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을 다시 사고하기
1등상
‘돌봄’을 다시 사고하기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영어교육과 04 명수민
특정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서 고민할 때면, 우리는 상당히 많은 ‘자원’을 해당 문제에 투자하기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진지하고 중요한 문제일 경우 우리는 그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시간, 쌓여온 연구 성과, 지적 노력, 인식 능력의 유한성 등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에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문제가 사회적 의제(議題;agenda)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문제를 (적합성과는 큰 상관없이) 중대한 것이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진술은 지극히 당연하고 진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인 의제 설정을 위한 노력은―하버마스의 싱거운 표현을 빌자면―‘의사소통적인 합리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일련의 과정은 진정으로 투명하고 중립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여러 정치성들의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는 자유주의적인 보수주의 수사학과 맞닿아 있지는 않을까?
이와는 반대로,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과정에는 치열하게 ‘정치적’인 문제가 뒤따른다. 다시 말해, 특정한 문제를 의제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모아 고민하게 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행동과 개입의 결과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사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 올리려면,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지고 볶는’ 정치적인 제스쳐, 즉 ‘운동movement’을 병행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은 보수주의적 담론이 흔히 언급하는 ‘합리성’과는 아예 다른 종류일 것이다.
그렇기에 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며, 운동이 가능한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장벽’까지도 허물어야 하기 마련이다. 그 장벽의 종류와 강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여전히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공고히 유지되어 왔던 남근이성중심주의는 소위 ‘여성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발명해냈고,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사회적 의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침묵의 체제를 유지해왔다.
다시 말해, 남근이성중심주의는 ‘여성’의 것이라고 규정된 일들, 예컨대 보살핌, 가사 노동, 감정 노동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 침묵 뿐 아니라 무보수나 저보수라는 정치경제학적인 선택과 냉대로 응답했다. 이는 아동 양육, 노인 수발 등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력, 노동의 강도, 감정의 소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저임금 노동으로 환원해 왔던 한국의 상황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에 관여하는 이들에게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을 요구하고, 이러한 가치를 미화함과 동시에 이에 대해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비난해 왔던 경향과도 맞물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남성 중심적인 정치를 비판하고, 지금껏 폄하되고 부정되어 왔던 가치들을 끌어올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남근이성중심주의가 일부러 보지 않았던 문제들을 의제화 할 통로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동시에 페미니즘 이론은 그 통로를 통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의제화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게 진행되고 있으나 지속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이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이러한 페미니즘적 사유를 ‘또 다시’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 치열한 국제적 경쟁이 필요한 시점에 ‘돌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우선적으로 경제 개발과 경쟁에서의 승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저급한 논리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현실’의 경험 속에서 설득력을 얻기 쉽게 된다. 이제 대다수의 문제들은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되고 경험되기 시작했으며,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 문제들은 무력해지며 때로는 아예 논의 대상에서 퇴출되기 일쑤다. 이렇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진부하고 오래된 전투적 논리가 전 세계의 ‘현실’인 것처럼 보이기에, 보살핌, 가사 노동, 여성 노동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은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진 비판과 대안을 내어 놓고 있다. 자칭 타칭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폴브레는, 현재 주류 학계에서도 헤게모니를 쥐고 급속도로 성장해 버린 경제학 담론 ‘안’에서 돌봄의 문제를 사고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가슴The Invisible Heart”이라는 표현은,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수준으로 신성화된 채 현대의 보수 경제학자들에게 절대적 명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의 패러디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있다면, 지금껏 많은 목소리들이 그래왔듯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목소리로 이래라 저래라 주장만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폴브레는 예상 가능한 반론들을 우선 점검하고 그에 대해 성실히 답변 하며, 냉정한 관점에서 ‘현실’을 진단하고 다른 관점으로 볼 것을 요구하며, 여러 가지 ‘제도’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정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폴브레는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돌봄 경제학’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설득력 있게 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브레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가졌던 최초의 의문은 아마도 이것일 듯하다. “왜 시장은 사랑․의무․호혜의 가치를 무시하는가? 시장 밖에서 제공되는 돌봄 노동care work 없이는 시장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데도, 왜 돌봄의 가치는 폄하되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의문을 확장한 결과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가슴』일 것이다. 다시 말해 폴브레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말을 간단하고 거칠게 요약하자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를 재고해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돌봄에 대한 사유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주류 보수 경제학의 토대를 개괄적으로나마 검토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보수 경제학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결국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순진한 가정에 입각해 있음과 동시에, 이타적인 돌봄을 ‘자연적인 것’ 내지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기에 돌봄 노동에 대해서는 GDP 등 공식적인 경제발전 평가 지수에 제대로 포함시키지도 않고 있으며, 포함시키려는 노력조차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보수 경제학은 여성은 본디 아동 양육과 약자를 보살피는 것에 재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며,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훨씬 돌봄을 ‘효율적’으로 하리라 기대한다. 경제학에서는 특화된 분업이 효율성을 높여준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돌봄 노동에 투입되고 남성들은 다른 노동에 투입되어야 생산력이 높다는 식의 전제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남성 중심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보수 경제학 담론들은, 얼마 전 출간된 『다윈의 대답』등의 보수적이며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 생물학 연구물들과 짝패를 이루고 서로의 담론을 상보적으로 강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폴브레는 우선 역사학적 성과를 들어 반박한다. 폴브레는 여성들에게 체계적으로 자행되었던, 그리고 자행되고 있는 ‘폭력’들을 상기시킨다. 즉 여성들이 ‘집안’에서 돌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저질렀던 역사적 폭력들, 예컨대 중국의 전족, 이슬람의 퍼르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 국가에도 만연한 가정 폭력 등을 언급함으로써, 여성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역사적으로 평가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이렇게 돌봄이 지금껏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다고 하여, 우리가 그 모든 중요한 가치들을 거부하고 폐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분석의 ‘반복’을 통해서, 보수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성차sexual difference가 생물학적 ‘자연스러움’이나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지만 분명히 재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일은 아닐까? 또한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성역할 분리 영역이, 일련의 담론적인 발명품에 불과한 것이자 남성 중심적인 정치와 결합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일이 중요하지는 않을까?
사라 러딕은 『모성적 사유』에서 ‘모성motherhood’과 ‘어머니 역할mothering’을 구분하는데, ‘모성’은 물론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지만, 돌봄을 사유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어머니 역할’은 남성들에게도 가능한 것이며 얼마든지 옹호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폴브레는 이러한 사라 러딕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돌봄의 윤리가 주입되어 왔다면,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입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현재적으로도, 남성 역할과 여성 역할을 분리하는 ‘분리 영역’이라는 독트린은 굉장히 무책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분리를 통해 남성들은 돌봄에 수반되는 윤리적․애정적인 측면의 까다로움을 무시할 수 있게 됨으로써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여성이건 남성이건 돌봄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적극적으로 돌봄에 참여하고 수행할 의무가 있다는 윤리적인 목소리를 드높일 필요도 있는 것이다.
폴브레의 논리를 따르자면, ‘분리주의’가 아닌 타인과의 연계와 협력은 상호주의와 신뢰를 강화함으로써 더 큰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러한 가치에 입각한 체제가 훨씬 더 유능한 체제일 것이다. 그렇기에 돌봄은 여성과 남성을 가릴 것 없이 책임감을 갖고 모두가 상호 연계와 부조를 통해서 협력적으로 작동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연장선에서 폴브레는 만약 인간의 본성이 언제나 이기적이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이기적이라면, 이 이기적인 행동에 사회가 어떻게 보상을 주는지 주의를 깊게 기울이고 분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분석을 통해서, 반대급부로 이타심에 기반하고 있는 돌봄에 어떻게 더 많은 보상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폴브레는 돌봄 노동은 적절히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타적인 돌봄과 보살핌은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친절이라는 젖”이 있을 때 시장에 신뢰라는 중요한 가치가 싹틀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떠올려 봐도, 충분히 돌봄 노동은 적절하게 ‘보상’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돌봄 노동이 여성과 남성에게 골고루 분배되고 모두가 돌봄에 대해 책임감을 갖게 되더라도, 적절한 보상 없이는 이 호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개인적 만족감, 혹은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일차적이고 개인적인 보상만을 주게 되면, 돌봄을 전 사회적으로 알맞게 공급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한계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은 아닐까? 적절한 보상이 부족한 돌봄 직종에 종사하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결국 “나가떨어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는 통계와 관련 연구물들이 이러한 경향성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돌봄에 대한 적절한 보상제도, 유인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돌봄을 사유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적합성과 적용성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제 3장을 비롯해 책의 일부를 읽어보면, 폴브레가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나 적용할 법한 논의들을 적지 않게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폴브레가 든 예시들은 미국의 역사와 현실에서 유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책에 제시된 다양한 대안과 지침들도, 많은 경우 미국의 현실에나 적합한 것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폴브레의 분석을 한국의 상황에 문자 그대로, 문맥 그대로 적용해서는 곤란할 것이며, 적절한 ‘문화적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또한 폴브레는 여성과 남성 간 성차의 문제에 대해서 깊게 성찰하지 않고 있다. 위에서 성차의 문제를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작 이 책에서는 그 성차의 문제에 대한 ‘사려 깊고’ 근본적인 사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폴브레의 성차에 대한 빈약한 사유는, 기존의 성차 분리 영역에 근본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능력이 없다. 폴브레가 주장하는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과 협력은 물론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보다는 ‘차이에 민감한 평등’을 말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우선 ‘차이’ 그 자체의 성격은 물론 그것을 만들어 내는 구조들을 정치精緻하게 분석한 뒤에, 그 분석에 입각해서 평등을 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이’의 정치성 자체를 무화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담론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폴브레의 논의는, 기존에 만들어지고 유지된 성차 구조의 근원성과 폭력성을 그대로 가져가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타협’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시 말해 여성성/남성성이라 불리는 가치들―예컨대 돌봄 노동의 성편향성 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며, 각 개인 주체들이 그 가치들을 어떻게 경험하고 체화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이좋은 타협consensus 논리에 따라 여성 남성 모두 기꺼이 화해하고 다 같이 노력하자는 제스쳐로 읽히는 것이다. 미국 산(産) 담론에서 흔히 발견되는, 자유주의적 담론의 근원적인 한계가 느껴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폴브레 역시도 ‘경제학자’ 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경제학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기에 여러 가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으며 분명한 한계점도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다. 때때로, 돌봄을 장려하는 폴브레의 논의는 결국 ‘이익 논리’에 기반 해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까지도 받을 수 있다. 돌봄 행위가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되고 사회․국가 전체적으로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되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이 나타날까? 경제적․사회적 제도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돌봄의 윤리성과 ‘자율성’이 훼손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또한 이는 전쟁, 천재지변 등의 ‘비일상적’인 상황에서도 급진적 정치성을 보여주었던 돌봄의 정치성을 무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게다가 결과적으로 이는 모든 것을 ‘경제’의 관점으로 환원하려고 하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중심주의 경향과도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책을 냉소적으로 비난하고 거부하기에 앞서, 우리가 여태껏 돌봄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한 적이 없었다는 점, 혹은 형이상학적인 피상적 접근에 그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설사 돌봄에 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더라도 많은 경우 경제학의 ‘외부’에서만 개입해 왔다는 점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폴브레의 논의에는 현실적인 유효함이 일정 부분 있다고 보는 것이 정직한 일인 것 같다. 우리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필요도 있지만, 동시에 ‘경제학적’ 맥락도 같이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경제’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어떻게 새롭고 대안적인 경제 질서를 만들 수 있는지를 다각도의 방면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시한 여러 가지 대안들과 분석들을 약간만 비틀고 조합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설득력 있는 대안과 분석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폴브레가 이 책 전체를 통해 기본적으로 유지했던 페미니즘 적인 분석틀은, 젠더에 민감한gender-sensitive 경제학을 확립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지금까지 젠더에 몽매gender-blind/neutral 했던 경제학에 대한 유효한 비판지점들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가슴』을 통해 돌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 독자들은, 더 이상 신자유주의가 ‘현실’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진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주체들에게 ‘왜곡된 시각’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현대적인 이데올로기는, 맥락적이며 특수하고 우연적인 상황을 불변의 ‘현실’이자 선험a priori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역할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각 주체들에게 신자유주의를 고정되고 불변하는 ‘현실’로서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사유와 대안들을 신자유주의라는 특정한 체제와만 결부시켜서 사고하도록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돌봄은 신자유주의라는 상상적 ‘현실’에서 ‘이상적’인 가치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돌봄이야 말로 이 세계의 ‘지속’을 고민하는 ‘현실’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제대로 평가될 수 있도록 사회적인 의제로 적극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현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러 가지 병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하나의 분석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돌봄은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적 보완과 개입을 통해 지켜지고 보장되어야 하는 소중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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