한 영역을 대면하는 곳이다. 예컨대 서양 철학사 전반과 대면하는『탐구』연작에서, 저자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와 ‘데카르트주의’ 일반을 구별하고 전자를 단독자적 주체로 도달하는 과정으로, 후자를 일반적인 주체가 성립하는 과정으로 재정의 한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해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가라타니는 한발 더 나아가 ‘진정한’ 데카르트를 스피노자(Baruch Spinoza)와 연결시키기에 이른다. 가장 논란이 많은 마르크스(Karl Marx) 해석의 경우에도, 가라타니는 초기의 저술인『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부터 『탐구』를 거쳐 『트랜스크리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마르크스 해석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가치의 형성과정에 집중하면서, 상품의 생산과정보다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자본론』독해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한 정운영의 서평에서 볼 수 있듯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과 완전히 어긋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철학 및 경제학 전공자들을 기겁하게 하는 독해방식은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자체로는 전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현대 영문학 연구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인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서양문학사 자체를 ‘오독’('misreading')으로 간주하는데, 이때의 의도적인 ‘오독’은 원저자의 뜻을 곡해하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로부터 창조적인 면모를 끌어내는 긍정적인 행위다. 얼마 전에 타계한 현대 해석학(hermeneutics)의 거두 폴 리쾨르(Paul Ricœur)의 해석 개념 또한 텍스트 이해가 원래의 맥락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필요를 포함하지 않던가? 가라타니 또한, 직접적으로 이들을 인용하지 않지만, 자신의 독해에서 중요한 원리로서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에 따르면, “'가능성의 중심'이란 말은 발레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 서설』에 나오는 말로, 그것은 결국 다 빈치라는 인물이 여차여차해서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게 아니라, 텍스트 안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태, 가능성의 형태, 그것을 '다 빈치'라고 부릅니다. 즉 쓰여 있지 않은 것, 쓰여 있지 않은 구조를 '가능성의 중심'이라고 부른다”(인용자 강조). 블룸이나 리쾨르, 발레리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설령 그들을 모르더라도 문학비평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저자가 말하는 ‘가능성의 중심’ 찾기란 쉽게 용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수행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앞서 정운영의 서평에 반박하는 박유하의 글은 그런 점에서 ‘상식적’이다.

이와 같이 (문학)비평의 특성을 무기삼아 가라타니의 오독을 문제 삼는 시선들을 물리친다고 했을 때, 가라타니 독해에 관한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라타니는『윤리21』의 서문이나 지젝의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대한 서평에서 ‘자신의 칸트는 통상적인 칸트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단지 칸트 해석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마르크스 해석에서도, 나아가 그가 ‘비평’하는 거의 모든 이름들에게 해당되는 표현일 것이다. 가라타니가 통상적인 비평가와 차별화하는 지점은, 그가 자신의 ‘비평’들을, 사상가들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들을 개별적인 글들로 두는 대신 하나의 구조물로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면모에 있다. 비유하자면, 독자들은 가라타니의 데카르트, 가라타니의 스피노자, 가라타니의 칸트, 가라타니의 마르크스, 가라타니의 폴라니(Karl Polanyi)를 차례대로 접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모든 이름들이 하나의 벽돌들로서 기능하는 하나의 건축물과 대면하게 된다. 그 건축물은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땅히 ‘가라타니 고진’으로 불려야 한다―가라타니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들의 합당한 독해를 위해서. 그를 단순히 비평가 혹은 사상가가 아니라, (그의 표현법을 빌리자면)‘비평가=사상가’로 간주하는 시점에서부터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작업이 기존 사상가들을 ‘비평’하면서 만들어진 독자적인 작업이라면, 우리는 가라타니의 작업 자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설령 그가 개별적으로 수행한 해석들의 탁월함과 독창성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건축물 자체의 탁월함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수식어를 뗀 가라타니 고진을, 독립된 사상으로서의『트랜스크리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 나는 우선적으로 가라타니‘들’을 하나의 가라타니로 보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태적인 동일자로서의 가라타니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차이, 때로는 이어지지만 때로는 구불구불한 하나의 흐름으로서의 가라타니를. 『트랜스크리틱』은 그러한 흐름의 응축-결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서의 이해를 위해 저자의 모든 이전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행해진『탐구』연작을 시작점으로『트랜스크리틱』에 도달하는, 혹은 이후로도 계속되는 하나의 흐름을 상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단순히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향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이는 나의 주장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독자들이『탐구』를 저자가『트랜스크리틱』의 사유에 도달하기 전의 방황, 혹은 미성숙한 사유과정이라고 간주하고 가볍게 지나치는데, 이는 명백한 오판이다. 물론『탐구』연작에서『윤리21』을 거쳐『트랜스크리틱』1부 칸트론으로 발전한다는 도식 자체는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가장 자세하게 논의한다는 점에서『탐구』는 본서 1부의 압축적인 서술로 가볍게 대체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상의 이해가 시작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탐구』연작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가라타니와 사상사의 세계적 맥락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바꿔 말해 이 책은 단지 ‘똑똑한 일본인의 특이하고 재밌는 책’이 아니라 사상사적 맥락 안에서, 정확히 1960년대 이래의 ‘프랑스 현대철학’으로부터 시대적 전환을 추구하는 분투로 읽혀야만 한다(그 분투가 성공적인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볼 때,『탐구』연작에서 논의의 시작이 되는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로부터 저자가 끌어내는 것은 ‘구조론적 결정론’이다. 쉽게 말해 우리에게 실제로 허용된 자유의지란 없으며, 우리의 모든 인식/행위는 다른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 행위의 시작점으로서의 주체를 소멸시키는 관점은 사실 1960년대 이래의 ‘프랑스 현대철학’, 구체적으로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을 가리킨다. 가라타니는 스피노자로부터 ‘구조론적 결정론’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단지 구조적으로 결정되지만은 않는 ‘주체’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 도입되는 것이 바로 레비나스로부터 원용한 ‘타자’다. 모든 인식이 공동체 내에서 구조적으로 결정된 시점에서, 공동체 바깥의(물론 이는 추상적인 표현인데) 타자,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를 만날 때 비로소 ‘결정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를 가라타니는 ‘초월론적 주체’라고 지칭한다.『탐구』의 핵심은 따라서 단순히 타자가 아니라 타자에 힘입어 주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윤리21』과 『트랜스크리틱』의 칸트론에서 보이는 ‘칸트적 전회’는 단지 ‘초월론적 주체’에 위에서 윤리적 판단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보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트랜스크리틱』의 1부가 그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연속성을 보다 강하게 띄고 있다면, 이전의 주저들과 비교할 때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은 2부의 마르크스론이다. 1장에서 3장까지 나타나는 가치형성 자체에 대한 사유는 사실『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나『탐구』에서부터 발전적으로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지점은 폴라니로부터 착안하여 사회분석의 기초를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중요개념인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두는 ‘단절’에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가라타니는 마르크스 해석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상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트랜스크리틱』2부 마르크스론 독해의 중심은 제4장 ‘트랜스크리티컬 대항운동’에 놓여야 한다. 폴라니와의 차이점으로 드러나는 가라타니 사상의 핵심(core)은, 각각 서로 다른 교환양식을 대표하는 네이션(증여)과 자본(화폐 교환), 국가(수탈-재분배)을 상호보완적인 하나의 결합으로 파악한다는 점과 함께, 일종의 목표로서 현실에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규범적인 목표로 존재하는 제4의 교환양식인 ‘어소시에이션’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많은 평자들이 이 구상의 기이함과 비현실성만을 지적하는데, 그들은 제4의 교환양식이 처음부터 1부 칸트론에서 성립한 ‘윤리적 주체’와 대응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200) 윤리적 선택이 가능한 주체가 있을 때(가라타니는 우리에게 그렇게 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어소시에이션’이 가능해진다. ‘어소시에이션’은 가족과 같이 잘 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타자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네이션-증여와 다르며, 동시에 타자를 이윤획득의 수단으로만 삼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화폐교환과 다르다. 1부에서 도달한 ‘윤리적 주체’의 깨달음을 단지 개인에게 남기는 대신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실천적인 가능성으로 확장시킨다는 구도를 이해할 때에야 2부 4장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트랜스크리틱』이 이전의 저술들과 갖는 또 다른 유의미한 차이는 저술의 ‘실천적인’ 성격에서 비롯한다. 앞서 말했듯, 본서의 출발점인『탐구』연작이 가장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사유라면, 본서는 그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가장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사유다. 제비뽑기나 지역통화운동(LETS)이 단순히 기이한 발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어소시에이션’을 구성하기 위한 원리임을 상기하자. 실제로 저자는 직접 “자본제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 또는 문화적 저항에 머무르는 데 만족할 수는 없었다”(12)고 말하면서, 본서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던 적극적인 전망”(509)이라고 말한다. 본고에서 앞서 제기한 물음, 즉 “독자적인 사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단 하나다―그것이 실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 사실을 일찍부터 포착했고,『트랜스크리틱』은 바로 그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답변이다. 여러 대담집 등에서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가라타니는 1980년대 중반까지 “철학은 형식이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고 말한다. 철학이 단지 형식일 뿐이고, 실제로 철학의 대결을 움직이는 것은 철학 밖의 ‘역사’라면, 가라타니 자신의 사유 또한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바로 자신의 사유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목적-방향을 부여하고자 분투한 결실이 바로 본서다―‘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철학/사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칸트와 마르크스에 대한 자신의 고찰을 연결하는 작업, 즉 윤리적 주체와 윤리적 사회-공동체를 연결하는 작업은 이러한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로소 배태한다. ‘비현실적인 공상’이라고 비판받는 제비뽑기나 지역통화운동은 오히려 끝까지 현실적/실천적이고자 했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극한적으로 실천적인 태도가『트랜스크리틱』을 특별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을 현대의 다른 사상가들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그 한 걸음, 현실이라는 이름의 대지로 내딛는 것은 무척이나 많은 위험을 곁에 둘 때에만 가능하다. 그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면서도 얼마든지 탁월한 저술을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대신 자신의 사상을 졸렬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트랜스크리틱』을 비평가가 대지에 두 발을 딛는 순간으로 바라본다.

가라타니 사상의 결점이나 그의 주장의 비현실성을 논하는 것은『트랜스크리틱』을 읽는 한국의 독자들, 다시 말해 이미 여러 이론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쉬운 일일지 모른다. 지역통화운동을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되고 있지 않다거나, 제비뽑기는 그냥 재미있는 상상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된다거나, 결국에는 그 자신의 사상을 따라 만들어진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도 실패하여 결국 가라타니 본인이 해산해버리지 않았냐는 ‘사실관계’까지 나온다. 그러나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부터 시작된 고민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오류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며, 오류의 출현을 이유로 사상을 전적으로 폐기한다면 이는 이상함을 넘어 어리석음에 해당한다.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고쳐야 할지는 본고에서 논의할 수 없으나, 단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말을 인용할 따름이다. 다만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이름이 한국인 독자들의 관심 아래로 점차 가라앉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목욕물과 아이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검토를 하고 싶다. 과연 한국의 독자들, 지금의 현실로부터 불쾌감을 느끼고 변화를 희구하는 사람들이, 가라타니 만큼이라도 실천적인 태도를 갖추고 이론과 대면했던가?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아’라는 단정과 함께 단순히 또 하나의 이론을 소비할 따름이 아닌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된다. 사상에 대한 철저한 대결 의지 없이 그것을 단지 또 한 권의 책=상품으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소비자로 호명된다.

사상을 평가하는 것은 ‘역사’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역사’를 희구하지 않는 사상은 물론, ‘역사’를 향한 강렬한 시선으로 무장한 사상 또한 시간 속에서의 풍화를 모면하기란 어렵다. 이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또 누구보다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비평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이론을 포함해 수많은 이론들로 풍요로운 지금의 한국에서, 역설적으로 해석의 치열함은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하다. 이론이라는 이름의 칼날은 본래 ‘역사’와 마주하기 위한 도구다. 도구는 거저 얻어지지 않기에 오로지 해석의 치열함을 갖춘 이들만이 그를 붙잡고 나아가 현실과 대면할 수 있다. ‘이론의 소비’ 혹은 ‘해석의 빈곤’은 어쩌면 우리의 실천의지가 올해 칠순을 맞이한 노인의 그것보다도 박약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