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s Mundos

일반부문 3등작

Dos Mundos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 안드레아


Dos Mundos를 아시나요?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페미니즘의 도전, 이 책이 나온지 언제였던가.. 적어도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 이 책의 존재를 알았고, 학년은 3학년이지만 나이만 봐서는 이미 졸업을 했을 법한 나이기에 이 책은 여성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씩은 읽고 넘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기 전 1학년 때 학교에서 마련한 강의에서 정희진 선생님을 뵌 적이 있다. 그러니까 책보다 저자를 먼저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여성학을 처음 접한 시기에 개념이 잘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희진 선생님이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연구하는 분들은 어떠한 모습이라는 고정 관념을 형성할 사이도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강의는 곧 'empower' 였다. 서로에게 힘을 주는, 같이 공존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이다. 그리고 여성주의가 지니는 힘이 바로 empower이다(한국어로는 적당한 어감의 단어가 없어서 아쉽다). 그렇구나. 여성주의의 희망의 원천은 empower에서 출발하는 것이구나. 어렴풋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페미니즘의 도전은 아주 가끔 서점을 들를 때 떠오르는 ‘구매 희망 도서 리스트’ 중 하나였지만, 읽는 것도 종종 까먹곤 했다. 그러다 여성학 세미나를 통해 페미니즘의 도전을 한번 읽을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여성주의를 접한 사람들의 언어에 주눅든 나는 매 시간이 부담스럽게 다가왔고 책 역시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성주의자들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수 있는 게 ‘여성주의자들이 갖게 되는 언어’ 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어려움인데, 나 역시 개인적으로 그것이 상처가 되는 바람에 한때 ‘여성주의에 질렸었다’ 라고 토로한 적이 있을 정도로 사실 여성주의자의 언어는 기존의 것과 다르다. 저자가 밝혔다시피 저자는 강연을 할 때 전업주부, 폭력 피해 여성, 저학력 생산직 기혼 여성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 계층의 경우 강의에 ‘열광’ 하는데, 박사 학위를 소지한 50대 남성 혹은 전문직 종사자, 이른바 ‘여론 주도층 인사들’ 의 경우 굉장한 충격을 받고 뇌가 고문당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여성주의가 사유하는 방향, 언어가 현학적이거나 특수한 암호같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언어가 남성 언어에서 출발하고 사람들은 이에 너무나 익숙해서 그것이 남성 언어인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는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라고 답하였다.

페미니즘의 도전에 관한 서평으로 출발하는 글 제목이 ‘Dos Mundos’ 인데, 처음 보는 사람은 황당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 친숙한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니며 (주도권의 기준이지만)보편적인 언어가 된 영어는 더더욱 아니다. Dos Mundos는 ‘두 세계’ 라는 의미의 스페인어이다. 스페인어가 미국의 경우 필수로 배워야 하는 유력한 제1외국어이지만, 한국에서 스페인어가 갖는 영향은 지금까지 확대된 것조차 미약한 정도이다. 내가 스페인어를 배울 때 쓰인 교재의 이름이 바로 Dos Mundos였는데, 두 세계라는 의미가 갖는 상징성과 한국에서 스페인어의 위치가 아직 ‘소수’라는 점에 착안했을 때 주도적인 남성 계층이 아닌 그 이외의 사회적 ‘소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제목이다. Dos Mundos 책 제목은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 제목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저도 여성이지만 간혹 여성주의자들이 굳이 저렇게 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에서 내가 여성주의자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여성주의자에게 갖는 공포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학생들은 농도가 짙은 성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들끼리 웃으며 ‘이러다 여성주의자들한테 걸리면..’ 이라며 불쾌함이 섞인 공포심을 드러냈었다. 또 어떤 집단에서는, 여성주의자라고 밝혔을 때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수강했던 여성학 과목에서 어떤 여학생은, ‘솔직히, 저도 여성이지만..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왜 굳이 저렇게까지 행동해야 하나, 나도 너무 부담스럽다’ 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었다.

(페미니스트, 여성주의자, 두 단어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페미니스트의 번역이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는 남성들이 말하는 - 남성은 기댈 수 있는 집단이 위협받으면 이를 ‘우월’ 로 환원하는 듯하다 - 여성우월적인 사고가 아니라, ‘남성이 아닌’ 위치를 반영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왜 불편함을 느끼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지지를 보낸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여성주의 혈기가 왕성(?)했던 초기 시절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여학생들을 접했을 때 나는 이들이 너무 한심했고 화가 났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너도 여자 아니니?’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야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물론 그때는 감정적으로만 느낄 뿐 직접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서 그 고민은 정말 ‘괴로울 고’ 고민이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니 그 당시의 내가 떠올랐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들은 알고 있다.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그래서 여성들은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나는 비로소 다시 고민할 수 있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그 여학생의 발언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 그 학생도 참 살기 힘들었겠다. 지난한 시기를 보내 왔겠구나. ‘나쁜 여자’ , 혹은 ‘나쁜 여자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기가 익숙하게 여겼던 사고, 그리고 자신이 지닌 여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진리와 미래를 고민하는 학생, 이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를 두고 내가 여성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여학생을 ‘너그럽게’ 생각했다거나, 계몽적으로 이끌려고 한다는 앞선 생각을 할 이유는 없다. 여성주의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권력을 다시 구성하고, 새롭게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접하는 창구가 되는 것이지, 가르치려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여성주의에 관한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네 인생, 아름다워질수만 있다면!

나는 두 세계의 연결과 공존을 위해(두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개인마다 스펙트럼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Dos Mundos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여성주의는 결코 어떤 것을 이것 아니면 저것, 즉 두 개념의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 당연히 이분법적인 사유와 거리가 멀다.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럼 남성주의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묻지만, 일반 남성으로 대표되는 지위가 아닌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한번이라도 고민을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 그리고 진정 ‘사람’ 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에서 동성애 커플이 주연급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방송된다는 것은 분명 획기적인 사건인데, 이에 너무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이 드라마를 보고 아들이 게이되어 에이즈로 죽으면 책임지라는 황당한 논리의 광고가 등장했고, 최근에는 특정 종교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반응을 보여 결국 방송을 타지 못했다. 종교계에서 갖게 되는 불만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세상을 접하는 통로가 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이 방송과 종교가 갖는 공통점이다. 그렇기에 방송과 종교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진정 사람됨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면, 이렇게 황당한 광고와 입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에 여성주의가 갖는 역할은 무엇인가?

우선 보편적이고 바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보편적임은 사실 영원불변하지는 않으며, 개인의 생각하기 나름일 수 있는 가치관의 하나인데 무엇을 기준으로 보편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동성애로 대표되는 성 소수자의 정체성에 관하여 이를 ‘옹호’ 혹은 ‘반대’ 라는 논쟁 자체도 이성애중심적인 사고의 권력이 함부로 칼을 휘두른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권력이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가. 오랜 역사를 두고 배제되고 차별받아온 여성들이 남성이 아니기에 받는 차별에 항의하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은 매우 지난했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처럼 동성애라는 성 정체성 역시 그렇지 않은 성 정체성이 부여한 차별에 희생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라면 이 광고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 이렇게 말한다면 여성주의를 보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성주의를 두고 매우 거창한 그 무엇으로 보았던 걸까. 나는 앞서 ‘보편적임’ 의 현상을 영원불변하지 않은 성질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보편적임의 성질을 새롭게 깨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의미한다. 이를 표현해주는 ‘다른 목소리’ 이 목소리가 세상에 널리 전파된다면, 세상은 더욱 살기 괜찮아지지 않을까?

어느 드라마에서 나오는 동성 커플의 경우, 흔히 말하는 정신이상자도 아니고, 세상을 착실히 살지 않은 사람도 아니며, 죄인도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솔직한 대가로 부정적인 시선과 배제를 겪으면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 드라마가 갖는 의의는 주연급으로 나온다는 것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비교적 잘 그려냈다는 것이다. 이는 동성애를 미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망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행복해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예로써 비교적 접하기 쉬운 드라마의 동성애를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고 싶어도 ‘평범함’ 이 가질 수 없는 가치로 되어버린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가 바로 이곳에 있다. 하나씩 열거하지 않아도 이들의 진실한 욕망이 간절하게 있음을 꼭 전하고 싶다. 하나씩 깨우쳐지는 사고의 매력이 여성주의이다.

비둘기 가족, 그리고 가족의 재구성

여기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이다. 사람들은 길을 오가면서 수많은 홍보물을 접하게 되는데, 가족에 관한 경우는 언제나 비슷한 패턴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부부와 두 아이. 두 아이는 한 쪽은 꼭 아들, 다른 한 쪽은 딸이다. 즉 남자 둘, 여자 둘. 부부 입장에서는 ‘모자랄 것도 없는’ 아들과 딸 하나씩. 나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주변의 아들만 있는, 혹은 딸만 있는 지인들, 그리고 미래를 계획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성 소수자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럼 이들은 정상이 아니라는거야?’ 라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은 워낙 자식 하나도 제대로 키우기 어려운 실정이라 자녀를 낳지 않거나, 결혼해도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라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면서 정부 입장에서도 저출산에 고령화라는 사회적 현상에 애가 탔는지 몇몇의 광고를 내놓고 있지만 오히려 부부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는 과연 현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몇몇 병원의 경우 여성에게 전문의가 될 때까지 결혼, 임신은 절대 안 된다는 서약을 받는다고 하는데 현실에는 이렇게 유리 천장이 있음에도 ‘지금은 능력 있으면 누구나 성공하는 시대’ 라는 주장과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슬로건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주는 폐해로써 이성 커플이 아닌 경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여전히 동성 커플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주장에 ‘나 꽤 진보적이야’ 라는 사고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동성애에 관한 견해를 말하는 입장들. 광고주는 그 해맑은 가족의 미소가 누군가에게 좌절의 슬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저자는 가족에 대해 자기 나름의 명쾌한 해석을 싣는다. (배경은 인권운동가 한채윤씨의 지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늑대와 여우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늑대와 여우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토끼라고 부른다. 한술 더 떠서 늑대, 여우, 토끼가 함께 살면 ‘비둘기 가족’ 이다!>

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유쾌함과 참신함이다. 특히 내가 참신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동안 공고하게 지켜 온 언어 구조와 사회 구조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비둘기 가족에 관한 저자의 해석을 보고 정말 놀랍고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문득 ‘인종 청소’ 와 같은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非 일반 남성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분류하면서, 이렇게 늑대와 여우와 토끼와 비둘기로 분해해 놓은 가족에 사람들은 쉽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을 꾸리지 못하거나 만들지 못하면 비정상적일까 스스로를 다그친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La coexistencia!

Dos Mundos에 이은, 당황스럽게 하는 저 위의 단어로써 나의 생각을 요약하고 싶다. 영어와 비슷한 coexistencia는 바로 ‘공존’ 이다. Dos Mundos라는 두 세계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공존이 아닐까? 현실에 대한 고민과 행복해지고 싶은 본연의 욕구가 나를 여성주의라는 세계로 이끌었고, 여성주의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한 노력을 하기에 이 책은 혼자서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면 부담스럽지 않고 새로운 문제제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나는 ‘여성주의 입문서로 이 책을 읽어 보세요’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읽어 보라고 전해 주고 싶다. 나에게 다가 온 새로운 현실 인식의 즐거움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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