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리라!
장려상
역사가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리라!
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 『아리랑』을 읽고
국사학과 최종환
1. 들어가며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내가 입학했던 과/반은 선배가 후배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 있었는데, 따스한 봄날이었던 그 해 3월 난 처음으로 선배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 그 선배는 나를 학교 앞 서점으로 데려가서는, 『아리랑』이라는 책을 내밀었다. 난 책 제목을 보고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조정래 씨의 아리랑 말고 다른 아리랑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정래 씨가 쓴 아리랑의 높은 인지도 때문인지,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 난 두 아리랑 사이의 연관성만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혀 다른 책이었다. 바로 조선인 혁명가인 김산이라는 인물의 자서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인물, 김산은 또 다른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 당시 김산에 대한 나의 느낌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김산의 『아리랑』을 집어 들었다. 7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그 감동들은 새록새록 다시 살아났다. 어떤 때는 그의 유머러스함에 웃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민족의 현실에 슬퍼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때 읽은 아리랑과 다시 읽은 아리랑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예전에 같은 책을 3번 읽은 적이 있다. 2학년 때 한 번, 3학년 때 한 번, 4학년 때 한 번.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읽을 때마다 책에서 얻는 바가 달랐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이 책에서 단지 대단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 김산만을 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볼 만한 문제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김산. 남한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중국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름 없이 사라져야 했던 인물. 그러나 그의 불꽃같았던 삶은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남아 우리에게 고민해야 할 바를 던져주고 있다. 비록 자신이 헌신한 만큼의 결과가 그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삶 그 자체로써 자신의 헌신을 웅변하고 있다. 이제 모든 고민과 평가는 오롯이 현 세대의 몫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과 평가는 어그러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좀 더 바르게 볼 수 있는 면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추적할 필요가 분명 있는 것이다.
2. 잊혀졌던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졌던 독립 운동가들은 대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이 김구 혹은 이승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다. 당시 사회주의자들 역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물론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은 각자의 노선에서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민족주의 계열이 부각되고 사회주의 계열이 무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 독립 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 그것은 오래된 우리의 맹점(盲點)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왜 이리도 잊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현대사에 강요된 반공주의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국제주의적인 이념이 ‘조국’의 독립과는 관련이 먼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의 초반부만 보더라도 그러한 생각은 말 그대로 선입견임을 알 수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김산의 마음은 『아리랑』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렇지만 조선의 시냇물이 평상시에는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아십니까?”
“조선은 아직도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서 그 오래된 교수대를 때려 부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김산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으며, 그것이 또한 당시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의 심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노선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 피억압 민중으로서의 조선인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헌신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최근에 오면서 독립 운동에 대한 그들의 기여가 조금씩 빛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사실을 바르게 평가하는 작업은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3. 국제주의적 실천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했겠지만, 김산은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나 역시 그러한 의문을 책을 보는 내내 할 수 밖에 없었다. 잘 알려진 독립 운동가들이 대부분 상해의 임정 출신이거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파, 혹은 소수의 국내파들인데 비해 김산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김산의 사상을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곧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이다.
김산은 조선의 독립, 조선 피억압 민중들의 해방이 단순히 일본 정부만을 대상으로 싸운다고 해서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중국의 억압받는 자들과 손을 잡고, 또한 일본의 억압받는 자들과도 손을 잡아서 제국주의 전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고는 조선의 해방도 요원(遙遠)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는 경로로써 중국 공산당을 택했다. 얼핏 보면 뜬금없어 보일수도 있는 그의 실천적 경로는 그러나 지금 시대에 진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있어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이 땅에서 진보를 고민한다고 하는 이들 중에 자신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된다. “우리끼리만 잘하면 된다.”라거나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면 많은 모순들이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주위에 간혹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늘날처럼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만의 진보가 얼마나 진정한 의미의 진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김산은 동아시아 전체의 해방이 없이는 조선의 독립도 불가능 한 것으로 보았다. 나 역시 그러한 김산의 의견에 전적인 동의를 보낸다.
4. ‘이론對실천’의 이분법적인 틀을 넘어서
책을 보는 내내 놀랐던 것은 바로 김산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어 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이상주의자에서 톨스토이 주의자로, 무정부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김산은 항상 자신의 사상을 정정하고 변화시켜왔다. 이는 단순히 다양한 사상을 섭렵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다. 인간은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체계를 여간해서는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한 만큼 김산이 자신의 사상 체계를 예리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와 토론을 했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나태와 아집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정정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만다. 김산의 이러한 부단한 노력은 시대를 떠나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일치시키기 위한 김산의 노력이었다. 앞서 김산이 자신의 사상에 따라 실천적 경로를 정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앎과 실천을 조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동서양의 온갖 고언(古言)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현듯 신영복 선생님이 그의 저서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했던 말씀들이 떠올랐다.
“이론이 실천을 풍부하게 하고, 실천이 다시 이론을 풍부하게 한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은 서로를 풍부하게 하는 변증법적인 발전의 관계다. 실천을 무시하고 이론만 중요시하다가는 그 이론은 공중에 붕 뜬 이론이 될 것이다.”
김산은 자신의 이론을 하늘로 날려 보내지 않고 땅에 단단히 발붙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부단한 실천을 해 왔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시대에 김산의 우직함은 새로운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5. 인간(人間) 김산
이 책은 분명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위인전과 다른 매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혁명가로써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써의 김산 역시 큰 비중으로 조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혁명가 김산과 인간 김산을 둘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그러한 구분법에 익숙해져 있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의 전기는 대부분 그 사람의 업적 중심으로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김산의 인간적인 고뇌, 특히 연애와 사랑-인간이라면 지나쳐 갈 수 없는-에 대한 김산의 생각과 고민을 솔직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이 김산이라는 인물에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김산이 김충창과 오성륜에게 보낸 편지 구절은 그의 유머러스함과 함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글귀이다.
“나는 당신의 낭만적인 난센스를 모조리 용서합니다. 실은 오늘 밤 나는 어느 사람이 저지른 어떠한 일이라도 용서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형이 내게 한 말이 맞았어요.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정확했어요.”
이 글을 보면서 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의 귀엽기까지한 고백들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한 인물을 다면적인 면으로 고찰하는 것은 그 인물을 이해함에 있어 좀더 그 폭을 넓혀줄 수 있다.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던 김산 역시, 사랑과 활동을 조화시키는 그 애매한 지점에서 수 없이 많은 진동을 경험했으리라.
6. 나가며
『아리랑』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자서전과도 같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김산의 삶 자체가 역사의 한복판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역사가 오늘날에까지 끼치고 있는 영향들에 대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고민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며, 때론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그의 삶과 연동되어있는 역사적인 사실들, 그리고 삶과 투쟁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좀더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흐른 7년이라는 시간은 분명 나에게 그 때보다 더욱 많은 고민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의 밑바닥에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투사였던 김산, 하지만 조국에서도 활동의 근거지였던 중국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김산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인 동경과 안타까움이 깔려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의 시대를 되새기고 고민하라고 외치고 있다. 김산! 당신의 시대는 당신을 저버렸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이어질 역사가 당신을 살아 숨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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