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땅에 대해, 나는 여전히 희망한다

새내기부문 3등작

위태로운 땅에 대해, 나는 여전히 희망한다

현기영, 『누란』

홍산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이 책은 실패와 절망으로 가득하다. 제목 또한 작품의 상징성을 암시한다. 누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첫째, 포개놓은 알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태. 둘째, 중국 실크로드 길목에 있어 중계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던 왕국. 제목은 두 가지 뜻으로 모두 쓰였다. 작가가 제목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386운동권의 마지막 학번인 허무성을 통해 우리가 잘못 쌓은 역사, 이대로라면 무너질 역사에 대해 작가는 말하고 있다.

누란 [累卵] : 잘못 쌓은 역사에 대해

어디서부터 비극은 시작됐나, 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내리기란 어렵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그때부터일수도 있고, 3.1운동이 실패한 그때일수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답은 우리의 역사가 기형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나라를 판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고위관료가 되고, 그 고위관료의 후손들은 해방 이후 미군정과 손을 잡고, 또 그들의 후손은 군사독재 시절 상류층이 되는, 기형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문자 김일강의 몸이 체제의 권력 크기로 커져간다. 그가 전두환이 되고 박정희가 된다. 그의 몸은 박정희․전두환과 합쳐진 복합체가 되어 무한대로 비대해지고 반대로 그의 몸뚱이에 깔린 죄수 허무성의 몸뚱이는 무한소로 작아진다. (p.15)

조직의 생존을 위해서는 없는 간첩도 만들어내는 게 우리의 생리잖아.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아.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사람들이 해방 후에 어떻게 됐나? 벌받았나? 천만에! 벌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유당 정권에 재등용되어 소위 민주투사라는 것들을 잡아다 족쳤지. 그들이 바로 우리 선배야. 역대 집권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우리를 필요로 했지. 우리야말로 유한한 정권을 넘어서는 불멸의 존재인 셈이지. 정권을 초월한 체제 그 자체야. (p.51)

소설 곳곳에는 이런 기형구조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담겨있다. 권력에 붙어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정의를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라졌다. 문제는 이것이다. 비겁해야 살고 남을 짓눌러야 살수 있는 한국에서, 정의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했듯 정의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투쟁상태에 있어왔다.

일제시대 때는 독립이 정의였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주의가 정의였다.(슬프게도 당시에 이것은 정의라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시장이 정의가 되었다, 라고 대다수가 생각한다. 한국에서 시장은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시장을 통해 구매한 상품이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상품을 사용 할 때 만이 ‘나’를 표현할 수 있다. (혹은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

그래서 선과 악, 명예와 불명예도, 도덕과 부도덕, 정의와 불의도 시장점유율에 따라 결정되었다. (...) 메이저 언론에 실린 것은 무조건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 그것은 군사독재를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그 시절의 다수, 그 맹한 모습 그대로였다. (p.88)

선과 악 마저 시장으로 결정되고 있는 시대. 한국이 시장=권력, 이른바 ‘시장의 권력’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의 성격이 군사독재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슬픈가? 한세기에 가까운 수탈과 독재의 역사가 민족성을 바꿔놓았다. 수십년을 잘못 쌓은 기형의 역사.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누란(累卵)의 첫 번째 의미가 아닐까 한다.

누란 [樓蘭, Lou-lan] : 무너진 왕국에 대해

정의가 되어버린 시장의 권력은 삶 곳곳에 퍼져있다. 작가는 허무성을 통해 시장의 권력이 잠식한 대학을 본다. 작가가 대학에 집중한 이유는 이전과 가장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 대학이 청춘과 운동의 상징이라면 지금의 대학은 취업과 경쟁의 상징이 되었다.

대학졸업후 실업자나 비정규직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져요. 정규직을 얻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꿈이에요. (p.69)

꿈, 이란 말이 이렇게 경박하게 들릴수도 있을까. 정규직을 얻는 것에 꿈이라는 은유를 쓴다면 그건 사치일 것이다. 무엇이 대학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할리우드 영화처럼,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처럼 미국식, 할리우드식 낙관주의로 경쾌하고 싶어하는 학생들로서는 그의 담론이 여간 못마땅한게 아니었다. (...) 안방의 독재자 텔레비전은 전에는 신파조의 눈물을 강요하더니, 이제는 웃음만을 강요했다. (p.77)

사람들은 공동의 적, 공동의 왕따를 잃어버러셔 우울하단 말이야. (p.182)

제목과 배우들만 바뀔 뿐 똑같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모레 같고 마냥 같은 이야기, 마냥 느려터진 템포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야기들, 마치 인생에는 영원히 계속되는 삶만 있고 죽음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p.217)

대중매체가 문제였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공동의 적, 공동의 왕따를 잃어버린 모두는 우울해졌다. 이 멜랑콜리의 틈으로 대중매체가 들어왔다. 90년대 대중문화평론, 대중음악평론 등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전향’은 비극을 불러 일으켰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쾌락과, 보기만 하면 즐거워지는 영상들이 우리를 더욱 아둔하게 만들었다.

대중은 스펙터클을 좋아해요. 사람들이 대형쇼핑몰에 몰리는 것도 상품과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엄청난 물량과 화려한 색체의 스펙터클 때문이죠. (p.195)

복잡한 생각을 버려라. 단순하게 생각하라. 무조건 믿어라! 유아적 단순성을 강조하는 그 말이 야릇하게, 감미로운 통증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군중은 사고하지 않는다고, 어떤 똑똑한 개인도 군중에 섞이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바보가 된다고, 김일강은 말한다. (p.251)

용미야, 이 열광은 단지 일시적인 카타르씨스일 뿐, 아무것도 해결 못해. (p.277)

스펙터클에 빠져있는 대중의 모습을 보고 작가는 누란(樓蘭)왕국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누란왕국은 실크로드를 따라 번성했던 국가이지만 6세기가 돼서 갑자기 멸망해버린다. 멸망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갑작스런 쇠락으로 멸망한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포착한 한국 은 멸망의 징후들로 가득한 누란제국의 마지막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맹목과 맹신으로 분별력이 사라진 사람들, 월드컵과 같은 스펙터클에 쉽게 흥분하는 국민, 이것이 모두 멸망의 징후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한다

누란(累卵) 혹은 누란(樓蘭)의 시대에 작가는 자신을 비관주의자라 말한다.(「작가의 말」에서)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작가는 현실주의자다. 현실을 정확히 그려냈을 뿐인데 비관주의자가 되었다. 현실은 멸망의 징후들로 가득했기에 작가가 자신을 비관주의자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작품 속에서 희망의 징후들을 찾아본다.

돼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야. 인간은 그렇게 돼지처럼 죽어서는 안되잖아! (p.137)

어른들의 술자리를 싫증도 내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림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그 자리에서 그냥 스르르 잠이 들곤 하는데, 정말 천사 같아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아름다음이죠. 그 아이는 인간의 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죠. 세상은 그 아이를 자폐아라고 부르지만, 우린 천사라고 부릅니다. (p.184)

월드컵 축구대회 한미전이 있던 6월 10일, 허무성은 이날이 바로 십오년 전 6월 항쟁이 시작된 날임을 상기했다. (p.265)

희망은 기억하는 것이다. 6월 10일을 한미전이 아니라 6월항쟁으로 기억하는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그렇게 6월을 기억하는 한사람만 있다면 그게 우리 모두라면 된다. 술자리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잠드는 아이는 어쩌면 희망의 모습이다. 세상은 희망을 자폐아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천사다. 2년 전, 촛불집회를 기억한다. 어느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광장에 나왔던 시민들. 그들의 모습 속에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이 있다.

멸망과 희망의 징후는 도처에 있다. 둘 중 어느것을 택할지는 개인의 몫이다. 나는 희망을 택했다. 위태로운 땅, 절망하기엔 희망이 너무나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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