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에 접근하는 가장 훌륭한 관점은 무엇인가?

일반부문 1등작

정의로운 사회에 접근하는 가장 훌륭한 관점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 서원주


2010년 외교부의 특채 파문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제시한 공정사회론은 한동안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공정사회'라는 말에 내포된 공정성 개념의 핵심은 개인들의 능력/성과 이외의 요소들, 즉 혈연이나 지연, 학벌과 같은 임의적 요소들이 공직 및 금전의 분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들의 능력이 같은 조건에서 발휘될 것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평등 개념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평등의 문제를 지적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가 때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사회론을 언급한 시기와 맞물려 3달 가까이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접근하기 쉽게 서술한 이 책은 단순한 개론서만은 아니며 저자의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 의도란 세 가지 도덕-정치철학적 접근, 즉 공리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공동체주의 가운데 정의를 이해하는 가장 뛰어난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꼼꼼한 논증들과 풍부한 사례를 들고 있는 이 책은 휴가철에 심심풀이로 읽는 용도로만 쓰이기엔 아까운 책으로서, 면밀히 그 내용을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만약 그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면, 우리가 화두로 삼고 있었던 공정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는지를 재고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10개의 장(章) 가운데 2장은 공리주의, 3~6장은 자유주의 정확히 말하자면 3~4장은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5~6장은 칸트와 롤즈에 대한 설명이다. 샌델은 이처럼 자유주의의 유형을 두 종류(자유지상주의, 칸트/롤즈)로 나누어 세부적인 비판을 가하고자 한다. 두 사상 모두 넓은 의미에서 자유주의 전통 하에 있긴 하지만, 각각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자유지상주의가 자기소유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상이라면, 롤즈의 정의론은 도덕원칙의 자기입법이라는 칸트의 자유 개념을 사회계약 사상과 연결하여 발전된 의무론적 자유주의 사상이다. 이 글에서도 두 사상은 분류하여 언급될 것이다., 7~10장은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 내지 설명이다. 3개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유는, 우리가 정의에 대해 숙고할 때 행복, 자유, 덕, 이 세 가지 기준을 통해 숙고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행복을극대화하는 사회를 가장 좋고 올바른 사회라고 보는 반면, 자유주의는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사회를, 그리고 공동체주의는 공동선(덕)을 추구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본다.

샌델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모두 정의를 충분히 흡족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저자가 '정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1장에서 저자는 '정의'라는 주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언급하고 있다. 정의란 넓은 의미에서의 재화를 올바르게 분배하는 문제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Sandel, p. 33).

이 정의(定義)로부터 던져지는 첫 번째 문제의식은 재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다양한 재화들을 행복 또는 개인의 권리라는 단일하고 추상적인 가치가 충족되기 위한 수단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발상이다. 재화의 고유한 특성들이 삭제될 때 이 재화들이 왜 선택될 만한 것인지 설명될 수 없다. 자유주의자인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에서 분배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은 채 '이익'이라고만 서술함으로써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에게 가해진 동일한 비판을 받지는 않지만, 그의 이론은 개별 논쟁들에서 침묵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분배 정의의 문제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이클 월저가 『정의와 다원적 평등』에서 단순 평등 사상이라고 비판한 이같은 일원적 분배 체계들은 가치에 내재된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을 모두 삭제함으로써 현실성이 없는 따라서 설득력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반면 경제적 재화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영역의 재화들, 즉 지위, 권력, 자격, 영광, 성원권, 안전, 교육, 애정 등이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공동체주의적 사고방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논쟁들에 여타의 관점들보다 훨씬 자세히 개입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가 다른 사상들보다 분배의 대상을 훨씬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폭넓게 고려할 수 있는 근거는 '나' 혹은 '우리'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철학적 차이에 있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공동체를 단순한 개인들의 총합이라고 본다. 롤즈는 이러한 단순한 도식을 거부하지만(Rawls, p. 66),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나 롤즈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 롤즈 역시 정의의 원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인을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떼어냄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해 매우 협소한 도덕적 이해에 머무른다. 무지의 장막에 들어가는 개인은 자신이 처하게 될 입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에, 즉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아무런 앎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공리주의/자유주의에서 '쾌락'이나 '이익'과 같이 추상적인 기준으로 분배 정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빈약한 인간 이해의 필연적 결과이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인간 존재에 대한 협소한 이해는 계몽주의 이후 도덕철학이 지녀온 공통적인 특징이다. 인간을 공동체의 에토스로부터 분리시켜 사유할 때, 도덕법칙을 정초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특정한 부분을 본질로 간주하여야 한다. 이는 공동체로부터 주어지는 인간의 목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로부터 비롯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하는” 시도이다(MacIntyre, p. 86). 그렇다면 인간 존재에 대한 어떤 이해가 가능할까? 매킨타이어는 '서사적 존재'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개인을 온전히 자발적인 선택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적 정체성들로부터 목적을 탐색하거나 만들어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 행위는 우연적이지만 선험적인 사회 관계망을 벗어날 수 없는, 즉 공동체들의 텔로스 경계 안에 있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사유가 개인의 합의에 기초한 자유주의적의무론에 비해 어떤 점에서 우위를 지닐 수 있는가? 바로 우리의 삶을 둘러싼 도덕적 고민들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이 스스로를 이해할 때 생겨나는 시민의식, 즉 희생이나 봉사, 연대와 같은 책임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 개인은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선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샌델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 즉 연대 의무야말로 개인의 삶의 의미를, 그리고 나아가 정의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라고 본다. 개개인의 합의에 기초한 의무도 아니고 자연적인 의무도 아닌 이 특수한 의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갈등들과 논쟁을 설명하거나 그 안에 참여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샌델은 이러한 특수한 공동선의 관념이 정치적 과정에 이미 개입되어 있으며 또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첫 번째로 분배될 사회적 재화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와, 두 번째로 재화를 분배받는 나 또는 우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정의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 머무르게 된다. 샌델은 이 두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써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넘어선 공동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치를 제안한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때에 비로소 시장의 한계를 비롯한 수많은 부정의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샌델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윤리의 역할을 매우 무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첫 번째 문제는 공동선의 언어가 정의에 대한 다른 관점을 포섭하는 데 실패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 본 논증은 덕을 통해 정의를 이해하는 관점이 어떤 이유에서 가장 훌륭한 이해인지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증이 성공적이었다고 해서, 다른 관점이 틀렸다거나 완전히 배제되어야함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샌델 역시 이러한 약한 논증으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질 반론을 예상하고 있다. 과연 자유나 행복이라는 관념을 배제하고 오직 공동선의 언어만으로 정의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공리주의적인 행복 개념은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공동체주의자에게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관념은 어떠한가? 공동체가 가하는 수많은 부담들을 개인의 권리의 언어로 해방시켜 온 자유주의는 이미 현대 정치철학에서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쉽게 도외시할 수 없는 이념이다. 샌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던진다. 공동체가 주는 부담은 억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카스트나 계급, 신분이나 서열, 관습이나 전통, 타고난 지위로 정해지는 운명을 인정하려는 정치론에 대한 해독제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Sandel, p. 309)

이 질문에 샌델이 답하는 방법은 앞서 살펴본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란 자신의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서사적-해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적인 행위가 아니며(Sandel, p. 310), 해석에 따라 개인에게 생겨나는 윤리의 내용도 달라진다. 샌델은 자유의 개념을 내가 속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해석적 근거로 이해하고자 한다. 공동선의 언어로 설명된 자유 개념은 우리에게 충분한 윤리적 책무를 부여할 수 있는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도덕적 책임, 즉 자연적 의무, 자발적 의무, 그리고 연대 의무 가운데 공동체적 텔로스의 윤리는 우연적이며 특수한 내용만을 지니는 연대 의무에 대해서만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여전히 해방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 보편적 자연권 또는 합의를 통한 상호적 의무라는 개념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적 존재로 보지 않는 이상 설명되기 어렵다.

앞서 보았듯이 공동체주의는 자연권 또는 합의에 따른 의무가 윤리에 대한 빈약한 설명밖에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설령 이 비판이 합당하다고 하더라도, 자연적/자발적 의무가 도덕적 책임에서 빠져나갈 때 공동선의 윤리 역시 빈약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대답이 오직 내가 살아가는 지평 안의 공동체에서만 제공될 수 있다면, 그 너머의 도덕적 언어는 사유불가능한 것이 된다. 서사적 자아가 여러 정체성들을 탐색하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이들에게 해방의 언어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규범이 다른 규범에 자의적으로 우선시될 수 없다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공동체주의적 윤리의 개념은 더 커다란 난점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오늘날의 공동체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정치에 특별하고도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다만 “시민이 지지하는 다양한 목적에 가능성을 열어둘 뿐”(Sandel, p. 270)이다. 즉 어떤 사회의 텔로스가 특정한 지향이나 원칙을 필연적으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 개인에게 가족, 종교, 지역, 국가, 민족, 인종적 규범이 모두 혼재되어 존재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의 목적을 따라야 하는가? 상황마다 어떤 목적이 유관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면, 이는 윤리적 행위를 정의주의(emotivism)적인 기호의 문제 혹은 자의적 결단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결과는 공동체주의자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정의주의는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결단론적 윤리가 윤리학적 체계로서는 명백한 실패였음을 이미 지적하였다(MacIntyre, pp. 33-34; pp. 72-76).

이에 대해 샌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다. 그의 주장은 어떤 특정한 관점의 목적론적 사고를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덕을 통해 지향하는 선의 관점들이 토론의 장에 들어올 때(혹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제대로 소통하고 논쟁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분명 일리있는 답변이긴 하지만 이 답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공동체주의적 윤리는 윤리적 행위나 논쟁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상황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침묵하게 된다. 이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론이다. 정의에 관한 도덕-정치철학적 탐구는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탐구를 통해 실제로 우리에게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실천적 역할을 함께 지닌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후적 설명만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윤리학의 역할이라면, 이는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행위에 대한 설명도 우리의 역설적인 상황을 표면적으로만 포착할 뿐 그 이상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별선의 관점들이 논쟁들에 개입할 때 서로 다른 공동체들의 불가공약적인 가치들 사이에 놓임으로써, '영원한 다신론의 싸움'을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샹탈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정치적 주체들 사이의 불가공약성이 본질적인 특성이며, 정치에서의 논쟁을 이성적인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 아니라 갈등에 기반한 수사학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Mouffe, p. 181). 이는 1장에서 샌델이 생각했던 정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론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Sandel, p. 45)라는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샌델의 논증은 궁극적으로 정치나 도덕이 “이성과는 무관하게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정해졌다는 느낌”(Sandel, p. 44)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와 같은 난점들을 고려할 때 인간 본성 개념을 논의의 중심에 받아들이지 않는 오늘날 정치철학에서 목적론적 사유는 적합하지 않다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은 일견 설득력을 갖는다. 어떤 목적이 고려되어야 할 지 알 수 없다면, 어떤 덕이 요구되는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공동체주의적 윤리는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정의의 관념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진다. 롤즈의 정의론이 사회 구성의 근본적 원칙을 제시한 데 비해, 공동체주의는 연대 의무를 통해 정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논의를 정리해 보면,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도덕이 무척 협소한 의무에 그친다는 샌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정의론은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치들의 분배 문제에 쉽게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샌델이 제안하는 공동선의 정치 역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정치적-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하진 못함으로써 허약함을 드러낸다. 공동체주의가 이와 같은 난점들을 안게 된 것은 공동체의 역사적 형성과 현대적 윤리의 공존 형태에 대한 탐구가 빠진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개인을 구성하는 공동체들이 다층적으로 존재할 때, 이들 간의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 없이는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결과물들을 단순히 등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과에 이른다.

20세기 초 전체주의 국가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과 문제를 생각해 보자. 오늘날 독일과 일본에게 과거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오늘날의 독일인이나 일본인들이 과거의 공동체와 떨어져 사고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책임져야 하기에 배상과 사과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전쟁 피해국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는 정확히 반대의 논지로도 사용될 수 있다. 과거 제국주의적 팽창에 자부심을 느끼고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극우파들의 주장도 자신을 역사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파악하는 사고로부터 비롯된다. 두 갈래의 사유가 평행선을 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18~19세기부터 이어져 온 제국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현대적 윤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는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오늘날의 도덕적 반성과 교차시킬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전통적인 문화양식에 내재된 덕의 언어들만이 아니며, 단순히 개인의 선택적 능력도 아니다. 바로 윤리의 내용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반성적 능력이다. 이러한 반성은 서로 다른 공동선의 언어들이 경합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유관한 전통들의 기원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무엇이 지향되거나 폐기되어야 하는 윤리성인지를 가려낼 수 있게 하는 이러한 숙고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적 사유방식과 마찰을 일으키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이를 통해 전승되어 온 사회적 텔로스와 자유주의적 권리 개념 양자에 모두 비판적인 상호보완적 윤리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면서 공동선의 추구는 매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들로만 설명될 뿐 구체적인 상황에 더 직접적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개인과 사회적 텔로스 사이의 관계를 더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적합하게 고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비판에 대한 대략적인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개인의 권리를 출발점으로 잡는 근대적 도덕-정치철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혹자는 우리의 사유 지평이 자유주의의 성과들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샌델의 주장을 고전적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숙고와 정치철학에 대한 역사적 탐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숙고방식이 고전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샌델의 정의론은 몇몇 이론적 보완과 세밀화를 통해 대안적 도덕-정치를 생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추상적이고 경직된 권리이론에 매인 오늘날의 정치철학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참고도서

  • MacIntyre, A.,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7.
  • Mouffe, C.,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보경 옮김, 후마니타스, 2007.
  • Rawls, J., 『정의론』, 황경식 옮김, 이학사, 2008.
  • Sandel, M. J.,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 Walzer, M., 『정의와 다원적 평등』, 정원섭 외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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