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

새내기부문 예선통과작

《침이 고인다》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

김애란, 『침이 고인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이승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소리는 아직 노래가 아니오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소
귀뚜루루루 귀뚜루루루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하나 울릴 수 있을까
누구의 가슴위로 실려갈수 있을까

- 귀뚜라미, 나희덕 시, 안치환 곡

처음 '귀뚜라미'를 들었을 때 나는 내 머리를 뎅뎅 울리는 힘을 느꼈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그의 노래를 듣다가 벅차오름을 견디지 못하고 하, 하는 가쁜 숨을 내쉬었더랬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지만 풀잎 없고 이슬 한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귀뚜르르르 우는 귀뚜라미 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며 우짖는 귀뚜라미를 생각하며 나는 시장통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아주머니와 새벽 첫차로 일을 나가는 아저씨, 그리고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을 떠올렸더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침이 고인다』를 읽었을 때 나는 '귀뚜라미'를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뎅뎅거림을 느꼈었던 것 같다.

몇 해 전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작은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던 나는 종종 ‘서울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불효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한없이 높아만 가는 등록금, 매 학기 꼬박꼬박 몇 십 만원씩 드는 비싼 책값, 내 한 몸 누우면 그걸로 끝인 조그마한 고시원에 매달 꼬박꼬박 들어가던 이십 만원의 방값. 나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은 불효야!’라는 생각에 나는 헉헉대며 열심히 일을 했지만, 높은 학비와 높은 방 값에 비하면 나의 시급은 턱없이 모자랐고, 연일 계속 되는 아르바이트 와중에 나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는 내 모습 역시 불효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학비와 방세는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이다. 그리고 한국은, 서울은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많은 돈을 요구했다. 나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꼬박꼬박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나의 땀으로 얻어낸 노동의 대가들은 모두 나의 존재비용에 불과했다.

하루는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그저 살아있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던 걸까. 앞으로 이렇게 살아지는 게 나의 삶이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 한참동안 빤히 나를 쳐다보던 친구는 이내 “애란 누나 책을 읽어봐”라는 말을 했고, 그렇게 나는 김애란의 글과 만나게 되었다.

김애란의 글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나약한 존재들이다. 공무원 준비를 하러 서울에 상경한 언니에게 밥을 사주고 있는 백수 동생, 가난해서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못하는 연인들, 돈이 없어서 악착같이 공부를 하는 재수생, 개미굴 같은 고시원에서 숨죽여 살아가는 고시생, 회사의 말단 사원, 김애란의 글 속 인물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김애란은 사회적인 약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그 사람들 속의 일부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은 언뜻 보기에는 박민규를 닮았다. 박민규 역시 왕따와, 몇 년 째 시험에서 떨어지고 있는 고시생과,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말단 사원과,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왕따가 외계인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멸망시킨다든가, 이주노동자들이 오리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부조리한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점을 표면으로 꺼내놓는 박민규와는 달리, 김애란은 불평등한 양성의 역할이라든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편견이라든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칼날을 던지지 않는다.

그녀의 글 속에서의 ‘나’는 힘든 삶에 대해 분노하며 무엇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인이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나’는 힘들어하고 또 가끔씩 좌절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며, 김애란은 언제나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으며 그네들 모두를 감싸 안는다. ‘힘들었지’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그녀의 시선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나는 이러한 ‘따뜻함’이 김애란 글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애란이 이렇게나 따뜻한 시선을 갖출 수 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아마도 그녀는 강자와 약자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다 똑같이 나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칼자국’의 ‘나’는 평생 동안 어머니에게 고생만 시킨, 한 번도 떳떳한 모습을 보여준 적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죽은 뒤 서러움에 엉엉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고, ‘침이 고인다’의 ‘나’는 갈 곳 없는 후배를 매몰차게 내쫓은 뒤 개운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껌을 씹는지도 모르겠다. 김애란 글 속 인물들은 모두 약하고,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없다.

김애란 글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생명력’이다.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것은 김애란의 글 속에서 나타나는 생명력은 힘든 삶을 해소한다는 의미에서의 생명력이 아니라, 그 힘든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꿋꿋하게 살아나간다는 의미에서의 생명력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내가 ‘귀뚜라미’를 처음 들었을 때의 뎅뎅거림을 김애란의 글에서 느꼈던 이유가 아닐까.

고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모두 제 나름대로 조그맣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와 같은 화려함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좁은 벽 틈에서도 그들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마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며 울음소리를 내는 귀뚜라미처럼 말이다. 한쪽 발을 잃은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함께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성탄특선’) 한 평생 손에서 칼을 놓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리셨던 어머니의 장례식 둘째 날, 나는 잠깐 집에 들렀다가 잠에 빠진다. 어머니의 꿈을 꾸고 땀에 흠뻑 젖이 잠에서 깬 나는 어머니가 쓰시던 칼을 잡고 사과를 깎는다. 서걱-. “아 맛있다!”(‘칼자국’) 반 지하에서 살고 있는 나는 비 오는 날, 집 안에 들어오는 물을 퍼내다가 문득 피아노 뚜껑을 열고 물에 잠긴 페달을 누르면서 피아노를 친다. 도- 레-.(‘도도한 생활’) 힘겨운 환경이지만 그네들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이 열심히, 꿋꿋이 살아간다.

그렇게 나약하지만 꿋꿋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리고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김애란의 시선을 보다보면 마음속이 편안해져 옴을 느낀다. 수많은 귀뚜르르르 귀뚜르르르 소리가 나를 끌어안는 듯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김애란의 글을 읽다보면 깔깔 웃음이 나오면서도 주르르 눈물이 난다.

사실 그녀의 글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엔 아무런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이, 왜 저들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상황에 처했는가에 대한 질문 없이 그저 힘들어하고 있는 나약한 존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높은 등록금과 방세, 그것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나의 시급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글은 애초부터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크나큰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저마다 서로 다른 전제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정치인들보다는, 날카롭게 현실을 분석하는 지식인들의 책보다는, 김애란의 글을 찾게 되고 그녀의 글에 더 위로를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녀의 글을 통해서 어찌되었거나 나는 힘을 낼 수 있었고, 어찌되었거나 나는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살아가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일을 한다. 나는 변함없이 존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등바등한다. 하지만 김애란의 글을 통해서 나는 이 것 역시 나의 ‘삶’이며 나의 ‘생명’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삶을, 나의 생명을, 그리고 나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높은 가지를 흔들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나는 여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김애란의 글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다. 고마워요. 애란 누나. 나도 당신에게 위안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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