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날을 위하여
장려상
『이갈리아의 딸들』, ‘다름’의 날을 위하여
생물교육과 김동근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브란튼베르그. 간만에 펜을 들어 글을 씁니다. 당신의 책을 보았거든요. 제목은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알게 건 올해 어느 친구의 입을 통해서였어요. 이갈리아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나라의 이름이었음을 알게 된 것도 말이죠. 또 다른 친구의 방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서는 냉큼 빌려 한 번에 읽어 내려 갔었더랬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서점에서 다시 그 책을 보고는, 한 권을 사서 또 다른 친구에게 선물해 주었어요. 책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공교롭게도 나와, 그리고 이 책과 관련한 세 사람이 모두 여성이었네요. 책을, 혹은 그 내용을 주고받은 네 사람 중 남성은 저 하나 뿐이었다니 괜히 무언가 시사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이 세상은 내게 참 어려운 곳입니다. 남성이라기에도 여성이라기에도,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 사회에 속하기에도 여성 사회에 속하기에도 어중간한 내게 이 세상은 참 좁은 곳이에요. 어디로 가든 금세 벽에 부딪히고 말거든요. 하지만 어쩌면 세상은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더 좁은 곳이겠지요. 여성의 가장자리에 서서, 가고자해도 뻗쳐 나갈 곳이 없는 이 세상이 말이에요. 어땠나요, 당신의 책은, 세상은 조금은 더 넓혀 주었나요? 그랬길 바랍니다.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당신의 시대에 당신의 세계를, 당신의 책이 조금은 넓혀 주었기든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글들이, 나의 시대를 조금은 더 넓힐 수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의의
당신이 쓴 것은 아니지만, 표지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요. 여성들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크나 큰 희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나는 여성이 아니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랬을 거라 믿습니다. 못 돼 먹은, 혹은 덜 된 남성들의 사회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약간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통쾌한 복수를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들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성들에게 희열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그로 말미암은 커다란 반성을 주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약간의 빛을, 약간의 목소리를 던졌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은 주제의 참신함도, 묘사의 섬세함도 아닌 '뻔뻔함'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바뀐다면, 이라는 수업이 반복되어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그 질문에 뻔뻔하게도 술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강점이지요. 당신의 그 뻔뻔함은, 작은 문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위치를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둥, 지금은 벌써 여성 상위 시대라는 둥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는 저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사상이니 인권이니를 떠나서 고통 자체를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그 문을 말입니다. 허나 그것은, 그들이 이 책을 읽을 때에 국한된 이야기일 것이며 또한 그들이 맨움들에게 감정이입할 때에 국한된 이야기이겠지요.
글을 읽는 도중 종종, 움들의 목소리를 남성의 그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그것은 때로 이 사회가―그리고 나 스스로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지만, 또한 동시에 조금만 무뎌지면 이 소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읽힐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글이란 건 어쩌면 참말 무력한 매체가 아닌가 합니다. 글이 허용하는 그 무한한 상상은 작자에게 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주어지는 것이기에, 쓰는 이의 마음이 조금도 전달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 그렇다고 당신의 책을 라디오 드라마나 영화로 만든다면 그것도 또 웃기겠지만요.
『이갈리아의 딸들』과 에코-페미니즘
당신을 글을 쓰는 내내,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바꾸기 위한 사소한 배려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브래지어 대신에 맨움들에게 입힌 페호라든가, 맨움은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이갈리아의 상식, 페트로니우스에게 잠수복을 사 주면서도 끝내 페호를 달고야 만 브램의 이중성까지 하나하나 잘 짜 맞춘 당신의 이야기는 정말로 사실적인 이갈리아를 만들어 내었지요. 그 덕분에 당신의 글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읽힐 것입니다. 태어날 때의 성이 아니라, 자라면서 교육받은 성이 얼마나 인간을 옭아 메고 있는지, 지금의 사회가 덮어 두고 있는 절반의 가능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려 줄 테지요.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이 사회의 많은 부분은 ‘만들어 져’ 있습니다. 요즘의 여성운동가들이 조소嘲笑를담아 사용하는 말입니다만, 여성이 한 번 월경을 할 때마다 남성의 성기가 1mm 씩이라도 잘려 나갔다면 사회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거라고들 하는데, 이갈리아에서는 한 술 더 떠 월경을 하지 않는 남성들을 부족한 존재로 생각해 버리지요.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여성의 월경만 해도, 초등학교 성교육 시간에는 그것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소중한 증거’라 가르치더니 도 어디에서는 냄새 나고 더러워서 싫다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일을 못하니 그것도 싫다고 그러더군요. 만들어 진 것이다 보니, 인간이 만든 것이다 보니, 아귀가 안 맞는 부분들이 여기저기 존재하는 게지요.
당신의 이야기는 상상에 기반한 판타지라곤 하지만 너무도 사실적이라 읽는 이들이 마음 놓고 집중하지는 못하도록 만듭니다. 나 또한 종종 현실을 잊고 움들의 목소리를 남성의 것으로 생각하곤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치 떨리는 분노에, 뻐근한 불편함에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기에 통감하는 여성이라면 역시나 그럴 것이고, 찔리는 게 많은 어느 착한 남성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뒤집어진 관계를 불편하리만치 세세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묘사한 것은 부러 그런 것인가요. 세월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당신의 글을 읽으며 마음껏 웃을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의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계속해서 그러한 글만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곤란할 거예요. 에코-페미니즘이라고들 하나요, 자연과 가까운 여성이 몽매한 남성의 잘못을 막아내는 이갈리아의 사상을 말이에요. 나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사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 사상의 사실 여부나 논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말이죠. 모성성을 사회 운영의 원리로 삼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없다 하여 사회에서 밀려나는 건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러한 에코-페미니즘의 원칙을 당신이 이 사회에 진정으로 적용시키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이 사회를 뒤집어 보았더니 자연스레 그런 원칙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겠지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여성이 자연, 남성이 '파괴적' 문명의 입장에 비유된다 할 때, 일부에서는 그러한 남성을 타도해야 한다고 보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남성 또한 원래는 여성과 한 가지로 자연의 입장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갈리아의 움들 또한 맨움을 보다 따뜻하게 대했어야 하겠지요. 혹은, 당신의 입장은 정말로 여성만이 자연과 가까우며 그것을 더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위 문화 에코페미니즘 같은 것인가요?
다시 한 번,『이갈리아의 딸들』
당신의 움들이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서른 해가 지난 지금, 페미니즘은 사회주의만큼이나 흔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흔한 것이 되는 만큼 자본주의가 강해져 왔듯, 페미니즘이 흔한 것이 되는 만큼 교묘한 여성 억압이 심화되었고 또한 자연에 대한 억압 또한 그러해 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움들의 반란 역시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지요. 어쩌면 당신의 페트로니우스의 책에 대한 평론가들의 말을 인용했던 것처럼, 모든 시도들이 '쓸데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같은' 것만을 찾아 왔을 터입니다. 남성으로의 동질성을 찾음으로써 사회를 만들었고, 여성으로써의 동질성을 찾음으로써 그에 저항해 왔습니다. 자연과의 동질성을 찾고 문명과의 동질성을 찾음으로써 또 갈라져 왔겠지요. 그러나 완전히 같다는 것은 환상인 바, 가까운 곳에서는 아마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까이 있다 보면 서로 다름을, 끝내 가까워 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마니까요. 그렇기에 늘 다른 것을 차마 보지 못 하고 누르고 도 각아 내어 같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겠지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사람을 또 자연을 허물어 버리고는 만족하지 못 하고 더 먼 곳으로 눈을 돌려 왔을 터입니다.
요즈음은 펀드라는 것이 유행입니다. 베트남이니 러시아니, 이제껏 주목받지 않았던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지요. 그런 것들이, 가까운 곳을 다 허물어뜨려 버린 이들이 또 다른 동질성을 찾아 먼 곳을 향하는 원정이 아니길 빌어보지만 희망은 적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는 '다름'을 억압하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누구는 동성애를 병이라 말했고, 누구는 장애인은 낙태시켜도 된다 말했습니다. '같은 것들의 자기 증식'을 이 사회가 언제쯤 포기하고, 공존을 추구하게 될지, 그저 요원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책은 오늘에도 유효합니다. 같은 것을 추구하고 다른 것을 배제한 사회가 어떤 곳인가를 잔혹하리만치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클라라 스파크스는 맨움을 못 본 체 하였지만 당신은 그러지만은 않았습니다. 이갈리아의 맨움 해방 주의자 동맹이 이 땅의 여성 해방 주의자들과 만나는 날, 이갈리아의 팔루리안들이 이 땅의 퀴어들과 만나는 날, 이갈리아의 월경 축제가 이 땅의 '마법'들과 만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당신의 책이, 페트로니우스가, 그리고 내가 있으니 영영 못 꿀 꿈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다름이 활개 치는 그 땅은, 이갈리아가 아니라, 이갈란드정도로 이름 짓는 게 어떨까요. 상상 속의 유토피아가 아닌, 실존하는 땅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나가며
나는 지금 어느 서점의 스무 해 살이를 기념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발표 서른 해를 기념하며 쓰는 편지가 되겠군요. 기념할 일들은 참 많습니다. 누구의 탄생 몇 주년 이니, 무엇의 발족 몇 주년이니, 무슨 항쟁 몇 주년이니 차고 넘치는 게 기념일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은 기념할 일이 없습니다. 저들에게는 또 하나의 '다름'을 소탕한 역사적인 날이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매일이 슬픈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음'의 주박에서 벗어나, '다름'이 자유로운 그 날, 우리는 이갈리아의 월경축제만큼이나 큰 축제를 열어도 좋을 것입니다. 다름축제의 그날, 다시 뵙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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