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송』에 대한 서평
장려상
카프카, 『소송』에 대한 서평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문형준
법권력과 그것의 폭력성에 대한 폭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상에 대한 비판
‘카프카’ 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으나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의 작품에 대해 기겁하는 이야기들도 같이 들어왔기 때문에 범인(凡人)인 나로서는 그다지 그의 작품을 접하고 싶은 용기를 갖지 못했다. 이번 기회를 빌려 카프카의 ‘소송’ 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된 나는 한편으로는 졸음을, 또 한편으로는 작품 속의 답답한 공기를 참아내며 몇 번이고 속으로 불평을 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대화를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기는 하는 건지, 마치 독백을 하듯이 한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작품 속 주인공 요제프 카는 숙부 레니와 그의 친구 변호사 훌트의 방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의 긴 대화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중요시하지도 않는데, 나는 티토렐리나 상인 블로크, 그 외 기타 인물들뿐만 아니라 요제프 카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독백 같은 긴 말들에 대해 숨이 막혔고, 도대체 그 긴 말들이 책속의 이슈가 되는 소송 사건의 해결에 도움도 되지 않는 내용들로 대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도 났다. 당시의 유행은 일상 대화에서도 연설이나 토론을 하듯이 말을 그렇게 길게 하는 것이었을까?
즐겁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쾌감 때문에 작품에 대한 호기심조차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적는다는 것이 정말 어렵게 느껴진다. 귀동냥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의 작품은, 그의 출신을 고려하여 유태교와 관련지을 수도 있고 그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을 고려하여 정신분석학과 관련시켜 해석할 수도 있으며, 다르게는 철학적으로, 또는 인간 소외, 고독과 관련시켜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나의 문학적 자본과 지식이 부족하여 그러한 해석들에 긍정 내지는 부정을 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에 내가 『소송』이라는 작품을 싫어하면서도 결말을 알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든 동기와 관련하여 작품을 이해해 보고자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요제프 카가 겪게 된 상황은 바로 내가 겪었던 상황과 같은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2005년 8월, 나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당일에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고소를 당했으니 빠른 시일 안에 경찰서에 와서 진술서를 작성하라는 이야기였다. 당시에 나는 내가 무슨 고소당할 만한 죄를 지었다는 것인지 어이없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약 4개월간의 사건 진행 기간 동안 나의 삶은 피폐할 때로 피폐해졌었고, 법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에 대한 분노는 결국 좌절로 변해버렸다. 법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 그리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당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요제프 카. 나는 본 작품에 대한 내 생각을, 기억 속 깊은 곳에 덮어두고 싶은 굴욕적인 나의 소송을 떠올리며 적어보고자 한다.
1) 카의 태도 변화
요제프 카는 잠에서 깨어 엉겁결에 체포당한 사실을 알았을 때, 잠시 어리둥절해 하기는 했으나 매우 침착하게 그 상황에 대처해나갔다. 그러한 침착한 태도는 첫 심문에서도 계속된다. 그 심문에서 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저한테 일어났던 일은 개인적인 사건이고, 그것 자체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그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으니까요. 그 숱한 사람들을 옹호하고자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저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제프 카의 이런 당당한 행동은 마치 그가 말하는 숱한 사람들 중의 한명에 내가 포함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고, 그에게 걸린 소송 사건이 카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나에게 대리만족을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행동은 머지않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첫 심문에서 앞으로 있을 모든 심문을 거부하겠다고 말한 그는 누가 경고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법정을 찾아간다. 이것은 마치 죄가 범죄를 끌어당긴다는 말대로 그가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떳떳할지라도 자신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 명료하게 알지 못한 채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면, 그 상황에 주어지는 조금의 이익도 놓치기 싫을 것이다. 요제프 카는 ‘심리가 체포된 자에게 어떤 경우라도 주게 되어 있는 이득을 스스로 포기 해버렸다’ 는 예심판사의 말을 겉으로는 비웃었지만 속으로는 웃어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이러한 행동 변화에서 그가 소시민의 영웅이 아니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원 사무처에서 카는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안내담당자에게 부축을 당하여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묘사는 법과 관련된 기관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태도에 대한 과장된 비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 경찰서, 검찰, 법원과 같은 기관들은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위압적이고 갑갑한 느낌을 들게 하여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가까이 가기가 꺼려지는 곳이다. 더군다나 어떤 소송에 연루되어 그런 기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위압감은 더욱더 증폭하여 아무리 당당한 사람조차도 내면에서부터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원사무처 복도에서 한 피고인이 안내담당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법기관의 권력 안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 도움의 요청
요제프 카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소송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타인의 도움을 찾게 된다. 숙부의 도움을 받아 훌트 변호사를 선임한 그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호사가 자신의 소송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훌트 변호사는 진정서를 오랜 기간 동안 완성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다지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인 블로크와 변호사와의 관계를 바라보면, 변호사라는 것은 법과 그것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는 여러 기관의 한 부류로서 피고인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호사가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 공식적인 절차가 아닌 법 기관의 권력을 가진 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처리하는 것임을 알게 된 요제프 카는 일을 그다지 수월하게 처리한다고 볼 수 없는 변호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화가 티토렐리를 통해서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변호사가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전관예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요제프 카의 행동은 내가 고소를 당했을 당시 취한 행동의 수순과 매우 비슷하여 범인(凡人)이 취하는 일반적인 행동 패턴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내가 경찰서로부터 고소당한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일로 고소를 당했으며 억울하다는 생각, 그리고 조용히 끝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법을 찾아보고, 지인을 통해 변호사와 상의해보고, 법률구조공단에도 도움을 요청해본 후에야 그러한 일들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는 나도 지인을 통해 이 사건을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제프 카는 티토렐리에게서도 만족할 만한 도움을 얻지 못했지만 그에게 대가(티토렐리가 그린 풍경화들을 구입한다.)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티토렐리의 방에서 예전 법원 사무처에서의 느낌과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티토렐리의 방이 법원 사무처 옆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티토렐리가 했던 말처럼 그가 법원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좀 바꿔 말하자면 티토렐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내세운 것들이 요제프 카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의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그가 맞서 싸우려는 부조리한 법기관의 행동 양식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요제프 카는 부조리한 권력의 속박 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3) 법 앞에서
대성당에서 교도소 신부가 요제프 카에게 들려주는 ‘법 앞에서’ 라는 이야기는 법과 그것에 소속된 것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전해준다. 이야기 속 주인공인 시골 농부는 법이라는 것은 ‘정말로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요제프 카도 물론 시골 농부에 비유할 수 있다. 문지기는 법에 종사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로 볼 수 있는데, 경찰, 변호사, 검사, 판사 등등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 나열한 직업들의 권력에 따라서 문지기의 순서를 정해도 될 것 이다. 이야기 속의 문지기는 농부가 물어보는 것에 대한 정보 이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문지기는 자신의 직무는 성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으나, 농부의 상태를 관찰함으로써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을 방치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살인자로 볼 수 있다. 문지기가 농부를 관찰하고 가만히 놔두면 문 앞에 앉아 죽을 것이라는 예측을 했을 때, 문지기는 최소한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지기의 사명은 단지 문을 통과할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지, 그 문을 통과하려는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부는 문지기를 옹호하며 잘못은 적절한 질문을 하지 못한 농부에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신부도 법원에 속해있다는 것으로 볼 때 법을 둘러싼 조직이 일반인에게 전혀 우호적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제프 카는 ‘법 앞에서’에 대해 문지기가 속았다는 의견과 시골 농부가 속았다는 의견에 대해 반반씩 수긍을 한다. 그것은 시골 농부가 법이라는 것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생각할 뿐이고, 법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 한 것에 일종의 책임을 묻는 한편, 법의 주변에서 무지한 시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야할 법에 속한 사람들이 시민의 위에 군림하여 마땅히 다하여야 할 도리를 잊고 부패해버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고소를 당했을 당시 사건 담당 형사는 나에게 첫 번째 문지기나 다름없었다. 내가 고소를 당하여 피고인으로 소환된 시점부터 형사에게 나는 죄인으로만 보였고, 사건을 살펴서 내가 죄인인지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업무 처리에 필요한 질문이외에는 나에게 필요한 어떠한 조언도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정보를 조사하여 질문을 하여도 그에 대한 것 이상의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반응은 법률구조공단이나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변호사에게서도 똑같았다. 당시 내 소송을 같이 고민해주던 친구는 ‘법이라는 것을 몰라서 생긴 죄는 그 죄의 처벌을 가볍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선고된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법을 모르는 것은 결국 죄’ 라고 말했다. 게다가 모르면 죄가 되어버리는 법이라는 것은 서민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단어와 한자어(21C의 한국에서 한자는 마치 유럽의 라틴어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로 되어 있어, 서민은 다가가기 힘든(마치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멀고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4) 죽음
요제프 카는 1년간의 소송 끝에 저항을 포기하고 법원의 처사에 순순히 응하여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법 기관의 배후세력에 대하여 나약한 개인으로서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의 권력 앞에 굴복한 것이다.
나는 내 소송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노력했지만 결국, 스스로는 결백함을 입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보이는 고소인과 합의를 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소인에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고 그를 돕겠다는 각서까지 써주고는 고소취하를 받았다. 요제프 카가 죽으면서 외친 ‘개 같군.’ 이라는 말은 그 당시 나의 생각을 대변해준다. 카의 마지막 말은 돈과 권력을 수호하고 무고한 서민을 농락하는데 사용되는 법과 그 기관들을 향해 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요제프 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던 다음과 같은 생각들에서 ‘개 같군.’ 이라는 말이 바로 굴복한 자신을 향해 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잊었던 항변이라도 있는 걸까? 물론 그런 것이 있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논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살고자 하는 사람에겐 저항하지 못한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판사는 어디에 있는가? 결코 가보지 못했던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가? ...
카프카는 작품을 통해서 요제프 카와 같은 개인을 비판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개인을 억압하는 법과 그 것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비판하고자 한 것일까? 아마도 양자 모두를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5)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대한 소송이며, 법원 공간의 비현실성이 의미하는 것은?
답답한 작품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알고 싶었던 아주 간단한 내용, 바로 소송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때의 허탈감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왜 카프카는 소송의 실체를 작품 속에 나타내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이라는 것은 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절차를 통해 수행된다.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법의 권력에 속한 사람들은 충분히 소송의 내용을 카프카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과 공문들은 마치 암호로 꽉찬 알아듣지 못할 것들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확실해지는 것은 단 한가지 뿐, 바로 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씁쓸하게도 이런 상황속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법의 권력 안에 있는 사람들-문지기들-뿐이다. 그들은 가해자 집단의 일원이면서도 모든 책임은 피고에게 전가한다. 이를 통해 작가가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완전히 폭력이 되어버린 법의 실체를 보여주려 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악덕 브로커나 카프카를 유혹하는 여자들을 통해, 법의 부조리에 기생하며 피해자들로부터 이익을 챙기는-다시 말해, 법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자들도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맺으며..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는 시점에 서서, 나는 법-이성적 고민의 결과물-을 폭력이라 부르는 것에서 스스로도 어색함을 느끼고 있음을 토로해야겠다. 법이란 것이 정말 폭력이 될 수 있고 법권력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해 나의 경험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 대답은 ‘그렇다’ 이다. 경험을 해보지 않은 자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고, 경험한 자들도 믿고 싶지 않은 그러한 법권력과 폭력이라는 것은 실제로도 존재한다. 작가는 바로 그러한 면을 상징하기 위해 법원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결국, 나의 경험을 회상하며 읽은 카프카의 『소송』이란 작품은 참으로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를 지닌 비현실적 사건의 서술을 통해, 현실 세계의 치부-법권력과 폭력-를 드러낸 참으로 치밀한 이성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 프란츠 카프카, 『소송』, 이주동 역, 솔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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