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 프로그램의 작가도 ‘작가’인가?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오락 프로그램의 작가도 ‘작가’인가?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래현
신기하게도 시사풍자가 담긴 자막으로 논란을 몰고 다니면서도 장기간 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은, 종종 연출자가 독자(시청자)에게 전하려고 한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큰 논란이 되곤 한다. 얼마 전 방송 전후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세븐(7) 특집’만 보더라도, 얼핏 봐서는 ‘PD의 작가정신’ 운운할 만큼 심오한 요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7명의 친구들이 파티에 가기 위해 단서를 하나씩 모으면서 ‘한국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373-1번지’로 향한다. 막상 파티에 도착하자 수수께끼의 파티 주최자가 이 7명의 이기주의의 끝을 보겠다면서 새로운 게임을 제안하는데, 각 멤버마다 나머지 6명이 정해주는 금기어를 모르는 채 파티에 참여하되 금기를 어기는 사람은 퇴장당하는 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다. 결국 먹고 먹히는 싸움 끝에 최후의 1인이 남지만, 텅 빈 파티장에 혼자 남은 그는 무섭다며 자기도 데리고 나가 줄 것을 요청하면서 스스로 금기어를 말하며 자폭한다.
이 줄거리만 보면 시청자가 느낄 수 있는 재미란 서로가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마지막에 이기주의가 가져다 준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자폭하는 외톨이의 최후가 주는 여운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세븐 특집‘은 전혀 예상치 못할 방향에서 논란을 빚었는데, 파티장의 주소지인 373-1번지에서 7명의 멤버가 하나씩 죽어가는 이야기를 이르러 '747(373+373+1)공약 때문에 친노 인사 7명이 몰락하는' 것에 비유했다는 망상에 가까운 해석도 있는가 하면, 아신리가 팔당댐 수질 측정지점이기 때문에 4대강 사업을 풍자한 것이라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주장도 있었고, 아예 이런 해석들에 맞서 예능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일 뿐이니 정치색을 들이대지 말라고 난리치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의 논쟁처럼 만약 『무한도전』이 사회적인 주제의식만 얘기하거나, 그 반대로 일차원적인 웃음(개인 신상과 관련된 폭로나 여자 연예인 얘기만 한다면..)만을 노린다면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재미없을까? 전자의 경우, 정치 비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열심히 보겠지만 다른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잠깐 낄낄거리다가도 이내 잊혀질법한 말초적인 웃음을 이끌어낼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둘을 적당히 섞는 것, 이를테면 저질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사회 비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다를 떨 땐 가능할지 모르나, 일관성을 가져야 할 방송 프로그램의 기획에서는 당치도 않을 일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그 중에서도 1, 2부의 논의를 문학과 작가라는 미(美)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를 읽고 생뚱맞게도 『무한도전』의 한 에피소드가 가져온 논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이 논쟁에서 건드리고 있는 문제가 비단 한 오락 프로그램의 재미만이 아니라,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나아가서는 작가의 창조적 언어로까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무한도전』의 연출자가 사회 풍자를 목적으로 이 방송을 기획했다는 주장은 작가(연출가)가 이 작품(?)을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주의적인 기대에 해당하며, 외재적 요소들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개그로서 봐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 작품을 작가의 주관적 산물로 보는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보편적 가치만을 늘어놓는 작품은 설교가 될 수 있을망정 문학으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하며, 반대로 일차원적이고 개인적인 정서만을 늘어놓는 작품 역시 소수의 공감 이상의 어떤 가치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양쪽 중 어느 하나만을 추구하는 문학 작품이란 문학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문학의 문제는 『무한도전』의 사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언뜻 들었을 때 뻔한 소리로만 들리는 사르트르의 ‘세계 내 존재’와 ‘공통 언어’라는 개념이 논쟁 해결의 열쇠로 등장한다. 기왕 예를 들었으니 다시 『무한도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면, 이 프로그램은 애초에 사회성과 주관적 재미 둘 중 어느 쪽에 속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시청자들과 연출자가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공통 언어‘를 기반으로 한 ’비-지식(문학적 상상력)‘의 놀이로 구성되었을 뿐이다.
상상을 좀 해 보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제작진의 사고과정은 이러했을 것이다. 멤버들 사이의 이기주의를 풍자해 보고 싶다. 이것을 가장 흥미진진하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서로서로 평소의 불만에 따라 죽고 죽이는 게임을 만들자. 서로에 대한 불만에 대해 공격하는 게임이라면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럼 자기도 모르는 습관을 나머지 멤버들이 금기어로 설정하도록 하면 서로에 대한 솔직한 불만이 드러나지 않을까? ‘세븐 특집’은 대충 이런 발상에서 나왔을 것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보여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방송에서 진행된 게임의 핵심 키워드인 '이기주의'와 '금기어'는 최근의 많은 사건들에서 시청자(감상자)와 제작자(작가) 모두가 몸으로 느꼈던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방송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이기적인 마음으론 서로가 서로를 죽일 뿐'이라는 주제의식도, 그리고 서로에게 금기어를 설정해서 그 말만 하면 바로 '잘린다'는 설정 자체도 지금은 MB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정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당장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MBC부터도 이미 정부로부터(구체적으로는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검열과 제재를 받은 후 파업에 들어갔던 경험을 시청자와 제작자 모두가 가지고 있다. 심지어 MBC 파업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언제든지 ’잘릴‘ 수도 있으며, 해서 될 행동과 안 될 행동이 있는 현실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죽는다’, ‘잘린다’, ‘금기어’, 이런 언어들이 주는 상상력과 느낌(나아가 재미)은, 아무리 우리가 외부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 '그냥' 보려고 해도 우리의 언어 체계 안에 이미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미있게도, 『무한도전』의 연출자가 정치색을 얼마나 담았든지 간에 이 프로그램의 언어를 정치적인 의미와 100%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공통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 내 존재’로서의 작가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에 따르면, 작가가 사용하는 ‘공통 언어’란 기존에 화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언어이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언어이다. 화자들은 지식/정보가 담겨있지는 않지만 기존의 언어를 변주하고 이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공통 언어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데, 작가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창조의 방식이 곧 이러한 공통 언어의 물질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세계 내 존재’란, 작가란 필연적으로 세계의 한 부분이지만 동시에 그 세계는 결국 작가에 의해 체험된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만도, 주관적이지만도 않은 이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즉 『무한도전』에서 연출자(작가)는 한국 사회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개인이며, ‘죽는다’, ‘금기어’와 같이 그가 사용한 언어는 한국 사회의 화자들과 공유하던 기존의 의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공통 언어를 사용하고 확장하는 것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모든 구성원들이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문학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의 역할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특히 TV 오락 프로그램의 언어 사용이라고 해봐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유행 코드를 자극하는 것뿐이며, 이는 창조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븐 특집’의 사례는 본의 아니게 MB 정권의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통 언어의 의미 체계를 다시 한 번 창조적으로 뒤집는, 작가의 적극적인 언어 행위까지 보여준다. 이는 ‘죽인다’, ‘금기어’ 등의 언어를 기존의 의미에서 피부에 와 닿는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거나 검열하는 것이 ‘웃길’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로 금기어를 통해 탈락시키는 게임’을 통해 환기시킴으로써 단순히 죽이고 검열하는 현실적 의미 이상의 새롭고 풍부한 의미를 첨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통 언어에 균열을 내고 언어를 확장, 변형하면서 창조하는 작가의 ‘비-지식(혹은 정보 왜곡)’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몇몇 뛰어난 작가만이 ‘비-지식’의 언어와 보편적인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듯이, 이 또한 『무한도전』의 연출자가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락 프로그램의 연출자라면 누구나 시청자(독자)로부터 ‘재미’라는 여분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공통 언어가 가지는 의미의 틈새를 건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단지, 우리가 독자로서 혹은 시청자로서 느끼기에 어떤 작품이 더 창조적이거나 덜 창조적이라고 느낀다면, 이는 아마 그 작품의 작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언어/의미를 ‘갖고 놀 수’ 있는가에 불과하다. 좀 더 용감하게 비-지식적인 언어/의미의 틈새를 공격하고 그곳으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고민, 이 모든 것들이 2% 부족하거나 넘칠 때 우리는 그 작품의 언어로부터 좀 더 창조성을 느끼는 것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2부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다른 계급들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하는 ‘지식인의 기능’, 그리고 3부는 생뚱맞게도 ‘작가는 지식인인가?’하는 새로운 논의이다. 이 책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3부의 내용을 거의 부록 정도로 생각하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도 이 어려운 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할 때 중요한 내용만 짚고 넘어가자며 1, 2부만 읽고 넘어가곤 했다. 작가도 지식인이다, 라는 말은 그냥 ‘작가의 참된 기능은 인간의 가치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모든 기존의 질서체제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이라는 한 마디로 언급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굳이 작가가 보편화와 실용적 지식을 다루는 지식인과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공통 언어’와 언어의 물화(物化)라는 복잡한 개념까지 넣어가며 작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인가?
하지만 ‘지식인’의 의미를 재차 음미해보면, 3부의 문학론/작가론을 서술한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느낄 수 있다. 1부에서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규정할 때, 사르트르가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도덕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지식인이 자신의 실용적 지식으로부터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그가 자신의 의지와 신념으로 보편성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주의를 부정했을 때 과연 도덕, 역사나 과학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미(美)’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문학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유미주의적 관점과 문학의 보편성이 부딪칠 때, 도덕주의적 관점이라면 작가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1, 2부의 논의에서 문학 또는 예술이 보편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이 ‘미’나 ‘창조성’의 문제와 만났을 때, 예술의 형식이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내용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3부에서 사르트르는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그의 이론을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단순히 자신이 규정한 지식인의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작가’와 ‘예술’의 영역으로 상상력을 넓혔던 것처럼, 우리도 또 그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사르트르가 살던 시기의 ‘작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 않냐는 것이다. 당시의 문학 작가들은 당시의 사회 속에서 예술가로서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상징주의나 사실주의와 같은 사조 간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작가란 더 이상 순수하게 ‘미’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기 어려워졌으며, 창조성을 가졌는지조차도 의심받곤 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문학이라고 해봐야 ‘대중문학’이라는 장르로 겨우 분류될 수 있을 법한 인터넷 소설이나 인기 드라마/영화의 원작 소설 정도이며, 몇몇 해묵은 베스트셀러 작가들만 자신의 이름값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문학이 여러 가지 대중매체로 변형되어 이전보다 많이 보급되고 팔린다는 점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이러한 대량의 대중매체들을 ‘문학’적으로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대중의 언어를 지배하는 것은 어제 저녁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유행어와 같은 언어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대중매체의 ‘작가’들, 그러니까 오락 프로그램의 연출자나 제작자들을 문학 작품의 작가를 보듯이 바라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창조성과 보편성이, 작가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통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 내 존재’로서 ‘비-지식’의 언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임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한낱 『무한도전』의 연출가가 단지 한국의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 고민한 끝에 사회의 의미체계를 뒤흔드는 언어를 창조하기에 이르는 현실도 썩 불쾌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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