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도 해묵은 지젝

일반부문 2등작

새롭고도 해묵은 지젝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proles


#1. 해묵은 지젝(?)

“이렇게 보면 진정한 위험은 우리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대신 우리가 계속해서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할 서사가 그 붕괴에 관한 지배적 서사가 되리라는 데 있다.”(44)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 사건은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만이 ‘공식적으로’ 이 세계에 살아남았다. 이에 부응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는 이제 끝났으며, 남은 것은 세계의 진로에 놓인 자잘한 장애물들을 걷어내는 일뿐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이 시기는 전 세계 좌파에게 체념과 무기력을 가져왔다. 예컨대 김홍중이 『마음의 사회학』에서 진정성의 주체가 속물적 주체로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 바로 이 1990년대 초반의 ‘대타자’의 붕괴였다. ‘위대한 실험’은 결국 ‘집단수용소’로 끝났다는 것, 믿음의 상실이야말로 냉소적 주체를 만드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역사의 종말,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 세계 자유공동체의 도래는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게 하는 새로운 믿음이다. “분명 자본주의는 문제가 있어.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제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체제 내 개혁을 하자...” 좌파의 이러한 믿음이 냉소주의자인 헨리 키신저의 태도와 정확히 겹쳐지는 것은 우연일까? “공산주의는 나쁘지만,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협상을 하자...” 이것은 우리시대 좌파와 우파의 기묘한 공생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2001년 미국 한복판에서 발생한 9.11 테러는 세계가 우리의 믿음처럼 매끄럽게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2008년 금융위기는 유토피아적 믿음에 감추어져 있던 자본주의의 위기를 드러냈다. 가자지구와 월스트리트는 일종의 구멍(crack)이었던 셈이다. 지젝은 바로 이 오늘날의 구멍들에 관심을 집중한다.

2009년 출판된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이하 『비극』)는 21세기의 지난 10년을 열고 닫았던 9.11테러와 금융위기를 마주하는 (좌파처럼 암묵적이든 우파처럼 적극적이든) 후쿠야마주의자들의 태도와 그 태도를 규정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교착(deadlock)에 대응하여 새로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적 가설’에 대한 책이다.

“공산주의라니? 이미 21년 전 붕괴해 버린 그 끔찍한 전체주의적 악몽을 다시 재현하려 한단 말인가?” 그가 ‘공산주의’의 유령을 다시 불러올 때,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은 납득할만한 일이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세계 전쟁과 숙청, 계획경제로 인한 빈곤을 초래한 참혹한 ‘실패’의 흔적이며(예컨대 북한), 그렇기 때문에 ‘교훈’으로만 남아야 하고 절대로 오늘날에 초대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과감하게 이 실패한 카드를 꺼내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끝난 이야기라고 상상했던 수많은 ‘해묵은’ 것들 속에 담겨 있는 해방적인 가능성의 순간, 열림의 순간을 이 자리로 불러낼 수 있을 때에만 오늘날의 곤란함을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버려졌던 순간들이 사실은 해방의 가능성을 포함했던 순간은 아닌가? 이것이 그가 공산주의라는 위험한 대상을 오늘날 불러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모순, 이데올로기 같은 낡은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페리 앤더슨이 서구 마르크스주이를 괴롭힌 질문으로 꼽았던 것은 혁명적 주체와 계급의식 사이의 관계, 즉 이론과 실천의 간극이었다. ‘어째서 혁명은 ’지연‘되는가?’ 이 해묵은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제시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우리가 내세운 답변이 미숙했음을 증명한다. 지젝은 이렇게 새롭고도 오래된 대상을 토해 우리를 도발한다.

그렇다면 지젝을 맞이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의 도발이 과연 해묵은 문제들이 처한 교착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가? 특히 그가 혁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적당한 대답을 줄 수 있는가? 지젝의 스타일이 그리 진지해보이지 못하다는 지적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진정으로 ‘출구’를 제시할 수 있을 만큼 명민하고, 급진적이며, 근본적인지를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2.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

지젝의 비교적 최근작인 『비극』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 금융위기와 이에 대한 인식과 반응, 그리고 이를 규정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에 대한 탐구
  2. 교착을 해결할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을 위한 공간을 여는 지점에 대한 탐색

우리는 2008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가장 순수한 반응은 기 소르망(Guy Sorman)의 대답일 것이다. “이번 위기는 무척 짧을 것이다.”(49) 루비니 교수가 ‘선진국의 경제회복은 U자형, 개발도상국의 경제회복은 V자형’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이는 금융위기가 일시적 장애이며, 곧 해결되어 세계경제가 정상적인 경로로 진입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금융위기의 원인(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개인적 욕망과 비합리성(투기, 노조의 임금 개입) 혹은 반시장적 개입을 일삼는 정부의 실패다. 그리고 이 투기와 규제를 걷어내고 합리적인 실물경제의 회복을 이끌어낸다면, 위기는 해결될 것이다. 어떻게 그 투기와 규제를 걷어낼 것인가? 인위적인 개입을 풀면 된다. 구제 금융을 반대하고, 노조를 약화시키며, 세금을 줄이기.

그러나 지젝은 금융위기를 단순히 탐욕이나 비합리성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도덕적인 제스처나 ‘실용적인’ 제스처는 구조적 모순을 개인적 실수로 전치하고, 체제의 모순을 은폐한다. 건전한 투자와 비합법적 투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 따위는 없다는 기 소르망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투자란 “그 핵심에 있어 어떤 계략이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의 차용행위”(76)다. 일부 ‘부정직한’ 상점과 대다수의 ‘정직한’ 상점을 ‘개인적 욕망’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불만 제로> 같은 소비자 고발프로그램은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자본의 동학이 만들어내는 모순이야말로, 체제의 위기와 붕괴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내적 결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기의 성격에 대해 고집스럽게 따지기는커녕, 그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창조적 파괴’야 말로 가장 전형적인 수사가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순간들에 내재하는 다른 결말의 가능성을 중시하는 ‘카프카적’ 시간관과 배치된다. 연속적이고 발전적인 선(線)적 역사관은 역사의 패배자들의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는 발터 베냐민의 주장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가능성’과 적대하는 ‘냉소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를 받아들인 비판적 좌파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전복적 상상력을 상실한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생태자본주의’다. ‘윤리적 소비’, ‘공정한 무역’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공익을 확대하는 효과적인 체제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는 손상되지 않은 채, 단지 탐욕과 비합리적인 개인적 특성만이 문제로 부각된다. 그리고 그것만 극복될 수 있고, 극복되어야 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인간화 전략’이다. 인간화 전략이란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통해 그를 “그의 지배에서 비롯된 참상들”(83)로부터 구별해내는, 즉 대속(代贖, redeem)하는 이데올로기다.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한다. 이스라엘 군인도 인간이다, 아이히만도 자상한 아빠였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이라면 왜 이런 일(살인, 강간, 전쟁...)을 벌이는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인간화 전략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은 이 궁색한 대답뿐이다.

68혁명이 자본주의에 가했던 ‘비인간화’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비판마저 자신의 특징으로 포섭해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68혁명이 요구했던 권력의 재분배는, 무엇인가 할 수 있게 해 주는 ‘허용’으로 변질되었다. “당신은 마약을 할 수 있고, 당신은 국가를 욕할 수 있고, 당신은 친환경 정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만을 하세요.(단 자본주의의 대안은 요구할 수 없습니다.)” “68년 5월은 총체적인(그리고 전적으로 정치화된) 활동을 지향했으나 ‘68정신’은 이를 다름 아닌 사회적 수동성의 형식인 탈 정치화된(depoliticized) 의사(擬似)활동(새로운 라이프스타일 따위)으로 바꾸어버렸다.”(124)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블베드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싱글로 해드릴까요?”같은 ‘허용된 제한된 선택’이다. 아무리 광화문 광장에 민주적 권력이 자신의 뜻을 펼친다 해도)“소고기 수입은 안 된다!”), 정부는 “당신들은 잘 모릅니다.”라는 한 마디로 그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이 채택한 답안을, 민주적 권력이 자유로운 듯이 추인할 때에만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된다. 지식에 대해 권력은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과 “안다, 하지만...”의 냉소적 태도는 공명한다.

#3. 가설의 불투명함

이러한 교착 상황 속에서 지젝은 지금껏 터놓고 말할 수 없었던 ‘공산주의’를 하나의 돌파구로서 제시한다. 공산주의를 하나의 돌파구로서 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젝은 1914년 심각한 패배에 직면한 레닌을 소환한다. 레닌은 그 명백한 패배 앞에서, 어떻게 하면 기회주의적으로 대의에 대한 충실성을 버리지 않은 채, 후퇴를 감행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의 답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to begin at the beginning)"이었다. 이것은 포스트-공산주의적인 오늘날에도 유효한 주장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일이다. 처음부터 누가,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한다는 것인가?

가장 먼저 ‘누구’부터 따져보자. “서구 맑스주의를 특징짓는 커다란 문제는 혁명주체 혹은 행위자(agent)의 결여였던 것이다. 노동계급이 즉자에서 대자로의 이행을 완수하여 혁명적 행위자가 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178) 이 오래된 질문 앞에 우리는 수많은 실체들을 대령했다. 루카치는 ‘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를, 뤼시앵 골드만은 ‘신 노동계급’을 불러왔지만, 여전히 프롤레타리아라는 형식과 실체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과 그 간극을 채우는 방식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사실 1917년은 이미 고정된 실체로서의 노동계급의 실패를 새겨놓았다. 지젝이 보기에 성공한 혁명은 역사의 다소간 명확하고 지배적인 선이 끊어지는 위기가 발현할 때, 그 틈새를 낚아채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 때 발생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누가 진리를 담지하는지 찾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그러한 틈새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일이다.

지젝은 이러한 공산주의의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적대로 아래의 네 가지를 꼽는다.

  1. 생태적 파국의 위협
  2.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3.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생명공학)의 사회·윤리적 함의
  4.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 간의, 즉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지젝은 이 중에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의 적대인 4)는 앞서 세 가지 적대와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앞서의 세 가지 적대는 실체로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s)으로 불리며,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을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사유화, 즉 점진적으로 둘러막는다(enclosure). 이런 둘러마기는 거꾸로 자기 자신의 실체로부터 배제되는 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이다. 4)는 바로 ‘과정’으로서 형식에 가깝다.

마지막 적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앞서의 세 가지 적대를 해소하려 하는 것을, 지젝은 ‘사회주의’라고 지칭한다. 그에게 있어 공동체주의, 포퓰리즘,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자본주의는 오늘날 현대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존속을 위해 재발명해야 하는 ‘모종의 사회주의’다. 반대로 공산주의는 타락 이전의 실체로 주체가 복귀하는 게 아니라, 배제가 고유한 자리인 ‘몫 없는 자’들이 새롭게 구성하는 정치공간의 재배치다.

문제는 여기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은 ‘내놓을 것이 없는 자’의 위치와 주로 관계할 뿐, ‘노동자 계급’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그렇다면 이 내놓을 것 없는 자, 실체 없는 주체는 그저 동일시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으로 머무는 것인가? 지젝이 라크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개념을 해방정치와 연결하여 언급할 때 이 의문은 더욱 커진다. “진정으로 해방적인 모든 정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의 보편성과 ”몫이 없는 부분“의 보편성 사이의 단락(短絡, short-circuit)에 의해 생겨난다. ...(중략)... 사회-정치적 공간 안으로 배제된 자의 침입을 일컫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름이 있으니 곧 민주주의다. 오늘날 우리의 질문은 민주주의가 여전히 이러한 평등주의적 폭발에 알맞은 이름인가 하는 것이다.”(199)

베른슈타인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의 냉소적 태도, 즉 세계적 자본주의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이 ‘완수’될 수 있다는 믿음(“자본주의는 착취를 일삼는다. 하지만 노동자가 부유해지고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아. 그러니 개혁을 진행하자...”)이 우리 시대 좌파의 본질적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분명히 그가 계급에 대한 맑스의 테제를 온전히 ‘실체’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지젝은 분명 옳은 판단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젝 역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서 있다. 실제로 ‘혁명’이 발생했다고 말하려면, 언제 이 ‘몫 없는 자’들은 실체적으로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차베스가 기대는 ‘몫 없는 자’들은 누구인가? 무엇이 그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지젝은 여기서 순수한 형식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체와 형식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아이티 혁명’을 통해 ‘몫 없는 자’들이 공산주의적인 숭고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예를 보여주려 한다. 칸트는 사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일 때, 그리하여 국가로부터 독특할 때에만 보편적 이성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봤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었을 때, 진정으로 열광했다. 문제는 계몽주의자들에게 혁명은 오로지 ‘문명인’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고, 그 밖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없었다.

아이티는 바로 그 바깥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난 혁명은 “그것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에조차 생각할 수도 없는 일”(223)이었다. “백인들에게서 그들 자신의 전통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의 독점권”(240)을 박탈해버린 아이티 혁명은, 진정한 정치적 사건이란 기존의 질서 속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게 되는 사회집단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이티, 자코뱅, 레닌, 마오쩌둥이라는 ‘실패한 혁명’의 계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순간적인 해방의 ‘순간’들보다, 실질적인 혁명의 효과가 일상에서도 지속되는 새로운 ‘기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지젝은 바디우의 ‘빼기’에 주목한다. 기존의 질서 속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 자리로 물러서는 것은, 보편성을 체현하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망루에 올라선 이들이 ‘시민’이 아니라 ‘철거민’일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제를 하나의 모델로서 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빼기에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시민들의 목소리를 취합하는 정치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배제되는 자들과 포함하는 자들의 적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유지하는 정치체다.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젝에게 그것은 인민의 의지(will)을 비-의욕(non-willing)으로 전환하여, 그 의욕을 국민을 재현/대의하고 그를 위해 의지를 발휘하는 어떤 행위자(agent)에게로 양도하는 수동적인 체제다.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가 하나의 타락, 편향을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실현에 관한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가 가설을 제시하려 노력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 속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 자리인 프롤레타리아와의 연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일 때, 어떤 경우에 우리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인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라는 호명과 노동자 계급을 연결시킨 이후,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은 확인 가능한 표지를 찾아 헤맸다. 대부분은 특정한 실체적 계급을 그 표지로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지젝은 역사의 진리를 성취할 ‘대리자’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다.”(302) 이는 혁명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혁명은 일어나야 하며, 일어날 수 있으나 다만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면 그 누구도 대신 혁명을 성취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젝이 보기에 우리는 매우 자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를 실체 없는 주체고 끌고 갈 자본주의의 운명에 제동을 걸 프롤레타리아로 만드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새로운 해방정치는 이제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로부터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으로부터 자라나게 될 것이다.”(185)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배제와 폭력과 억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때, 우리는 보편적인 위치에 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지젝의 프롤레타리아적 위치다. 거기에 분열되어 있는 노동자와 추방자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4. 새로운 지젝

이러한 타락에 맞서는 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호모 싸케르(Homo sacer)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방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186)

지젝은 우리에게 ‘전미래’적인 대응을 요구한다. 전미래적인 대응이란 파국을 운명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도래할 때에 나타날 문제들에 대비해 예방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인데, “운명과 자유로운 행동(‘만약’을 저지하기)은 그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다.”(297) 이것은 우리의 진정한 행동이 진리에 대한 앎이 아니라, 믿음, 신념에 걸려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302) 우리는 역사의 진행이 우리 편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저버리고, 전적으로 ‘순수한 주의주의’로서, 자유롭게 그것을 멈추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베냐민의 목소리와 공명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기차는 계곡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다. 진정으로 중요한 행위는, 역사의 진행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의주의적 태도가 가지는 위험은 간단히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공’을 찬양하는 자기계발서의 주문을 비판할 때 근거로 드는 것은 그것은 그 성공이 구체적인 인간의 물적 조건과 착취 관계를 배제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주의주의는 그것이 혁명에 대한 신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과연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추방자들과 노동자들의 분열을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특징지어져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의주의’가 가져올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만약 지젝을 옹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손해를 감수하는 단절’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건강에 좋지 못함을 알면서도 끊지 않고 담배를 피운다.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행위는 담배를 끊는 것이다. 우리는 지젝이 언급하는 바디우의 말, “비존재보다 재난이 낫다.”(mieux caut un désastre qu'un désêtre)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 닫히지도, 열리지도 못한 채 과거로 흘러가버린다 하여도, 우리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 내포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153)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출구’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분명 해묵은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해묵은 문제를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지젝은 새로움을 준다. 그가 오바마의 승리가 열광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바처럼, 지젝은 ‘지금껏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젝에 열광할 수 있다!

동시에, 지젝에게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법을 본다. 만약 지젝이 말해주고 있는 바가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절망하지 않음’이라면? 우리는 그의 섹시한(!) 글에 유혹되지 않고 그의 제스처에 동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젝을 수용하는 방법은, 지젝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지젝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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