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장려상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국사 새날반 오근창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이하에서 별다른 표기없이 쪽수만을 쓴 것은 이 책에서의 인용이며 강조는 본문의 것이다. 책의 각 장은 나름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기에 따로 읽어도 무리는 없지만 마르크스 문제설정의 고유한 이동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순서대로 독서하는 것이 좋다. 이 서평 역시 대체로 그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발리바르로서는 드물게도) 논문 모음집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로 쓰여진 단행본인 “마르크스의 철학”에 역자가 발리바르의 세 논문을 덧붙인 것으로서, 마르크스와 그를 계승하는 사상적 전통의 철학적 문제들을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단순한 마르크스에 대한 개관이나 마르크스 교리 해설서의 수준을 넘어서며, 오히려 마르크스 자체에 천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이론적, 역사적 난점들 -주체, 목적론, 진화주의, 이데올로기 등- 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마르크스에 대한 맹목적 고수나 마르크스의 난점들을 알리바이로 한 마르크스의 기각이 아닌, 그 난점들의 내재적 극복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알튀세르-발리바르의 프로젝트로 들어가기 위한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본 서평은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몇몇 쟁점들을 조금 더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두 가지 길: 실천 또는 이데올로기

발리바르는 우선 마르크스의 이력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그에게 중요했던 몇몇 계기들을 해명한다. 1848년 혁명의 실패 및 1870년의 파리코뮌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알튀세르가 이미 정식화한 바 있는 인식론적 절단, 이데올로기 개념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경제학 비판 프로젝트 개시 등이 그것이다. 먼저 (알튀세르가 “절단의 ‘앞면’”(38)으로 묘사함으로서 인간주의 및 소외의 문제설정에 입각해 쓰여진 『1844년 수고』와 역사유물론의 예비적 정초로서의『독일 이데올로기』사이에 위치시키는(마르크스의 인식론적 절단에 대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청년 맑스에 대하여: 이론의 문제」『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7 및 에티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 개념」, 서관모 역, 이론 13호, 새길, 1995를 참조)「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시작해보자. 철학의 사명을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하는 열한번째 테제는 ‘실천’으로서의 철학, 속류적 유물론 및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새로운 유물론을 소묘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근대 관념론이 확립한 ‘표상(representation)의 철학’ 및 ‘주체성(subjectivity)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곧 마르크스는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관념론적 주체에 대해 사회적 과정의 효과로서 구성되는 주체, 그 자신에 대해 의식적이지 않은 익명적이고 다수적이며 실천적인 주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를 실천과 등치시킴으로써 관념론에서 전적으로 탈출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표상할 영속적인 가능성을 마련해 놓았”(49)다는 사실 때문이다(우리는 루카치의 프롤레타리아 ‘주체’ 개념이 오늘날 네그리나 하트 같은 자율주의자들의 ‘다중’(multitude), 또는 ‘제헌권력’(constituent power) 개념 속에서 일정하게 계승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제국』에 대한 비판으로는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제국이라는 유령』, 김정한 옮김, 이매진, 2007을 참조할 것. 이는 들뢰즈와 푸코에게 그 이론적 자원을 제공받고 있는 네그리와 하트에게서 정치의 타율적 계기(이데올로기)의 공백이 초래하는 쟁점과도 연관된다).

또한 인간적 본질을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ensemble)으로 제시하는 여섯 번째 테제는 “초개인성”이라는 관계의 존재론을 통해 실재론적 관점과 유명론적 관점, 개인주의적 관점과 유기체론적 관점이라는 불모의 이분법을 혁신한다. 이는 자연히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개인의 표상에 대한 문제로 연결되는데, 여기서 바로 이데올로기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니체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의 어떤 논의들을 예상하는”(59) 슈티르너의 반론에 맞서 마르크스는 프락시스라는 통념을 생산이라는 통념으로 대체하고, ‘이데올로기’라는 철학사에서 유례없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응전하는 것이다(이는『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 및 교환의 일정한 양식을 특징짓는 분업의 역사와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전도이자 계급투쟁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술에 잘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는 “대중들의 무지 또는 인간적 본성에 각인된 약점”과 외부로부터의 “주입”(74)이라는 두 개의 관념을 지속적으로 회피하면서 사회의 계급적 분할들을 통해 강제되는 교통의 한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의식의 계급적 성격의 이론”(76)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일종의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소외된 실존”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를 얻는데, 바로 이 이데올로기를 보증하고 강화하는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또는 지적 차이,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고 강화하는 지식인 및 국가의 관계의 문제 등이 주요한 문제로 부상한다.

다시 문제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기이한 동요”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생산과 이데올로기, 토대와 상부구조, 분업과 의식 사이의 심연을 ‘계급’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통해 사고하는 것은 물론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의 거대한 혁신이지만, 사회적 의식의 이론이 단지 “몰인식 또는 환상의 이론”(71)으로 제시될 때, 또는 이데올로기가 단지 관념론과 등치되고 프롤레타리아가 그 반정립으로 제시될 때 우리는 어떤 이론적, 정치적 무능력에 사로잡히게 되는가? 먼저『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전개된 이데올로기 이론으로부터 “모든 계급들의 해체에 직접적으로 선행하고 혁명적 과정을 시작하는 비계급”(84)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무소유이기에 ‘무환상’인 프롤레타리아 개념이 직접적으로 연역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1848년의 사건들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러한 표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잔인하게 부각시켰고,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고타강령 비판』등의 저서에서 드러나듯, 보편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관념을 확실히 포기하고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하게 된다.

『자본』1권에 제시되는 상품의 물신숭배 이론은 “‘상품화’라는 형태들 속에서 부르주아 세계의 사물화(rétification)라는 관념과......교환과정 속에 연루되는 주체화양식(mode de sujétion)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88)을 동시에 진전시킨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교환가치 자체를 고유하게 담지하는 것으로 표상되는 화폐 및 상품의 물신숭배는 현실에 대한 착시나 미신처럼 ‘진실’로 대체될 수 있는 주관적 현상이 아니라 “현실(특정한 사회적 형태 또는 구조)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여기서 독일어 착각(Schein)과 현상(Erscheinung)의 어원적 동근원성은 시사적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차별적이다. 따라서 “외양을 제거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92)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물화와는 전혀 다른,『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가 보여준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반정립에 대한 설명은 이후 이른바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게오르그 루카치,『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옮김, 거름, 1993의 4장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참조.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은 인간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데, 이는 베버의 합리성 이론을 노동가치의 양화를 다루는 마르크스의 상품물신과 결합시킨 것이다. 덧붙이자면, 발리바르가 수차례 지적하는 것처럼, 마르크스가 결코 어디에서도 ‘역사의 주체’나 ‘계급의식’ 같은 말을 쓴 적은 없다). 상품의 객관성은 과학적 객관성, 수량적 합리성, 도구적 이성의 확산과 짝지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루카치에게서 소외의 폐지이자 사물화의 전도로서 ‘역사의 주체’라는 종말목적론의 망령이 발명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오히려 루카치의 해석(『자본』에서의 문맥과는 무관한 “외삽”)과는 다른 “구조주의적” 해석에 주목한다. 예컨대 파슈카니스와 장 조셉 구의 분석은 “사물들의 경제적 물신숭배”와 대칭적인 “인격들의 법적 물신 숭배”(104)을 분석함으로써 계약은 교환의 이면이며 그것들은 서로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서 이미 평등과 자유의 등식을 “상품과 화폐의 유통의 관념화된 표상”과 동일시한 바 있기에 마르크스 고유의 문맥에 더욱 가까운 이 경제적-법적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은, 현실적 개인들이 쓰는 이 “법적 가면들”의 보편성이 자체로 야기하는 모순에 대한 환기를 요구하는데, 바로 인권이 “착취를 은폐하는 언어와 피착취자들의 계급투쟁이 표현되는 언어로 동시에 나타”나는 양가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후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 프로젝트는 이러한 지배적 추상화, 동일성, 보편성에 내재적인 모순과 동요, 양가성의 주제를 선회하고 있다(특히 서평 도서에 수록된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지식인들의 폭력」 및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민족형태에 대하여」『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편역, 이론, 1993과 에티엔 발리바르,『대중들의 공포』, 최원, 서관모 옮김, 도서출판 b, 2007의 「모호한 동일성들」과 3부 맑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 등을 참조할 것).

이데올로기에서 물신숭배로 이행한 마르크스의 경로를 도식화시켜서 이제까지의 발리바르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이 강요하는 제약들의 부인 또는 망각이 강조되는『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우상(“자유, 정의, 인류, 법”과 같은 추상적 표상), 권력 구성의 이론, 신앙의 영역, 관념론, 국가 이론에 관계된다면, 경제적 통념들과 법적 통념들 사이의 조응, 물질적 생산이 교환가치의 재생산에 종속되는 방식이 강조되는『자본』의 물신숭배 이론은 물신(상품 특히 화폐와 같은 물질적 사물), 주체화의 메커니즘, 지각의 영역, 현실주의 또는 공리주의, 시장 이론에 관계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라는 두 가지 문제틀은 양자택일이나 질문과 해답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주어진 과제는 오히려 이 둘을 어떻게 절합(articulation)시키느냐하는 것이다. “정치(혁명적 정치를 포함하여)는 관념적인 것들의 문제인 동시에 습관들의 문제”(110)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발리바르의 분류 속에서 국가 이론이 아닌 시장 이론이 주체화 양식에 연결되는 것이 다소 이색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물신숭배에 대한 오해(예컨대 최근의 사례로 지젝 등이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의 1부 「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고안해냈는가?」에서 물신숭배에 관한 분석을 참조할 것. 이는 종국적으로 -설령 그것이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무의식적 주체라 할지라도- 주체라는 범주의 재복귀와 계급투쟁에 대한 얼마간 구좌파적인 재단언으로 귀결될 수 있다. 각각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5와 슬라보예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2006)는 이것을 단선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신숭배의 상이한 독해가 가져오는 이중적 결과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데,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의 사물화의 극복으로서 자기의식적인 투명한 주체가 아니라,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시론적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및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한 노트」『역사적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새길, 1993) 이데올로기적 장치들, 제도들의 물질성 속에서 타율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에 대한 분석이 물신숭배 이론과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철학: 진보 또는 모순

다음으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 역사철학 내부의 진화주의라는 쟁점을 다룬다. 물론 콩도르세와 콩트에게 연원하는 실증주의적 진보 관념에 대해 마르크스는 위기, 갈등, 폭력, 투쟁 등의 단어를 각인시키고, 역사의 동력으로서 생산양식의 변증법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전화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러한 진보 관념이 독일사민주의를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와 개량주의,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로서 소련 공산주의(알튀세르가 명명한 바, 제2인터내셔널의 ‘사후 복수’), 제3세계의 사회발전 이데올로기에 그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목적론의 핵심이 되는 진보라는 근대적 관념은 “시간의 비가역성 및 선형성” 및 “기술적 또는 도덕적 완전화의 관념”(124)을 내포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기의 전화, 따라서 자동전화 또는 오히려 주체들의 자율성이 그 속에서 실현되는 자동발생으로서의 전화 관념”을 자신의 구성요소로 삼고 있다. 마르크스 역시 진보라는 거대한 근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일까?

역사의 합리성 및 역사의 인식가능성을 전제하는 이러한 ‘시간성의 변증법’의 관념은 이후 그람시(옥중수고)와 벤야민(역사철학테제)에 의해 이미 비판된 것이지만, 무엇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 자신에게서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는 모순과 경향성의 변증법을 주목하도록 제안한다. 단순한 선형적 역사가 아닌 『자본』에서 분석된 두 개의 역사적 ‘경향’(경향은 반경향에 의해 그 진행이 감축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생산의 사회화 경향”과 “인간들의 ‘탈사회화’ 경향” 사이의 모순, 그리고 그 모순에 개입하는 계급투쟁의 역사적 형태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의 진행은 곡선의 적분 형태라기보다는 “각 계기마다 작용하고 전진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들의 관계”(138)로서의 미분적인(différentielle)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그 조건들과 형식들의 부단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 그 자신의 모델”(132)이며 “자본주의 ‘일반’이 아니라 다수의 자본주의들의 해후와 갈등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자본주의’만이 있는 것처럼 보편사가 아니라 단지 독자적인 역사성들만이”(148) 존재한다(발리바르는 이미 월러스틴과 공동의 저작을 저술하기도 하였다(Etienne Balibar and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 ambiguous identities』, translation by Chris Turner, Verso, 1991). 역사적 자본주의에 관한 개론서로는 백승욱, 『자본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 2006 및 조반니 아리기 외,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세계체제론의 시각』, 권현정 외 옮김, 공감, 1998을 참고할 것). 어떤 의미에서는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 및 과잉결정 개념 역시 이러한 마르크스의 계기를 급진화시킴으로써 종말목적론적 역사관 및 헤겔적인 표현적 인과론에 탈출구를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조는 언제나 정세의 내적 결정 속에 존재하기에 구조와 정세의 이분법은 거짓 대당이 된다.

마르크스 철학의 전망: 정치와 다른 장면

마르크스 철학은 오늘날 가능한가? 또는 이것은 하나의 조직(당, 사회운동체 등)의 교리나 제도권 대학의 강단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엥겔스(『자연변증법』, 『반듀링론』)나 스탈린(소련의 악명높은 DIA-MAT) 등에 의해 부르주아 철학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마르크스 철학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 그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체계적인 철학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실천이 “항상 비철학과의 대결”(158), 철학 그 자신의 타자(역사학, 경제학, 문화인류학, 정신분석학.......)와의 교섭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을, 더 중요하게는 대중운동과 융합됨으로써 그 물질적 힘을 획득해왔음을 암시한다(초기의 알튀세르가 철학을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단절을 사고하는 것으로서 “이론적 생산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정의했다가 자기비판 이후 그것을 “최종심급에서의 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이라고 정정했던 사실을 상기하자. 루이 알튀세르, 「철학의 전화」, 『역사적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새길, 1993 및 에티엔 발리바르,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편역, 이론, 1993,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 백승욱, 서관모 옮김, 동문선, 1997의 1부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1984~87)을 참고할 것).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현대철학의 지배적인 두 가지 테마, “간間주체성의 테마”(주관주의)와 “물리학과 생물학의 새로운 동맹”에 기초한 복합성의 테마(자연주의)를 넘어선 마르크스의 “초개인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 존재론을 심화시키는 일이다. 도식화시켜서 말해보자면, 마르크스에게서 이 ‘초개인적’인 것이 계급투쟁 및 경제(‘생산양식’)의 상관물로 제시되었다면, 이것을 이데올로기 비판과 결합된 지적 차이 및 성적 차이에 대한 분석, 상징적 구조의 작용 속에서 ‘주체’의 구성을 다루는 ‘주체화양식’을 접합시킴으로써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발리바르는 억압되었던 주체화양식의 ‘역사성’의 자체에 대한 질문, 역사적 제도들의 “내재적인 힘관계에 입각”한 그 제도들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제안한다. 결국 발리바르가 겨냥하는 철학의 역할이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던 이데올로기 분석에 다름 아닌데,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기능주의이며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다시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에 외재적인 어떤 자율적 ‘주체’를 요청함으로써? 그 대신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 동일성, 보편성이 갖는 모호성과 양가성에 대해, 다시 말해 지배이데올로기란 항상 피지배자들 자신이 체현하는 이데올로기이며 그렇기 때문에 권위의 동어반복적인 정식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한다(“그 한계에 있어서 관념적 보편성은 항상 봉기적 보편성의 기초 위에서 사고”(228)될 수 있다). 발리바르의 전략의 고유성은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변증법을 이데올로기라는 탈출불가능한 장소 속에 내재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에서 성립한다. 이처럼 피지배집단의 상상의 보편화가 바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속의 수동적 대중은 항상 그리고 이미 능동화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동일성의 모순적 진동 속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및 ‘시빌리테의 정치’도 가능해진다. 가령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의 말이 집약적으로(또 강렬하게) 보편주의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 ‘부정의 부정’을 표현”한다는 발리바르의 문장을 주목해보자. 예컨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정상성과 규범성이라는 규제적 이념의 층위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다소 공허하게 전제한다면, 발리바르는 거기에 ‘어떤 인간도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변증법적 역전(부정의 부정)을 가하는 것이다(인간과 시민의 변증법). 이처럼 정치는 오로지 ‘다른 장면’(other scean)에서 이루어질 뿐이며, 정치의 전화 역시 (상징적) 폭력의 생산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 제도의 생산 및 전화, 대중이데올로기의 구성과 해체 과정에 착목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사실 특유의 만연체의 난삽한 문체 외에도, 발리바르가 언제나 모순과 아포리아만을 찾아낸다는 사실은 쉬운 해답과 명쾌한 주장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답답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회피불가능한 아포리아를 정당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것 외에 “철학자에게서 더 나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철학의 안과 밖에서 투쟁이란 본래 둥근 원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분명 쳇바퀴 위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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