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일반부문 3등작

서평: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유수진


“예뻐?”
“잘생겼어?”
“키 커?”

남자친구가 생겼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소개팅 애프터가 왔어, 어떤 내용이 됐든 연애사에 대한 보고에 우리가 보여주는 가장 보편적인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획일적이다. 영업 중인 성형외과 수로는 세계 순위권이라는 통계나, 대학 신입생들은 방학이 지나면 얼굴이 한두 군데쯤은 바뀌기 마련이라는 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정형화된 질문 하나로도 외모를 사람을 평가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 심지어는 관계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일반적인지에 대한 예증은 충분하다. 물론,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회가 보여주는 비이성적일 정도의 폭력은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능력이 아닌 외모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기회와 권한이 불공정하고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것은 물론 외모에 대한 투자가 과도해져 비생산적인 용도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이 할당된다는 거시적 차원의 문제 제기는 일단 제쳐 놓더라도, 외모가 관계를 지배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미시적․개인적인 욕구조차 채우기 어렵다. 외모를 스스로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는 바에야, 외모가 전부는 아닐지언정 외모를 전제해야 하는 관계란(“예쁘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그렇지만 너무 못생기면 좀 그렇잖아.”) 누구에게든 조금은 씁쓸하게 다가올 것이다. 작가가 “자기는 내가 못생겼어도 사랑할 수 있어?”라는 아내의 질문을 받고 구상하기 시작했다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 씁쓸함을 들추어내는 책이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가장 흔하게 내놓는 해결책은 아마 ‘외모가 아닌 내면이 중요함을 기억하자’는 권고일 것이다. 그러나 ‘파반느’의 ‘그녀’가 그렇듯, ‘못생긴’ 여성들이 항상 지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 앞에서 그 권고는 더 강하게 와 닿기보다는 오히려 공허해진다. 현상을 개인의 가치관이나 태도 문제로 환원시키는 ‘해결책’이란 항상 그렇다. 물론, 외모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내면보다 외모를 중요하게 보는 것은 가치관이 왜곡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가치관이 아니라면 외모지상주의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외모지상주의가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의 문제다.

주인공의 어머니나 ‘그녀’가 그렇게도 큰 상처를 받아야 했던 것은 다른 특성보다 우선 외모로 평가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가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도 책임감도 없는 배우자를 어떻게든 뒷바라지하는 여성 가장이 남편이 아깝다는 말을 듣는 것은, 물론 그 이유가 외모라는 점에서 한층 비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외모가 아닌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라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백화점 아르바이트생의 그것보다 나은 삶을 살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은 외모라는 기준의 피상성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견지에서 비판해야 할 문제다. 외모가 아니라 능력, 심지어 인격에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범죄자가 아닌 한 법을 만들어서라도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농담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요컨대, 외모지상주의의 가장 독한 병폐는, 우리가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인간’이라는 말에 함축된 제한 조건은 그 개념을 너무나 자주 무효화한다.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흑인, 노동자, 빈민, 미혼모, 성매매 업종 종사자 등, 그 암묵적 제한 조건에 의해 배제된 이들을 일컫는 말이 ‘소수자’다. 물론, 사람들이 ‘못생긴 인간’만큼 가책 없이 짓밟는 대상은 흔치 않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못생긴 사람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외모를 가꾸어 그 범주를 벗어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되거나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못생긴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그것에 비해 훨씬 덜 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소수자 배제라는 말로 일반화할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실제로 다이어트에 대한 성정치적 분석은 이미 이 문제를 정치적 맥락에 놓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배제되지 않은 인간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혹은, 배제에서 완전히 안전해진 인간은 존재하는가? 작품에서 요한이 한 말처럼, 극단적인 추남/추녀와 극단적인 미남/미녀의 양 끝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사람은 누군가에 비하면 못생겼지만 누군가에 비하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경쟁이 관계를 지배하는 순간, 극단적 미남/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몸은 개조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 가운데 누가 '이만하면 괜찮다‘ 할 것인가. 이 게임에서 절대 다수의 사람의 처지는, 확실하게 배제되지도 않지만 확실하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경쟁이 가열하면 가열할수록, 그리고 경쟁을 제외한 관계 양상이 지배하는 영역이 축소되면 축소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 평균적인 수준은 올라가고, 따라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전보다 한층 더 많은 노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잣대가 옳기는 한가, 이 경쟁이 합당하기는 한가, 낙오된 이들에 대한 처우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올 여지는 줄어들고, 정점에 선 이들의 지배는 그만큼 공고해진다. 정치나 문화마저 경쟁의 도그마에 복속시키는 사회에서, 이것이 외모에만 적용되는 말일 리는 없다.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회의 전 영역에 걸친 경제적 수익의 신성화다. 그리고, 비록 경쟁이 오히려 효율성을 저해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경쟁 이상으로 수익성을 얻는 데 좋은 방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윤 창출을 지상 명령으로 삼은 체제는 갈수록 가열해지는 경쟁을 손쓰지 않고 방조한다. 아니, 더욱 부채질한다.

경쟁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경쟁의 기준 또한 수지타산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어떤 자질도 그 자체로 경쟁력이 되지는 않는다. 외모든 능력이든 인격이든, 기본적으로 교환 가치를 높이는 속성만이 경쟁에서 무기가 된다. 가령, 그 내재적 가치야 어찌되었든, 정의감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인은, 유감스럽게도 노동 시장에서는 바로 그 때문에 저평가되기 일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평등 의식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남녀 평등의 이념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여성일수록 결혼 시장에서는 오히려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인간 시장에서 교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자질들을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끝없는 레드퀸 레이스다. 낙오된 자들은 물론, 아직 뛸 수 있는 자들에게도 그래서 삶은 팍팍하다.

《파반느》의 시선은, 한 사람의 고난 뒤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부조리를 포착하기에 충분히 날카롭다. 《파반느》의 주인공들이 내내 힘겨워하는 것은 개인적인 불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와의 불화다. 화자도 ‘그녀’도 요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그들의 공감대다. 세계 자체가 그들에게는 삭막하고, 쓸쓸하고,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의문도, 고민도, 가슴 아린 사랑도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고, 낯설고, 사실은 좀 딱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 규칙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그 나이대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조금쯤은 품고 있는,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초조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조차도 희박하다. 오히려 게임의 승자들에 대해서 이질감, 혹은 약간의 반감까지 드러낸다. 다른 누군가를 밟고 서지 않는 승리를 그려보기가 그네들에게는 아무래도 힘든 탓이다.

대신에 그들은 교환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경쟁력이 되지 않는 가치를 기를 쓰고 지킨다. 아무래도 손해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성격을 “합격”으로 판정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우정을 내어준다. 결혼 시장에서는 폐기처분해야 할 불량품쯤 될 여자를, 그래서 건드리면 깨질세라 소중히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자질은 대개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기에,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황폐한 세계에서 홀로 아름다울 수 있도록 한다. 낙오를 거부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우정과,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급부를 한 번도 따져보지 않는 가난한 남녀의 연애는 더러운 밤거리를, 초라한 동네 술집을, 더없이 신비하고 낭만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파반느》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유대를, 인간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기꺼이 스스로를 던지는 사랑을 그려 보인다. 요컨대, 《파반느》는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넘어 진정한 사랑의 이상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2% 부족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는 역사상 없었”음을 지적하는 작가가 ‘못생긴’이라는 형용사에만 천착한 것은 적잖이 아쉬운 일이다. ‘못생긴 여자’의 문제는 ‘여자’까지 마저 다루지 않으면 다 이해할 수 없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는 없을지 몰라도(엄밀히 말해 좀 의심스러운 명제), 못생긴 남자를 사랑한 여자는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능, 그 중에서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는 일로 취급된 기능은 실로 다양했고, 그래서 남자는 성적인 매력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남자는 지도자일 수 있었고, 전사일 수 있었고, 스승일 수 있었고, 예술가일 수 있었다.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여자가 인간이 되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와 아내일 때뿐이었다. 이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파반느》의 이야기에서 성별을 바꾸어 볼 때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작가가 ‘여자’라는 층위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은, 주인공과 “그녀”와의 관계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못생긴 여자’와 ‘가난한 남녀’라는 설정이 이야기를 꽤 파격적으로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능동적 남성과 수동적 여성이라는 로맨스의 도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베푸는 모든 것ㅡ 힘든 일을 대신해 주는 것, 전화를 거는 등 안부를 염려하고 배려하는 것, 상처에서 구원하는 것, 그녀를 모욕하는 다른 남성들을 응징하는 것, 숨어버린 그녀를 찾아가는 것까지ㅡ은 전통적인 남녀 관계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감동받는 지점들 역시 ‘여성스러움’의 정식에 지극히 충실하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작가의 통찰 또한, 예리하기는 하지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대응하는 그네들의 삶의 방식 또한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발버둥치게 만드는 체제의 음모를 신랄하게 꼬집어 놓고, 《파반느》의 주인공들은 결국 거기에서 한 발 물러서 자신들의 둥지를 만드는 데 그친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은 처연하게 아름답지만 너무도 부서지기 쉽다. 그들이 ‘경쟁’이라는 기제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다만 사회에서 주변화될 뿐이다. 그러나 ‘경쟁’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가 된다면? 빈곤할지언정, 주인공들이 정말로 생존의 위기에 몰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에, 《파반느》를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죽을동살동 달리는 것이 그저 경쟁의 무상함을 깨닫지 못해서만은 아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혹 평생을 생계 문제에서 자유로울 길이 있다 해도,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지 않을 바에야 그의 문제도 그녀의 문제도 요한의 문제도 달래질지언정 해결되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씁쓸함 없는 해피 엔딩은 이 땅을 벗어나서야 가능한 것이다. 너와 나의 사랑이 아무리 절절해도 세상의 냉혹함에 머리카락만한 균열도 내지 못한다.

그런 작지 않은 불만들이 있음에도, 《파반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야기는 술술 부드럽게 읽히고, 시종 흐르는 정서는 다소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거부감 없이 공감할 수 있고, 주인공들의 사랑은 찡하게 예쁘다. 작가의 의도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를 써보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면, 《파반느》는 그 의도를 다하고 있다. 《파반느》는 그 주제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단순한 신선함을 넘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고, 이것저것을 다 빼놓더라도 이야기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고,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술술 읽을 만한 책을 찾는 사람에게도 주저 없이 권할 만하다.

바람은 쌀쌀하고 잎은 붉어지고 센치해지기 좋은 계절이다. 로맨스가 땡기는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파반느》를 집어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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