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야옹이입니다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나는야 야옹이입니다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야옹이


1. 길을 지나가는 고양이에 대한 짧은 생각

언제부터인가 내가 사는 집 근처에는 엄마 고양이 하나,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그 작고 토실한 발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 11시 내가 산의 중턱에 있는 조그맣고 어두운 방을 향해 굽이 8센티가 넘는 검은 하이힐을 신고 경사가 40도에 이르는 아스팔트 길을 또각또각 위태로이 걸어갈 때마다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파란 현관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다. 머리 크기는 내가 주먹을 쥐었을 때 만들어지는 그 정도, 몸집은 내 방 안에 있는 토끼 인형보다도 작은 딱 그 정도, 그러나 나를 향해 바라보는 크고 동그란 갈색 눈은 나의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문을 여는 사이 고양이가 슬그머니 나의 안식처로 들어가 버리면 어떡하지, 그리고 내가 놀라서 나가라고 하면 그 고양이가 나에게 기분이 상해 울먹거리며 야옹거릴까봐 망설였다. 애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에서의 그 시크한 녀석처럼 또는 언제선가 보았던 동화책에서처럼 생선 한 토막을 훔치거나 또는 심술을 부리며 불쌍한 생쥐 한 마리를 잡아다가 현관에 놓을까 두려웠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 복슬복슬한 털에 반해서 손을 내밀면 그 고양이가 나의 조그만 자랑인 유난히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을 할퀴어 버릴까봐 나는 무서웠다. 나를 신기한 듯 동글동글 바라보던 고양이는 내가 사라지고 난 다음 다시 울기 시작한다. 이웃집 신혼 부부의 갓난 아기가 우는 것처럼 야옹야옹, 친구들과 다함께 야옹야옹, 그리고 그네들의 소리에 애써 신경을 돌리고자 이불 안에서 내가 뒤척일 때면 자기를 잊지 말라고 야옹야옹거린다.

2.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사실 고양이라는 그 작은 생명체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그대이다.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현관에서 마냥 기다리면서 훌쩍거리지도 않고, 그래서 내가 고양이 한 마리 집에 혼자 외로이 있다고 발을 동동거리며 신경 쓰지 않아도 그녀/그에게 자그만 털뭉치 하나만 던져주면 그것만으로도 뒹구르르 혼자서도 잘 논다. 기를 때 조금만 훈련시키면 대소변도 혼자 잘 가리고 멍청하지도 않아서 좋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는 이러한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나는 P로부터 음악 CD를 받았을 때부터를 기억한다. 그가 나에게 담아준 노래의 7번째 트랙이었을까. W의 ‘만화가의 사려 싶은 고양이’라는 노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스탠드의 불빛 아래에서 벽돌만한 책의 얇은 종이를 어떻게는 넘겨보려고 애를 쓰는 나에게 토끼 인형를 꼬옥 안고 눈을 지그시 감고 단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맘 때쯤 너는 항상 조금씩 말이 없어지네. 날 위한 생선 한 조각도 너는 잊어버린 걸까 밤새 펜촉 긁는 소리 좁은 방 온통 어지러운 스크린 톤 차마 눈치 없이 너를 조를 수 없었네.’ 그러면 나는 나의 불쌍한 토끼 인형에게도 무언가를 주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안한 마음에 나의 볼을 그의 얼굴에 문지르며 나의 모든 사랑과 정열을 토끼에게 바치곤 하였다.

송찬호의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도 이와 유사하다. 저녁이 되면 시적 화자는 자신의 곁에서 맴도는 고양이를 위하여 무언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찬장을 뒤지기 시작한다. 시적 화자가 직접 기르던 고양이인지 아니면 길 근처를 외로이 배회하다가 우연히 주인공이 딱한 마음에 우유를 주었더니 그 이후로부터는 채권자인 양 거만하게 그에게 저녁마다 오는 아이인지, 또는 자신의 갈색 털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쓰다듬던 시인의 손길이 그리워서 무작정 다가오는 야옹이인지는 모른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시인은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하루종일 사람들과 멈춰버린 차 사이를 아슬아슬 뛰어다니다가 절로 허기진 배를 느끼면서도 이를 알리기는 싫었는지 ‘입 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내 옆으로 온다. 어디선가 보암직한 드라마의 한 장면의 엔딩처럼 커다란 달 아래에 두 연인이 다정하게 앉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그대의 사랑을, 그대의 애정 어린 눈빛을, 부드러운 손길을, 나에게로. 오로지 내게 주세요’. 고양이는 단지 시인의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아기 고양이인지라 그가 내미는 손에 처음에는 움찔거리다가 이를 조용히 핥기 시작한다. 그녀는 사람의 짧고 두터운 혀보다 말랑말랑한 분홍색 혀를 가지고 촉촉하게 그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자. 너는 나에게 사랑을 주었으니 나는 너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까…’ 그는 이에 대한 답례를 하지 않으면 그녀가 영원히 그를 떠날까봐 두려워졌다. 가난한 시인은 야옹이의 사랑을 얻고자 자신의 찬장 안에 있는 맑고 둥근 접시를 꺼낸다.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른 커다란 보름달처럼 그것 뿐이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김현승의 시 ‘눈물’ 중에서) 나는 ‘희고 둥근 것’을 야옹이에게 준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나의 손을 애무하던 것을 멈춘다. 당황한 내가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고 있다.

송찬호의 또 다른 시 ‘고양이’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이 장난스럽게 나타나 있다. 천진난만하게 고개만 갸웃거리는 고양이에게 그는 화도 내지 못하고 싱긋 웃어버릴 뿐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몰래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를 한 입에 아웅 삼킨 후 자기는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는 것만 같다. 이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지금도 일어나는 현실이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나 영원한 새끼 야옹이다. 나는 엄마가 내게 간식으로 주고자 따로 보관해둔 초콜렛을 먹고 난 다음에는 엄마한테 항상 ‘집 안에 커다란 쥐가 있는데요. 그 쥐가 날름 먹었어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에구구. 우리 꼬맹이가 먹어야 할 초콜렛을 어떤 쥐가 다 먹어버렸노! 엄마 야옹이가 그 생쥐를 잡아야 되겠다.’

3. 고양이와 코끼리, 기린이 뛰어놀던 동화 속 이야기

송찬호의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우리가 어렸을 때 꿈꾸었던 상상들, 그러나 지금은 찾기 힘든 동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한때는 넓고 푸른 아프리카 초원을 코끼리와 함께 유유히 걸어다니던 기린은 동물원에서 머리에 고깔 모자를 쓰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시인은 그를 ‘최후의 詩의 족장’이라 부르며 그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기린의 목을 타고 올라가면 별을 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처럼 그 세계로 돌아가기에는 늦었다는 비애에 사로잡힌다. (시 ‘기린’) 코끼리는 오래전 사냥꾼에게 그림자를 빼앗긴 채 삼만 년 째 거대한 석상이 되어 버렸고 시인은 조그마한 면사무소 책상에 앉아 그들에 대한 재미없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시 ‘코끼리’, ‘기록’) 그러나 그가 만년필로 서걱거리며 종이 위에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무언가를 따라서 옮기고 있다 보면 어느덧 푸른 악어는 기어 나와 과거 자신과 함께 어울렸던 코끼리라는 녀석이 어떠했는지 ‘쉬잇’ 소리와 함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집에는 유난히 동물과 꽃을 대상으로 한 시가 많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출연하는 주연배우는 고양이다. 고양이는 자신의 길고 가느다란 수염이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듯이 고개를 도리도리 움직이며 이를 자랑한다. 마치 나이 지긋한 도도한 선비가 자신의 수염을 가꾸는 것을 어떤 그림에서 보고 ‘에헴’ 따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 녀석은 자신의 수염으로 시의 멋드러진 주석까지 달고 있다. (시 ‘채송화’) 그리고 ‘이봐요. 여기서는 내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알고 싶다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해요.’라는 재촉과 함께 그 특유의 철학 시간까지 열고 있다. 그의 강의는 이러하다. 시인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방 안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고양이는 단지 귀를 쫑긋거리며 동그란 눈동자만을 깜빡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웅크려서 조그맣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선생인 고양이의 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수강생들은 제법 많은 편이라서 코끼리, 염소, 기린, 산토끼, 그리고 떠돌이 나비까지 모두 소인국 나라에 와 있다. 이 때 나비는 단지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돌아다니며 청강을 할 뿐이기에 고양이의 강의를 듣다가 악어와 산비둘기의 이야기를 들으러 휙 가버리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시 ‘나비’) 코스모스가 좋아서 보랏빛 꽃잎 위에 사뿐히 앉았다가도 시절이 맞지 않는 백일홍이 피면 그리로 가면 그뿐이다.

시인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시집을 꽃 피는 시집으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나비에게 오래 머물다 가진 마시라고 해야겠다며 책의 첫 장을 펴는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공간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기에 이미 꽃은 시들어버렸다. 코끼리와 기린은 도시의 동물원에서 열심히 달려야만 하고 고양이는 네 발 달린 동물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신기하다고 폴짝폴짝 뛰어놀고 있다. 잘하면 동물들이 살고 있는 우리 주변에 패랭이 꽃 하나는 필지 모르겠다. 즉 과거에 시인들이 노래하던 낭만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네의 시 ‘Altes kaminstuck(벽난롯가의 옛이야기)’처럼 난로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시인의 꿈에서는 자신이 그동안 노래한 아름다운 환상이 스쳐지나간다. 이러한 시인의 부주의로 끓는 주전자 물을 뒤집어쓴 고양이가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이를 두려워한 송찬호 시인은 그의 시 ‘겨울의 여왕’에서 겨울의 여왕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작 그녀가 와도 그녀의 백설 구두가 녹아버릴까봐 난로 곁으로 같이 앉을 것을 청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겨울이 깊었습니다. 사랑해요, 겨울의 여왕님!’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우리가 꿈꾸던 환상은 현실에도 계속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다. 시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에서의 백일홍은 다름 아닌 전기가 들어옴으로 인해 반짝이는 불빛이다. 고양이가 뛰어놀던 소인국의 영토는 아스팔트로 바뀌었어도 그녀는 아직까지도 사람들 주변에서 그 보드라운 털을 자랑하며 자기와 닮은 털뭉치를, 하다못해 토끼 인형을 껴안고 담요 안에서 냐아앙 긴 하품을 하고 있다. 암술과 수술이 있는 빨간 꽃이 아니더라도 17인치 모니터의 배경화면에 있는 보라색 꽃은 꽤 그럴 듯하다. 즉 고양이와 코끼리, 기린이 뛰어 놀던 동화 속 이야기는 지금 현재에도 계속 되고 있다. 시인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직까지는 백일홍의 붉은 꽃이 피어난다고 말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간절한 울음이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동물원에서 전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고양이가 너무나도 흔하게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길냥이, 조금 귀엽게는 야옹이라 부른다. 그나마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마시던 우유를 야옹이랑 나누어 마신 후 엄마를 조른다. ‘조그만 암코양이 한 마리 집에서 키우면 안 될까요?’ 그러면 그녀는 말한다. ‘안 돼. 그럼 이 동네 고양이 모두가 우리 집 앞에서 살게 될 거니까.’

4. 끼토산 야끼토 로디어 냐느가 총깡총깡 서어뛰 로디어 냐느가

‘산토끼가/똥을/누고 간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시 ‘산토끼 똥’)

내 방 안에는 책상 하나, 책장 하나, 토끼 인형 한 마리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더 이상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아니하고 어머니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어린 내 키보다도 훨씬 큰 파란 곰인형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엄마는 곰돌이가 나랑 노는 게 피곤하다며 잠시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하였고 나는 울었다.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커다란 갈색 곰 한 마리가 나에게로 왔고 그 아이도 2년 후 자긴 너무나도 외롭다며 다시 고향인 중국으로 가버렸다. 새로 온 곰인형은 나보다 더 조그만한 녀석이었다. 이번에는 그 아이가 나를 미워할까봐 내가 먼저 안녕을 고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갈색 토끼 인형 한 마리가 내 옆에 있다. 사람들은 곰인형을 만들던 사람이 심심해서 긴 귀 두 개를 붙여서 토끼를 만들었음이 분명하다고 그를 놀린다.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방 안에서 토끼에게 불러주고 있다.

‘끼토산 야끼토 로디어 냐느가 총깡총깡 서어뛰 로디어 냐느가’

아. 잘못했다. 이 아이는 산토끼가 아니라 집토끼지. 그러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집토끼이든 산토끼이든 커다란 귀를 가진 토실토실한 갈색 토끼이니까. 깊은 산골을 헤매는 대신 내 분홍 이불 아래에 웅크린 상태에서 야옹이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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