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한 타자되기

여타수록작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한 타자되기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읽고

독어교육과 최민아


주위를 둘러보면, 참 빠른 것들이 많다. 이미 오래 전에 원형적이고 순환적인 세계관이 막을 내렸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아무리 발전과 진보만이 가능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이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닐까. 아마추어 정신을 표방하는 올림픽에서조차 일분 일초에 목숨을 걸 듯 앞다투어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열을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우리가 하루하루 재빨리 달리는 것과 지구온난화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해.(「카스테라」, 13쪽)”라고 말하는 것이 지금 꼭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세상을 잡고 엄청난 속도로 빙빙 휘두르는 것, 혹은 지칠 수 없도록 우리에게 계속해서 채찍질을 해대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을 잡고 돌려야 하기에, 채찍질을 해야 하기에, 아마도 그것은 ‘손’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박민규가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너무나 뜨거워 계속 부패되어 가는 것, 견딜 수 없는 것.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

타자를 가장 손쉽게 정의하는 것 중 하나는 ‘낯선 무언가’ 일 것이다. 언제나 에일리언은 한번도 본 적 없는 가장 끔찍한 괴물의 형상이었으며, 공산당은 머리에 뿔달린 악마, 기름때에 찌들은 노동자들은 꼽추, 앉은뱅이, 난쟁이였다(물론 이제는 거무튀튀한 동남아인들로 대체되었지만). 그런 면에서 박민규가 시도하는 ‘열을 식히는 지혜’는 진부하면서도 놀랍다. 그는 전복을 시도하지 않는다. 다만 ‘식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익숙함,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절망적인 것은 자본주의가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이제 바로 우리가 된다. 타자가 되어야만 자본주의를, 욕망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나’는 ‘산수’와 계산 속에서 살고 있다. 그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구름이 지나가고 지구가 돌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계산 또한 이어진다. 산수는 물론 강력한 진리의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나’가 배웠던 산수란 것도 아버지를 통해 물려받은 세상에 대한 무력감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산수가 지배하는 지구 대신에 ‘나’는 늘 화성과 금성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구는 산수의 지배를 받고 있을까. 박민규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산수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지만, 사실 우리의 간단한 약속에 의해 유지된다. ‘1+1=2’라는 간단한 진리만 부정한다면, 산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에는 ‘기린’도 있다.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섰대요. …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93쪽)”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없다. 너구리가 등 뒤의 때를 밀고 비누칠을 해 주듯이 가만히 손을 잡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런데요? 이제는 산수같은 것은 하지 않는) 기린입니다.”

너구리나 기린 같은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혹은 관심을 가질 수 없도록 교묘하게 배제된 존재들이겠지만, 이제 그것들은 우리의 전면에 등장한다. 『카스테라』에서 결국 말해지는 존재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코리언 스텐더즈」는 충격적인 소설이다. ‘기하 형’의 행적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속적 삶, 자본주의적 삶에 늘 반하고 있다. 아무도 전통적 유기농법의 쌀을 바라지 않는다. WTO, FTA가 삶을 지배하는데 공동체니, 유기농쌀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니 그러한 것들은 배제되어 마땅한 것들이다. 결국 ‘기하 형’의 밭에는 KS가 찍혀지고 만다. KS(한국산업규격, 코리언 인더스트리얼 스텐더즈)는 대량생산되어 일정하게 규격화된 제품, 특히 일정한 품질규정에 합격한 제품들만 받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공동체적 삶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어느새 거대한 도장을 들고 우리의 삶을 검열하는 외계인의 손이다.

규격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삶, 그에 반하는 삶에 쾅쾅 도장을 찍어대는 자본주의. 그렇다면 우리의 스텐더즈, 표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오리배’나 ‘헤드락’ 같은 것이 아닐까. 「아, 하세요 펠리컨」에 등장하는 ‘오리배 세계시민연합’ 회원들의 특징은 제 3세계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자본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전지구에 흐르듯이 그들도 끊임없이 자본을 향해 이동한다. 뉴멕시코, 한국, 중국으로, 퐁당거리면서. KS가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지구적 삶에 맞추어 살라는 것. 비행기값이 없다면 오리배를 타고서라도, “언제나 삶은 만만치 않은 거니까,(「아, 하세요 펠리컨」, 149쪽)”, 아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비자본가의 삶은 언제나 비루한 것이니까, 어쩔수 없이 퐁퐁거리면서.

만약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오리배 같은 것은 타지 않을 것이다. 대신 당당하게 남에게 헤드락을 걸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헤드락’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 (아니다). 우선 힘이 있어야지.(「헤드락」, 264쪽)”.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젖소의 배를 터뜨려 죽이고, KS마크를 쾅쾅 찍어대는 외계인이 무섭기는 하지만, 박민규의 소설은 그리 암울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경쾌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너구리, 기린, 개복치, 대왕오징어가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개복치에 비하면 엠파이어스테이트, 자본주의 제국은 하나의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박민규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강력한 긍정이다. 『카스테라』소설집의 처음과 끝이 「카스테라」와 「갑을고시원 체류기」로 채워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냉장고는 소중한 것을 부패하지 않도록 막거나 인류의 해악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는 점에서 가장 모순적인 존재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모순들의 집합체 즉, 명작, 국가(아버지), 어머니, 학교, 미국, 중국 등의 총체가 바로 ‘카스테라’인 것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 박민규가 말하는 긍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모순들을 감싸안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긍정. 단 하나의 전제는 이 속도의 경쟁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 쉴 수 있다. 자꾸 뜨거워지는 이 세상 속에서,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 혹시 실패를 겪거나 / 쓰러지더라도 /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갑을고시원 체류기」, 304쪽)” 우리에게는 쉴 곳이 마련되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기린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기린이 되어본다면, 이 세상도 조금은, 바뀌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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