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규명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새내기부문 1등작
정의를 규명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정의의 수호자인 권위와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 사고를 옹호하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서울대학교 인문계열 어정윤
평화로운 강의실에서의 수업이나 유명 학자의 책이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고 할 때, 독자는 우선 큰 의심을 가지고 이를 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도덕적’ 딜레마는 강의나 책 속의 내용으로 다루어졌을 때, ‘도덕적’ 딜레마로 계속 존재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갈라진 철도선을 둘러싼 논쟁과 같은 이론적 사고실험이 복잡한 현실 조건들을 제거해, ‘도덕 원칙의 힘’을 제대로 시험대에 올려놓는 데 적격이라는 주장은, 현실성을 결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딜레마가 될 수 없는 ‘지적 유희’를 ‘도덕적’ 딜레마로 둔갑시키는 데 따라붙는 유명한 구실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유사(類似)-도덕적 딜레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유사-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되면, 논쟁은 무엇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토론이 아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 싸움의 양상을 띤다. 정의를 가리는 논쟁과 논리로 대결하는 논쟁은 완전히 다르다. ‘논리 싸움’에서는, 정의를 다루는 토의에서 핵심이 되어야 할 ‘옳음에 대한 고찰’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얼마나 ‘솔깃한 논리’를 댈 수 있는지만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정의’라는 일종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신성성의 후광에 어떻게든 기대어 득을 보려는 온갖 부당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비열한 합리화가 창궐한다. 이들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이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있는 그대로 ‘이득’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도덕’ 이라고 부르려는 것이다.
도덕적 딜레마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강렬한 감정으로 느껴지는, ‘정의’라는 요소를 요청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의식적인 이득 추구나 계산적인 마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옳음’에 대해 가장 ‘정의로운’ 선택의 촉구를 명하는 신성한 강제이다.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장에서는 이러한 정의에 대한 보편적 의무감이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현실 조건들을 명확히 밝혀 주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책을 통해 접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진정으로 논하기 위해서는, 1. 공리공론을 막기 위해 반드시 현실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딜레마들로 도덕적 딜레마의 범주를 국한해야 하며, 2. 현실적인 문제를 대하는 것이므로 관련된 모든 진실을 철저하게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을 제 1의 원칙으로 해야 하며, 3. 정의를 밝히는 작업을 논리 싸움으로 격하시키려는 이들의 그 논리가 갖는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 암묵적으로 정당하다고 가정된 권위나 이득을 폭로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정의란 논리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적인 도덕적 강제력이며 이를 온전히 밝히는 작업이 도덕적 딜레마에 관련된 모든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주장은 언뜻 보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위험하게 들린다.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역으로 도덕적 딜레마 상황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중립적인’ 입장이 정의를 다루는 데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규명하고자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를 사고하는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하는 데 있어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그 입장들을 비추어 보는 방법을 택하고 있으므로,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기 위한 첫 번째 요소는 충족된 셈이다. ‘정의를 다루는 세 가지 입장’이라고 했으나 등장하는 것은 실은 정의를 다루는 세 가지 ‘논리’이다. 첫 번째 조건이 만족되었으므로, 현실적 조건들을 따지고 이 입장들이 도입하는 ‘논리’를 따지는 두 가지 일이 남았다. 저자는 정의를 다루는 세 가지 입장으로 1. 행복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공리주의, 2.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지상주의 및 시장과 도덕, 3. 미덕과 좋은 삶을 위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한 정의를 제시한다.
공리주의는 선은 곧 쾌락이며 악은 곧 고통이고, 따라서 다수에게 적용될 정책은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을 도모하도록 정해져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은 ‘비용/편익 분석’을 핵심 방법으로 사용하며, 이는 중요한 가치들 역시 중립적으로 계산가능하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오랜 믿음에 익숙한 사람들이 느끼는 반발심에, 공리주의자들이 우리가 실제로는 일상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계산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지적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러한 예를 든다.
하지만 이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저자는 우선 공리주의자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가능한지부터 살폈어야 한다. 물론 이 개념은 허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한 행복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나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무엇도 알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본인조차도 항상 확고부동하게 알 수 없지만, 그 결과가 철저히 본인에 귀속된다면, 그것은 ‘본인’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수많은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욕구를 계산해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이 장담의 모순을 확인하려면, 우리가 ‘그들’이 계산해준 ‘우리’의 욕구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무엇을 희생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 계산해준 것에 따른 결과는 정말 ‘우리’의 욕구를 극대화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는가? 책에서 제시한, 포드 사가 ‘가스 탱크를 안전하게 부착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을 때 얻는 이익인 사람의 생명’을 ‘정부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했을 때, 이익보다 비용이 더 크다는 이유로 가스 탱크를 달지 않는 게 마땅하다는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생명까지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 계산법이라면, 인간의 생명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익이란 없으므로 그 계산법 자체가 모순임을 알 수 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그 다음으로 저자가 검토했어야 하는 것은 ‘계산가능성’이다. 공리주의자들의 말대로, ‘어쨌거나’ 우리는 일상에서 암묵적으로 중요한 가치들을 ‘계산’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은 속임수다. 공리주의자들은 ‘계산가능성’이라는 틀 안에 모든 상황을 우겨넣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자발적이지만 암묵적 계산 행위’를 도입하고 있다. 일단 이렇게 상대의 자발성을 가정하면, 이는 상대가 ‘이미 동의’했음을 함축하므로 상대를 설득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시한, 모든 운전자들은 암묵적으로 ‘운전 속도를 높여서 얻는 이익’과 ‘목숨이라는 비용’을 계산한다는 예가 이러한 ‘계산’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정말 그러한가? 이 예에서는(공리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다. 그런 계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운전에서의 위험과 같은 ‘불확실한 요인’이 계산에 진입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계산이 아니라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 특정한 결과가 나오리라고 확언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 되는, ‘예측’에 불과해진다. ‘계산’은 본래 객관적인 영역에서만 쓰일 수 있는 관념으로, 주어진 조건들을 바탕으로 누가 언제 수행하든 간에 예외 없이 같은 값을 낼 수 있는 상황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들의 ‘계산가능성’ 개념은 자신들의 주장을, ‘계산’이 갖는 특성인 객관성과 예외 없음으로 포장하려는 데서 귀결되는 억지일 뿐이다.
두 번째 논리인 ‘자유지상주의 및 시장과 도덕’은 ‘최소국가’와 ‘자유시장 철학’ 그리고 ‘자기소유’라는 세 가지 논리를 핵심으로 하며, 이를 비추어 볼 사례로 ‘징집과 고용’, ‘대리모 논쟁’을 든다. 저자는 자유지상주의가, 보편적 인권 중 하나이자 쟁취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인간답게 살 권리’, 즉 사회권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사항인 온정주의, 도덕 법,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최소국가 및 자유시장 철학을 굳이 옹호하는 이유는, 소유권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자유’를 흠 없이 보장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옹호는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을 소유한다’는 ‘자기 소유’개념에서 발원함을 제시하고, 자기 소유 개념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현대적 인권 개념과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정도로 인권의 희생을 요구하는 최소국가 및 자유시장 철학을 저자는 ‘마이클 조던의 고액 연봉이 모두 그의 소유인 것은 정당한가?’에 대한 예를 통해 검토한다. 그리고 제기되는 문제점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자의 반박은 한결같이 ‘조던은 자기 자신을 소유하므로, 그의 노동도 그의 소유이고, 따라서 그의 노동으로 번 연봉도 당연히 그의 소유이다’는 ‘자기소유’ 개념에 근거한다. 따라서 자유시장주의와 시장 및 도덕을 살펴볼 때 그 정당화를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근원인 자기소유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콩팥 판매, 안락사에서부터 합의 하에 이루어진 식인 행위를 들며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자기 자신’을 객체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수행했지만, 소유권이 자유를 대변하기에 적절한 개념인지 여부와, 자기소유개념이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상황 등 보다 근본적인 사항은 문제삼지 않았다.
우선 ‘소유권은 자유를 대변할 수 있는 개념인가’부터 생각해 보면, ‘소유권 절대’는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근대의 자유 개념을 설파할 때 중심에 섰던 논리로서, 소유권은 다른 여러 가지 권리들을 다루는 데 ‘소유’의 논리를 광범위하게 적용한 근대 역사의 산물이라는 특수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적용은 불합리하지만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문제가 많은 이 관행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여러 요소가 버젓이 소유권 논리로 해석되고, 정당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보자. 흔히 사회권을 일컫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이야기할 때, 이러한 권리를 어떤 실체를 가지는 물건을 소유하듯 ‘소유’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 권리가 행사되는 것을 방해하는 실질적 장애 요인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는 ‘소유’라는, 가시적인 특정 대상에 철저히 국한되는 소극적 보장으로는 온전히 치환될 수 없다. 마치 물건이 주어지듯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게 되면, 사회적 약자가 어떤 전시행정적 조치나 허울뿐인 사회보장책을 ‘받는’ 것만으로 그 ‘권리’를 ‘주는’일을 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쉬울 것이다.
자기소유개념이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문제점을 알 수 있다. 바로, ‘자기 소유’로 정의되는 개인의 자유는, 이미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므로’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는 경우에 한해서는 그나마 문제없이 적용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조용히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미 ‘고액 연봉’을 손에 넣고 있는 마이클 조던의 사례에서 우리가 그에게 그 연봉 전체를 다 가질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의하는 건 가능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경우 있지도 않은 고액 연봉에 대한 그 사람의 자유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유’는 이미 가지고 있고, 상황 독립적인 어떤 것에 대해 논할 때 쓸 수 있는 말이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소유개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이라는 모종의 대상과 1:1로 대응시킬 수 있다는 불분명하지만 광범위한 상식을 바탕으로, 개인적 자유는 마치 자기 자신처럼 ‘이미 만인에게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켜 이러한 문제점을 은폐한다. 개인적 자유는 ‘자연적으로 평등하게 주어진’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는, 유동적인 ‘상태’인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개인의 자유’는 이렇듯 실제로는 ‘특정 사회계층만이 향유 가능한 개인의 자유’만 옹호한다는 데 그 결정적인 허점이 있다.
논리를 검토하는 데에는 그것이 내포할 수 있는 암묵적 전제를 비판적으로 따지를 작업이 중요했다면, ‘징집과 고용’ 및 ‘대리모 논쟁’ 이라는 현실적인 사례를 대할 때는 그러한 작업과 함께, 요인 2 즉 현실적 조건들을 철저하게 고려하는 일을 통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저자는 이 두 사례에서 각각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국방의 의무)’와 ‘모성의 가치와 돈으로 사고팔 수 없는 생명의 가치’라는 무척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가치론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론적인 가치론은 뚜렷한 이유 없이 ‘근원적으로 옳지 않으므로, 옳지 않다’는 말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하면 문제의 윤곽이 분명해진다. 첫 번째 사례에서, 반드시 자국인이 그 구성원인 것은 아닌 용병회사의 군인이 국가의 정규군 수를 넘어선 것이 이미 현실이라면, 이 혼합 군대는 ‘국방의 의무’라는 민주사회의 의무를 지고 있는 국민들로 구성된 군대로 볼 수 없으므로 저자가 썼던 국방의 의무의 중요성 강조는 무의미해진다. 또한, 두 번째 예에서 핵심 사항은 ‘모성과 생명은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을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는 선언이 정의에 부합하는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성과 생명을 시장에 맡겨 버리면 대리모의 기본적 인권이 박탈되어 이들이 노예적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무척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리모를 구하는 비용이 미국보다 인도에서 싸다고 해도, 인도 대리모의 ‘공급’이 높아지면 그 가격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15년 일해야 벌 돈을 1년 안에 벌 수 있는’ 대리모의 대리 임신 사례비가 현재처럼, 노동을 통해 버는 소득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 고가인 상황이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인도에서 딸들을 둔 가난한 가정들은 사례비가 그런 압도적 고가가 아닐지라도, 생계가 어려워지고 자본금이 없으면 자본이 없는 노동자는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자신을 시장에 팔아야만 하듯이, 딸들에게 대리모로 나서는 것을 반강제로 권하게 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 이는 가난한 가정의 딸들을 일종의 ‘대리임신 기계’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의 노예로 만들 위험이 크다.
미덕과 좋은 삶을 위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한 정의는 저자가 생각하는, 정의를 규정짓는 가장 합당한 접근방식이다. 저자는 10장에서 정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주장할 ‘공동선과 도덕 정치에 대한 정당성’을 고려하기에 앞서, 이러한 사고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난제로 여겨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 또는 직접적 합의 없이 부과되는 도덕적 의무인 ‘연대 의무’가 왜 정당한지를 밝힌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대 의무’의 정당성은 그것이 ‘현재 우리의 일부’라는 현실적인 필연 조건에서 기인한다. 옳건 그르건 간에,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개인이 공동체에 갖는 감정은 실질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크게 규정지어 그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게다가 이 의무는 자국의 부당한 전쟁 수행 비판 등, 개인이 공동체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제기하는 등의 도덕적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공유’가 도덕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라는 이 주장은 명백히 옳지 않다. 이는 그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다. 즉, 어떤 집단이 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그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도덕적 부당함을 절감하는 데서 온다. 오히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그 집단이 저지르는 악에 대한 정당화 논리와 세뇌 공작에 집단 외부의 사람들보다 절대적으로 취약하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냉전의 역사이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 상대 진영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정확하고 공격적으로 수행했으나, 자기 진영 내의 비판에는 병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 거대자본의 횡포를 비판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할 것과 부자들에 대한 감세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거나, 소련에서 자국에 대한 비판자를 정신이상자로 판단해 병원에 감금하는 등, 그러한 병적인 거부는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이고 편집증적인 형태를 띰과 동시에, 정당화할 수 없는 수많은 폭력을 초래했다.
‘연대 의무’가 정의에 부합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저자는 ‘연대 의무는 어쩔 수 없는 공동체적 소속감으로 인해 느끼는 도덕적 감정’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펴기보다, 20세기에 들어 집중적으로 정의의 영역에 부상한 ‘연대 의무’가 현실적으로 어떤 조건 하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는지를 좀 더 철저하게 조명했어야 했다. ‘연대 의무’는 대량 학살을 저지른 국가가 자청한 숭고한 도덕적 책임의식의 소산이 절대 아니다. 연대 의무는 그런 만행을 저지른 국가가 어쩌다 ‘패전국’이 되었고, 이에 의해 ‘승전국’들이 들이댄 온갖 직접적, 암묵적 압박에 의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 연대 의무의 사례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제시하는데, 살해된 유대인 피해자의 수 600만 여 명은 미국의 건국자들이 학살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수와 비교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해자’가 어쩌다 ‘세계 초강국’으로 부상하는 바람에 이들의 눈물과 피의 역사는 그에 합당한 연대 의무를 촉구하지 못한다. ‘연대 의무’를 이런 식으로, ‘가해 집단이 자발적으로 지는 도덕적 책임감’등으로 규정지으면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의 크기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연대 의무’가 정의에 부합하는 더 합당한 이유는, 만일 이러한 의무를 불인정할 경우, 현실적으로 발생 가능한 가장 거대한 규모와 극도의 잔혹함으로 자행된 범죄를 처벌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도덕과 정의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기초를 침식시킬 위험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사람은 ‘자신이 한 행위’이므로 그 범죄성을 물어 징역에 처하지만 대량학살을 저지른 집단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개인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 죄도 물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정의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 것이다. 요컨대, ‘연대 의무’가 정의에 부합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 의무는 가해 집단의 도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부정할 경우 인류 보편의 정의감에 막대한 타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 하에 부과되는 것이다.
저자는 ‘연대 의무’에서 도출한 개인-공동체 간에 숙명적으로 공유하는 도덕 감정으로부터, 가장 정의에 부합하는 정치는 ‘어려운 도덕 질문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장을 통해 ‘공동선의 정치’를 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어느 집단에서나, 자유롭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 진행되는 정치적 논의가 아닌, 집단이 특별히 친밀함을 느끼는 특정 감정이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논의를 추구할 때 비이성적이고 광적인 여론몰이와 폭력이 난무한다. 저자의 주장이 갖는 이러한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재 미국의 유명한 극우 시민정치집단 ‘티파티’라든가, 조 더 플러머(Joe the Plumber), 러시 림보(Rush Limbaugh)와 같은 유명한 극우 인사들이 선동적으로 진행하는, 인기 있는 정치 라디오 방송 및 그 파급 효과다. ‘티파티’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 민주당의 대선 자금 대부분을 댄 금융기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혈세를 금융기관의 구제금융에 쏟아붓는 오바마 대통령을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등 어이없는 논리로 굳게 무장해 있는데, 이들 다수는 ‘열심히 일하고, 신을 섬기며,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계속해서 월급이 줄고 근무 조건이 악화되기만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화가 난 백인 남성’들이다. 이들이 느끼는 불만 사항은 분명 정당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그 대책은 도대체 ‘무엇’이 열심히 일해도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사회를 만드는지 그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는 데서 출발해야 ‘분노의 대상’을 올바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진보 정치인들의 정책들 때문이다’는 허구적 선동으로 대중의 울분을 악용하는, ‘미국적 가치’를 표방한 여론몰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도덕이나 가치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적극적 논의’는 객관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실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 것을 방해한다.
‘정의’가 도덕과 관련된 것이며,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지켜내는 것은, 어떤 ‘논리’가 정의를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논리로 설명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도덕적 강제로 다가로는 정의에 대한 감정을 논리로 막으려는 시도에 대해 언제나 날카롭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데 있다. 정의를 가장 확실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의를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론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여러 학설들의 대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들은 편의와 기교에 의해 언제나 만들어지고 악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를 논리 싸움으로 보는 이런 견해는 특정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논리로써만 설명되는 ‘정의’도 느낄 수 없다는, 비합리적인 전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어떠한 권위나 가치에도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현실 속에 실재하는 사례들에 살아 숨쉬는 도덕적 딜레마들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실질적으로 어떤 구체적 요소들이 보편적인 정의 감정에 따르지 않는 선택지를 택하는 데 암묵적으로 작용하는지를 파헤치는 것이 정의를 수호하는 진정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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