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데의 역설적 시간에 아이러니한 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일반부문 예선통과작

엘리아데의 역설적 시간에 아이러니한 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이덕준


들어가며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지은 한 권의 책에서 자신의 모든 관심사를 표명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모든 사상을 나열할 까닭도 없다. 그러한 이유로 어느 저자가 지은 어떤 책을 읽는 독자가 주제넘게 그 저자의 한 권의 책을 읽고 ‘너 이런 얘기하는 녀석이지’라며 단정을 내리는 것은 규칙위반이거나 예의범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가 어떤 서평을 써야하는데, 그 서평이 어떤 저자가 지은 어떤 책을 한 권 읽고 써야 하는 어떤 글이라면 독자 쪽에서도 어느 수준의 권리와 재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책을 한 권 읽고 그 책 이전의 저자의 삶을 유추해보고, 그 책 이후의 저자의 저작들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가 읽은 그 책 자체를 하나의 완결물이라고 오도하면서 읽겠다는 선언을 독자 스스로 할 수도 있다. 이 글은 독서감상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논문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무척이나 감사하다. 그렇다 이 글은 독서감상문이다. 그저 느낌을 적는 글이다. 학술적인 글이 아니다. 휴...

진짜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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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자신의 글을 거룩한 공간과 무엇, 거룩한 시간과 무엇, 자연의 거룩함과 무엇, 인간의 실존과 무엇 이라는 순서로 썼다. 『성(聖)과 속(俗)』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자리 잡은 네 개의 소제목들은 세 번째 소제목을 제외한다면, (거룩한)공간-(거룩한)시간-인간의 실존이라는 의미연관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 분석틀은 근대의 인간을 혹은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근대이후의 많은 서구 사상가들이 사용한 틀과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공간과 시간의 문제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하는 가운데 다각도로 비추어지고 있고, 베르그송의 경우에는 과거에도 있어왔고 근대이후에 심화된 시간의 공간화 문제를 지각과 기억이라는 문제의식아래 서술했다. 종교현상학자라고 불리는 엘리아데에게, 비슷한 시기에 생존한 다른 사상가들과 인간을 파악하기 위한 분석틀이 유사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현상학이란 말 그대로 개인의 감정과 지식을 에포케 하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자도 사상가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내 지식 범위를 벗어난다. 종교현상학은 종교형태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는 니니안 스마트의 말(『종교와 세계관』)과 『성과 속』의 마지막 부분에서 엘리아데가 직접 ‘종교사가의 고찰은 여기서 끝난다. 나머지는 철학자나...’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볼 때도 엘리아데는 그저 실제로 존재하는(존재했던) 수다한 종교현상에 대해서 분류/서술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에게 인간이란 현상을 분석해 내기 위한 틀을 가지고 있는 사상가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과 속』이라는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종교현상들에 대해서 단순한 서술자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종교현상들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그가 단순한 관찰/서술자가 아니라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인간에 대한 문제틀을 공유하고 있는 사상가라고 가정하고 이 글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상가로서의 엘리아데가 다른 근/현대 사상가들과는 다른 시간/공간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는 것을 이 글의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공간-시간-실존이라는 분석틀에서 벗어나는 세 번째 챕터가 지니고 있는 애매성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세 번째 챕터가 가지고 있는 애매함은 엘리아데가 시/공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매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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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챕터는 인간(인간의 실존)을 분석하기 위해서 근현대사상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공간-시간-실존’이라는 굵직한 분석틀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세 번째 챕터의 내용들은 다른 세 개 챕터 내용의 부연(이 글을 유기적인 연관물로 여긴다면)이거나 사족(챕터 자체의 독특한 위상 없이 책 부피를 두껍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아니면 마치 충실한 글인체 하기 위해 이것저것 예들을 잔뜩 늘어놓은)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아데의 경우에는 부연이나 사족이 아닌 까닭에 이야기가 보다 까다로워지거나 혹은 더 풍성해 지는데 그것은 종교사가로서, 혹은 종교현상학자(종교사상가)로서의 엘리아데의 독특한 정체성을 이 세 번째 챕터가 드러내어 주기 때문이다. 엘리아데가 자신의 글인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주기성과 순환성을 강조하며 영원회귀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 글에서는 영원회귀의 관념을 어떻게 역설과 아이러니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의식을 뭉뚱그려 사용하고 있는지를 더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흔적의 중심에 『성과 속』세 번째 챕터를 놓고자 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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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의 서구 사상사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 문제를 거론하며 집중되는 테마는 인간의 자유와 충만성이라는 두 단어로 집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의 공/시간이든, 인간의 공/시간이든 간에 역사성(통시성)이라는 단어이다. 헤겔의 역사성은 절대지에 이를 때까지 이성의 간지를 통해 계속되는 변증법적 운동이고 하이데거에게 있어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잡아낼 수 있는 실질적인 지표가 된다. 그리고 베르그송역시 삶이 순수지속이라는 통시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트 역시 개인의 역사성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끊임없이 개인의 과거를 참조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거나 안 하거나 상관없는 그것의 효과로서만 유효한 사후적 재구성의 방식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여느 서구 근대 사상가들과 달리 엘리아데는 공간과 시간을 역사성(통시성)에 주목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미묘한 방식으로 결합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도에서 수학했고, 인도 사상에 정통한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이 두 개의 시간구분 관념에 짙게 영향 받은 서구 사상가들이 역사성(통시성)을 자신의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엘리아데는 고대인을 연구하며 그들은 역사(성)를 거부했다고 이야기 한다. 크로노스/카이로스적 시간관념의 영향으로 근대 이후의 서구 문학/사상에는 에피파니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과 속』에는 에피파니라는 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서 주로 등장하는 단어는 에피파니가 아니라 테오파니이다. 그리고 그 테오파니 경험은 종교적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그 테오파니를 중심으로 종교적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에피파니와 테오파니의 구별은 중요한데, 에피파니가 공/시간의 아이러니한 측면을 보여준다면, 테오파니는 공/시간의 역설적인 측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가 과거의 것이 지금 현재에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고 한다면, 역설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전환되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다시 말해 아이러니가 과거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역설은 과거의 것이 참조되지 않은 채 존재에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러니에서 과거의 A와 미래의 A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면, 역설에서는 과거의 A와 미래의 A 사이에는 아무런 시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의 한 부분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참조하면, 이 시구가 역설적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재=기름이라고 감상해야 되지만 아이러니적 표현이 되려면 재가 되고 난 다음에야 기름이 된다고 감상하면 된다.

에피파니가 아니라 테오파니적인 공/시간의 관념을 지향하는 종교적 인간(고대인)의 주거는 언제나 성화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p47) 종교적 인간은 제의적으로 자신들의 거주지를 코스모스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그 거주지는 신들의 우주창조를 모방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해 코스모스로서 건설된다.(p51) 그리고 시간의 측면에서도 종교적 인간은 새해가 될 때마다 축제와 같은 방법으로 우주창조의 근원적 시간으로 복귀함으로써 다시 한 번 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p73) 엘리아데에게 있어서 공간과 시간은 둘 다 우주창조를 중심으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된다.

크로노스/카이로스적 시간의식에는 언제나 죄의식이 따라다닌다. 직선적 시간의식이 죄의식을 씻을 기회(카이로스)를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 과는 달리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서는 죄의식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종교적인간이 근원적인 시간/공간을 경험하는 테오파니를 중심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혹은 죄가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죄는 주기적으로 갱신 가능한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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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에 대해서 우주창조를 중심으로 역설적인 공/시간을 정초하는 엘리아데의 경우 1,2장의 종교적 인간에게는 죄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가 없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적인, 즉 존재자체를 전화시켜주는 시간과 공간의 지점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성과 속』에서 애매성을 띠고 있는 세 번째 챕터에서는 공/시간의 아이러니한 관념이 드러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시간의식, 즉 아이러니와 역설이 교차하는 공/시간 의식이 엘리아데(혹은 엘리아데가 그리고 있는 종교적 인간)의 독특한 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와 역설이 교차하는 공/시간 의식이 영원회귀라고 이 글은 가정한다.

엘리아데에게 있어서 ‘종교적 인간이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기를 추구’(p39)하는 이유는 세계의 중심이 ‘전통 사회의 인간은 오로지 위를 향하여 열려진 공간, 지평의 돌파가 상징적으로 보증되고 다른 세계, 즉 초월적 세계와의 교섭이 제의적으로 가능해지는 공간’(p39)이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왜 종교적 인간이 ‘근원적 시간으로 복귀’(p73)해야 하는가 혹은 왜 ‘종교적인 인간은 거룩하고 파괴될 수 없는 시간 속에 주기적으로 침잘할 필요를 느끼’(p79)는가라고 물었을 때, ‘탁월하게 실재적인 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p85)에 다른 식으로 말하면 ‘모든 창조는 신의 작업이요, ... 모든 창조는 넘쳐흐름에서 솟아난다... 창조는 존재론적 실체의 잉여에 의해 성취되’(p87)기 때문이라고 그는 대답한다.

우주창조가 창조된 중심점을 준거점으로 해서 ‘네 개의 지평으로 투사함으로써’(p47) 그 공간을 코스모스로 만드는 것과 새해마다 우주창조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새로운 해가 올 때마다 그것의 원초적인 신성성’(p67)을 회복하는 것은 거룩한 것(존재론적 실체)이 지니고 있는 ‘잉여’적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주창조를 공간과 시간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통해서 세계는 계속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내부(인간세계)와 외부(신의 세계) 사이에 그 사이를 왕래할 수 있는 역설적인 공간(세계 축)과 시간(새해)를 설정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종교적 인간이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한 지역에 정주하는 것이 우주창조를 되풀이’(p41)것이라는 공간적 태도와 ‘순환적이고 가역적이며 회복가능한 시간’(p62)이라는 시간적 태도는 안/밖의 지평을 관통하는 중심적이고 역설적인 힘의 근원지를 상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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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충만 혹은 힘의 잉여로서 지칭되는 역설적 지점(세계의 중심/새해)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엘리아데의 공간/시간에 대한 그의 존재론은 세 번째 챕터에 이르러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1,2장에서 엘리아데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존재론을 이야기 했다면, 3장에서 그는 인간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론에서 인간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역설적 태도가 존재하는 가운데 아이러니적 태도를 살짝 눈치 못 채게 삽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통해 4장의 인간실존에 대한 이야기는 3장을 통과해서 『성과 속』에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머리로 사유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종교현상학 혹은 종교형태론을 주창하는 종교현상(사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3장에서 그는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눈을 돌려 주변에 있는 대상들(자연)과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대지, 하늘, 물(물과 연관된 세례), 분만, 나무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과 현상들이 지니고 있는 상징들에 대해서 추적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챕터가 쓰여 지는 방식은 1,2장에서 종교적인 인간들이 보여주고 있는 우주창조의 모방의 방식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소급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르다. 1,2장에서 이야기된 우주창조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내용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각각의 자연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주목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3장의 내용은 그것의 소제목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우주창조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무엇과 천상의 신들’이 ‘아득한 신’으로 변모를 겪는다는 것을 서두에 얘기한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삶의 종교적 체험’이라는 소제목을 시작으로 해서 (‘하늘의 상징적 지속’), 물의 상징과 구조, 세례의 모범적 역사, 상징의 보편성, 대지모신, 지상의 분만, 여성 대지 그리고 생산력, 우주 나무의 상징과 식물 숭배....이러한 순서로 글을 전개한다.

3장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오토의 거룩함과 엘리아데의 거룩함이 지니고 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먼저 짚어내야 한다. 『성과 속』의 머리말에서 엘리아데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 엘리아데에게 있어서의 거룩함이란 오토가 이야기 하듯 ‘전적으로 다른 무언가’에게서 느끼는 감정(비합리적인, 피조물적인 누멘적 감정)뿐만이 아니다. 그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주목하는 단어는 직접적인‘실재성’이다. 그리고 그 ‘실재성’은 종교적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자연이 자신의 신성성을 열어보인다라고 얘기한다. 오토에게 있어서 다른 것(different thing)에게 서 오는 다른(different)혹은 두려운 감정으로서의 거룩함이 엘리아데에게 와서는 오토적인 의미에서의 누멘적 감정을 보존하면서도 주변에 있고 가까운, 즉 친근한 것(familiar thing)에서 오는 친근한 감정(familiar)을 포함하게 되었다. 엘리아데에게 있어 거룩함이라는 것은 오토와는 달리 존재양식과의 연관 아래에서만 그것의 가치가 부여된다. 그리고 오토에게 그 감정이 수동적인 것 이었다면 엘리아데에게 그 감정은 주체에게 오토의 누멘적 감정처럼 갑작스럽게 덥쳐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종교적 인간)가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서 드러나게 된다.

오토에게 있어서 거룩함이 저편에만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엘리아데에게 있어서 거룩함은 이편에도 있다. 먼 세계에서 주변 세계로 눈을 돌릴 줄 아는 엘리아데의 태도는 1,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는 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3장에서 천지창조와 천지창조의 신이 여전히 그 힘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득한 신이 된 이후에 주변 세계의 대상/현상들이 인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3장에 들어와서 엘리아데는 주변의 대상/현상들을 본격적인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알레고리의 사용은 세계의 대상/현상들을 인간에게 한 층 더 가깝게 끌어당기는 효과를 자아낸다. 1,2장에서 보여주었던 우주창조의 이야기보다 3장의 알레고리를 이용한 대상/현상들에 대한 해석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한층 더 밀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개인의 실존자체가 이야기 될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한층 더 가까워진 대상/현상들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 개체를 소우주로 상정하는 것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인간이 모방을 통해 천지창조에 참여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인간 개체 내에서도 천지창조가 일어난다고 엘리아데는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인간(신체) 자체가 소우주가 된다는 발상은 엘리아데가 1,2장에서 보여주었던 역설적 공/시간의 관념과는 또 다른 아이러니한 공/시간 관념을 발견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인간에게 보다 가까워진(존재양식의 일부가 된) 대상/현상들을 묶어낼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죽음-재생’이다. 1,2장에서 드러나는 ‘죽음-재생’과 3장에서 전개하기 시작하여 4장에서 마무리되는 ‘죽음-재생’의 의미에는 간과하기 쉬운 갈라섬이 있다. 1,2장에서 인간이 신의 창조행위를 모방하여 안(인간세계)/밖(신의 세계)의 구분이 지워지는 역설적인 공간/시간으로의 돌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신이 세계를 만들 때 보여주었던 ‘죽음-재생’의 상징은 우주창조의 공간과 시간의 중심(세계의 축과 새해)에서 나오는 거룩함의 잉여 자체를 통해 죽음=재생 관념이 즉각적으로 도출된다. 천지창조라는 것 자체의 이면에 '죽음-재생‘ 상징을 내재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창조의 ’죽음=재생‘ 상징이 ’죽음 후 재생‘ 상징으로 변모하는 것은 3장에서 천지창조의 신이 아득한 신이 된 이후부터 혹은 주변의 대상/현상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4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인간 실존과 연관된 통과의례(죽음 후 재생)와 연관되는 소재들을 3장에서 찾아보면, '죽음과 매장, 삶과 부활을 표현하는‘ 세례(p118), '아기든 어른이든 병이 났을 경우에는 .... 상징적인 매장.. 병든 사람을 갱생시키는/ 죄인을 매장한 후에 두 번째 태어남이 가능하게 해주는’ 대지(p127), ‘생산력을 위해 세계 창조에 선행한 무정형 상태로의 후퇴’(p131), 불멸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열매를 따기 위한 인간의 영웅적 입사시련과 연관된 나무(p133), '무엇보다 죽음이란 끝이 아니며 새로운 탄생이 뒤따른다는 사실‘(p140)을 알려주는 달, 등등이다.

‘죽음 후 재생’이라는 이 대상/현상들의 상징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죽음 후 재생’의 등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폭력(‘승리자가 영원한 젊음, 불패의 능력, 그리고 무한한 권능이라는 초인적 조건에 도달하는 것은 폭력에 의해서이다’(p133))이 필요하다는 관념과 짝지어 생각해야 한다. '성년식뿐 아니라 비밀결사에의 가입식까지 포함한 모든 비교(秘敎)에서 발견’(p174)되는 ‘고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동일한 입사의 도식’(p174)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죽음 후 재생’이라는 상징은 ‘죽음 후 재생’이라는 도식으로 새롭게 그릴 때에야 폭력, 비로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온전한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때에야 엘리아데가 얘기하고 자 했던 아이러니한 공/시간 관념도 드러난다.

엘리아데에게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개념이 있다. 신이 창조한 우주를 대우주라고 한다면 소우주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시간과 인간의 신체(개체)가 그것이다. 그런데 대우주-소우주 개념쌍은 1,2장에서 4장으로 넘어가는 사이인 3장에서 그 의미변이를 겪게 된다. 다시 말하면, 대우주-소우주의 공/시간 개념이 처음에는 역설적인 지평에서 이루어졌다면 나중에는 소우주(신체(개체))의 공/시간 개념은 아이러니의 지평을 포함하게 된다. 첫 번째 대우주-소우주가 천지창조가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힘’의 측면에서 그려졌다고 한다면, 두 번째 대우주-소우주의 경우에는 ‘폭력’의 측면에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그러하다. 달리 말하면 첫 번째 대우주-소우주는 종교적 인간의 우주의 중심으로의 이행(移行)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면 두 번째 대우주-소우주는 종교적 인간의 던져짐(被投)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여기서 폭력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가설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엘리아데의 글에는 폭력의 의미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설은 집단적으로 공유(확신)된 도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식이 개인의 차원에 적용될 때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확신된 도식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대인들은 항상 누군가의 행동을 모방하고 고통에는 항상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죄와 고통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고통의 의미’와 ‘고통스럽다’는 것은 구분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주기적인 재생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표현의 이면에서 고대인의 개인적인 성격을 읽어낼 수 있는데 고대인이 그 만큼이나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라는 것이다. 즉, 고대인이 시간의 비가역성을 느끼고 싶었다라는 것은 뒤짚어 풀이해서 고통에 방점을 찍을 때, 개인적이라는 말과 의미연관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을 기반으로 개인이 폭력 앞에 노출될 때 그 결과는 개인에게는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비록 집단 내에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우주창조적 차원의 ‘죽음=재생’이라는 도식은 종교적 인간인 개인의 실존적 차원으로 접근할 때, 폭력 후에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음을 감당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알 수 없음’의 측면에서 엘리아데의 ‘죽음=재생’의 공/시간적 관념은 ‘죽음 후 재생’이라는 아이러니를 획득하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올빼미는 황혼 후에 난다’는 헤겔적 의미에서의 아이러니의 비밀을 엘리아데도 공유하게 된다.(엘리아데는 달갑지 않겠지만;; 음음..) 하지만 헤겔과 엘리아데가 서로 다른 점은 엘리아데의 올빼미는 황혼 후에만 나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이미 날았다는 점에 있다.

엘리아데의 영원회귀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 네 개의 얼굴은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분리되어 있다. 첫 번째 두 개의 얼굴은 ‘이미’와 ‘뒤늦께’이고 나머지 두 개의 얼굴은 역설과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이 네 개의 얼굴이 하나의 얼굴일 수도 있고 두 개, 세 개의 얼굴일 수도 있는 것은 천지창조-천지창조모방-집단-개인-자연물의 알레고리화-죽음=재생-죽음 후 재생-대우주-소우주(집단)-소우주(신체) 이 연관 혹은 연쇄고리 내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에 따라서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나가며

현상학자로서 엘리아데는 당대 서구의 사상가들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문제틀을 공유 했다고 가정하며 이 글은 시작된다. 많은 서구 근대 사상가들이 세계에 대해 크로노스-카이로스적인 공/시간 개념을 중심으로 두고 다양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펼쳤다고 한다면, 엘리아데는 그들과는 달리 영원회귀를 중점으로 고대인의 세계를 분석해 낸다. 그리고 엘리아데의 영원회귀 사상은 공/시간의 역설점 지점뿐만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지점까지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본 글의 요지이다. 근대의 직선적이고 가역적인 공/시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엘리아데는 그의 글 『성과 속』과 『영원회귀의 신화』에서 공/시간의 비가역적인 역설적 지점들에 대해서 방점을 찍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한 지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러니한 공/시간 개념이 가역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고대인의 아이러니한 시간의 가역성은 언제나 그들이 돌아가야 할 지점(천지창조의 공/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나가며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왜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서 역설적인 공/시간의식에 외에 아이러니한 공/시간의식까지 보고 싶었을까. 통독이 아니라 발췌독을 하면서 까지 말이다. 엘리아데를 읽으면서, 불편 했던 것은 ‘고통’이라는 단어였다. 내 머릿속에서 ‘고통’이라는 단어가 문제 되었던 것은 ‘엘리아데는 낭만적이다’라는 세간의 견해 혹은 편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낭만주의 시대에 ‘고통의 의미’를 산출하는 기제는 아이러니였다. 모든 낭만적인 것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낭만적인 것은 ‘고통의 의미’에는 민감하지만, ‘고통스럽다’라는 말에는 둔감하다. 낭만주의 시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고통에 집착하며 그것의 의미를 산출해 내는 방식에는 분명 ‘고통스럽다’에 대한 불감증의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수근거림을 듣는 엘리아데의 글 『성과 속』에서 ‘고통의 의미’가 아니라 ‘고통스럽다’가 드러나는 대목은 ‘역설’이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아이러니’ 였다. 역설적인 의식은 언제나 대상의 새로움이라는 단어를 향해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의식은 대상의 새로움보다는 잊혀졌거나, 감추워졌던 의미의 되찾음에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역설은 항상 다시 시작하기를 욕망하고, 아이러니는 시간을 달라고 보챈다. 엘리아데의 아이러니는 ‘고통의 의미’로 충만한 원심적인 역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지만, 다시 한번 더 모든 것이 충만한 역설의 세계로 귀향한다. 이게 내 마음대로 읽은 엘리아데의 시간론이다.

사족의 사족이지만, 이 글이 논문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독서감상문을 쓰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천지창조는 너무 멀고, 너무 새롭다. 그리고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지나치게 과거를 소멸시킨다. 그게 섭섭했나 보다. 근대인인 나에게는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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