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 상호보완과 연대의 메타포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거대한 전환 - 상호보완과 연대의 메타포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지역주민 김덕영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

인간과 역사는 단편적 수식으로만 정리될 수 없고 2차원의 그래프만 가지고 다 표현될 수 없습니다. 각종 제약조건이 전제되어진 2차원 그래프와 수식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단편적 이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경제학의 논리와 방법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의 일등공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폴라니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합니다. 기존 논의의 프레임을 탈피하라고 촉구합니다.

폴라니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나 이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와 케인즈주의 모두 형식적 경제의 프레임에 갇혀있다고 봅니다. 폴라니는 형식적 경제와 실체적 경제를 구분하고 실제적 삶의 현실에서 이해되는 “살림살이의 경제”에 주목합니다. 살림살이의 경제는 인간에 대한 가정을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경제인’으로서의 기존이해를 거부하고 사회속에 구성되어져 가는 ‘사회인’으로 이해합니다.

폴라니의 이러한 인식기반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폴라니는 사회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일차원적인 접근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면적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인간과 사회가 한 차원으로 이해될 수 없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연구도 자연과학의 방법론과는 다른 접근을 취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폴라니의 논의 속에서는 개인과 국가 어느 누구도 주도적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자발적인 공동체들이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갑니다. 각 사회 구성원들과 집단들은 사회에 대한 유기체적 이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유토피아

자기조정적 시장은 만들어진 유토피아라는 것이 폴라니 주장의 핵심입니다. 시장의 자연적 조절을 신뢰할 때 각 개인의 경제적 합리성 추구만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구성된 것도 아니고 자기조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시장은 중상주의 국가가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토지, 노동, 화폐의 상품화와 함께 만들어집니다.

자기조정시장의 형성이 인류가 발전해 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견되어진 것이라고 본 기존의 인식은 인류학적인 전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회의 전통과 문화속에 묻혀져 있었던 시장은 국가의 계획에 입각하여 자기조정시장으로 등장합니다. 사회에 묻혀있던 시장이 탈 사회화되어 시장의 논리가 사회를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시장이 사회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을 때 시장의 가격으로 평가될 수 없는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이 훼손됩니다. 오로지 희소성에 입각한 가치상승은 실체적 경제와 유리된 거품경제를 야기할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자기조정적 시장이 철저히 국가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논리에 따른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조정적 시장은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담아낸 유토피아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단일한 시장에의 원리가 관리되지 못하고 이념화될 때 사회는 파괴되고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대응에 나섭니다. 다시 시장을 사회속에 착근시키고자 합니다.

자기보호기능으로서의 대응: 사회주의, 뉴딜정책, 파시즘

누적되어오던 자기조정시장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충격이 가해졌으니 바로 1929년 대공황입니다. 대공황은 자기조정시장의 유토피아가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대응들이 세계사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폴라니는 이를 사회의 자기보호기능의 발동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사회의 다양한 전거들을 통해 각기 다기한 반응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미국의 뉴딜정책, 유럽의 파시즘이 그것들입니다. 모두가 자기조정시장에 대한 사회의 다양한 보호기능으로의 양상으로 파악합니다.

폴라니의 분석은 자기조정시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사회의 보호기능이라는 시각으로 20세기 이념의 시대를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실체적 경제에 기반 한 총체적 분석입니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와 케인즈와 확연히 다른 프레임으로 분석한 폴라니의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폴라니는 과연 국가와 시장 그 어느 지점에도 방점을 찍지 않고 사회라는 폭넓은 틀을 통해 전환의 시대를 설명합니다.

계급이 사회를 결정하는가? VS 사회가 계급을 결정하는가?

마르크스의 눈으로 보았을 때 폴라니의 분석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주목하지 않는 한계적 논의로 인식됩니다. 폴라니는 사회의 자기보호기능가운데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자본가 및 지주들의 저항 또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현상을 분석하게 될 경우 잉여가치를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권리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며 자본가 및 지주에 대한 책임이 반감될 수 있습니다.

폴라니는 그러나 반문합니다. 과연 계급이 사회를 결정하는가? 한 계급의 시각에서 추구한 사회의 변혁이 총체적 사회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어느 한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폴라니가 보기에 하나의 잣대로 사회를 재단하는 일원적 접근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폴라니는 사회가 계급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기에 주목하는 바는 계속해서 사회입니다. 사회의 총체적 이해를 통해 다차원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노동과 토지 그리고 화폐의 상품화를 등가적으로 볼 수 있는가?

자기조정시장의 출현을 분석한 폴라니의 시각에서 노동과 토지 그리고 화폐가 상품화되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노동, 토지, 화폐의 상품화를 과연 등가적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각 본원적 생산요소들의 상품화가 평면적으로 동일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큰 의문이 듭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구매력의 증표는 상품화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와 자연의 가치, 그리고 화폐의 가치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되고 제한됩니다. 물론 자기조정시장에서의 세 가지 본원적 생산요소들은 오로지 시장에서만 평가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국가의 계획에 따른 상품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제되고 있는 무엇인가입니다. 이점에 착안할 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소유권의 문제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정당한 소유로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이지요. 폴라니의 논의가운데 전제되고 있는 것은 지주의 토지 소유권과 노동자의 자기 노동력 소유권입니다. 후자의 경우 자기의 노동에 따른 소득을 획득하는 것을 문제시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토지소유권에 대한 부분인데요. 토지는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는 자연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자연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주는 과연 그 권리가 어디로부터 나오느냐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할 경우 지주의 정당한 권리가 그 지위를 잃게 되며 인클로져운동이 나타나는 근원적 문제에 바로 토지소유권의 정당성 여부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본원적 생산요소의 상품화 이전에 각 특성별 생산요소에 따른 다원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상품화되는 현상을 가능케 한 소유권의 문제해결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복합적 자유의 꿈 & 다원적 평등의 꿈은 어디에서부터?

공동체주의자로 평가받는 왈쩌는 다원적 평등의 가치를 역설하였습니다. 물론 왈쩌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평가합니다. 기존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무시하고 있기에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라고 일갈하고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는 공동체적 가치에 집중하게 될 경우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주장합니다.

왈쩌는 자유주의와 이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적 가치에 집중되어진 일원적 접근의 논의라고 분석합니다. 자유주의에 따른 독점의 문제가 중차대한 것은 인정하지만 경제적 가치에 따른 일차원적 평등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것이지요. 이 사회의 가치는 다양한데 어떻게 단일한 잣대로 평등을 말하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접근을 기계론적 접근으로 이해합니다.

왈쩌의 이러한 견해는 마지막 장을 “복합적 자유의 꿈”으로 장식한 폴라니의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왈쩌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11개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가운데 다양한 영역에서의 평등을 향한 노력이 전개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11개 영역은 예로 든 상징일 뿐 구체적인 영역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구성되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출발점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폴라니의 논의도 마찬가지라고 느꼈습니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의 회복을 주창하고 있지만 구체적 첫 걸음을 어디서부터 내딛어야 할 지 모호합니다.

저는 독점의 문제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첫 걸음은 부가 창출되는 지점, 즉 생산에의 과정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본원적 생산요소를 국가 또는 시장의 한 영역으로 재단하지 말고 각 생산요소별 특성에 따른 차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하게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인간과 자연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자연은 인간에 비해 영속적 특성을 지닙니다. 부를 창출하는 노동과 토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유한적 능력과 영속적 능력의 차이는 부를 창출하는 능력의 차이를 파생시킵니다. 따라서 더 많은 부의 창출을 향한 노력은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소유권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과 자연을 독점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차이보다 더 극심한 차이를 야기합니다. 자본의 정의를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인간의 수단으로 볼 때 자본은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 공장, 생산체계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의 속성역시 자연의 영속성에 비하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가상각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자연을 소유한 개인은 자본을 소유한 개인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복합적 자유를 향한 그 출발점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상이한 접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는 자연은 상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소유권이 귀속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전제가 확보되지 않은 논의는 그 출발점을 상실한 이상적 레토릭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시장과 공동체의 변증법적 관계

자기조정적 시장이 아닌 사회에 묻혀 진 시장은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건전한 사회를 구성해 갑니다. 시장을 사회가 합의한 제도로 이해하고 공동체는 자발적인 구성원들 간의 연대로 이해 할 때 시장과 공동체의 관계는 제도적 희년과 자발적 희년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이병천 교수는 폴라니의 논의를 통해 시장과 공동체의 변증법적 관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제도적 차원의 문제인식과 대안은 획일성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반면 공동체적 차원의 접근은 우리끼리의 폐쇄성의 위험을 안고 있지요. 따라서 두 방향의 움직임이 서로를 견제하며 상호작용하는 변증법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상호보완과 연대의 메타포

폴라니의 생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의 논리로 전 사회를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하나의 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양한 사상과 이론을 지금 여기의 상황에 맞게 입체적으로 해석해내는 창조적 노력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진정성을 가진 다양한 움직임들과 어우러지는 연대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환의 과정이 우리 눈앞의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전환의 실질화를 위해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를 엮어내는 연대의 과정을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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